박노해, 조금씩 조금씩 꾸준히
사람들은 하루아침에 꽃이 피었다고 말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떠오른 별이라고 말하지만
사람들은 하루아침에 그가 변했다고 말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그가 무너졌다고 말하지만
꽃도 별도 사람도 세력도
하루아침에 떠오르고 한꺼번에 무너지지 않는다
조금씩 조금씩 꾸준히 나빠지고
조금씩 조금씩 꾸준히 좋아질 뿐
사람은 하루아침에 변하지 않는다
세상도 하루아침에 좋아지지 않는다
모든 것은 조금씩 조금씩 변함없이 변해간다
백창우, 소주 한 잔 했다고 하는 얘기가 아닐세
울지 말게
다들 그렇게 살아가고 있어
날마다 어둠 아래 누워 뒤척이다, 아침이 오면
개똥 같은 희망 하나 가슴에 품고
다시 문을 나서지
바람이 차다고, 고단한 잠에서 아직 깨지 않았다고
집으로 되돌아오는 사람이 있을까
산다는 건, 참 만만치 않은 거라네
아차 하는 사이에 몸도 마음도 망가지기 십상이지
화투판 끗발처럼, 어쩌다 좋은 날도 있긴 하겠지만
그거야 그때뿐이지
어느 날 큰 비가 올지, 그 비에
뭐가 무너지고 뭐가 떠내려갈지 누가 알겠나
그래도 세상은 꿈꾸는 이들의 것이지
개똥 같은 희망이라도 하나 품고 사는 건 행복한 거야
아무 것도 기다리지 않고 사는 삶은 얼마나 불쌍한가
자, 한 잔 들게나
되는 게 없다고, 이놈의 세상
되는 게 좆도 없다고
술에 코 박고 우는 친구야
김재진, 산꽃 이야기
식물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다면
가령 산딸기가 하는 말이나
노각나무가 꽃 피우며 속삭이는 하얀 말들을
알아들을 수 있다면
톱 한 자루 손에 들고 숲길 가는 동안
떨고 있는 나무들 마음 헤아릴 수 있다면
꿈틀거리며 흙 속을 사는 지렁이의 마음을 느낄 수 있다면
이제는 사라져 찾을 길 없는
늑대의 눈 속으로 벅차오른 산을 다시 볼 수 있다면
너로부터 닫혀 있는 나와
나로부터 닫혀 있는 너의
그 많은 창문들 하나하나 열어 볼 수 있다면
휘영청 달뜨는 밤
산꽃이 하는 이야기를 들을 수만 있다면
고은, 어떤 기쁨
지금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세계의 어디선가
누가 생각했던 것
울지 마라
지금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세계의 어디선가
누가 생각하고 있는 것
울지 마라
지금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세계의 어디선가
누가 막 생각하려는 것
울지 마라
얼마나 기쁜 일인가
이 세계에서
이 세계의 어디에서
나는 수많은 나로 이루어졌다
얼마나 기쁜 일인가
나는 수많은 남과 남으로 이루어졌다
울지 마라
존 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사람은 누구든 섬은 아니리
온전한 자체로서
각각은 대륙의 한 조각이며
대양의 한 부분
만일 흙덩이가 바닷물에 씻겨 내려지면
유럽은 그만큼 작아지리라
만일 모래톱도 그리되면 마찬가지
마찬가지리라 만일 그대의 땅이나
친구가 그리되어도
어느 사람의 죽음이 나를 작게 만드네
왜냐하면 나는 인류에 속해있기 때문이지
그러므로 알려고 보내지 마라
누구를 위하여 종이 울리는지를
종은 그대를 위해 울리는 것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