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용주, 붉고 푸른 못
나무는
땅에 박힌 가장 튼튼한 못
스스로 뿌리내려
죽을 때까지 떠나지 않는다
만신창이의 흙은
안으로 부드럽게 상처를 다스린다
별은
하늘에 박힌 가장 아름다운 못
뿌리도 없는 것이
몇 억 광년 동안 빛의 눈물을 뿌려댄다
빛의 가장 예민한 힘으로 하느님은
끊임없이 지구를 돌린다
나는
그대에게 박힌 가장 위험스러운 못
튼튼하게 뿌리내리지도
아름답게 반짝이지도 못해
붉고 푸르게 녹슬어 있다
소독할 생각도
파상풍 예방접종도 받지 않은 그대의
붉고 푸른 못
신달자, 등잔
인사동 상가에서 싼값에 들였던
백자 등잔 하나
근 십 년 넘게 내 집 귀퉁이에
허옇게 잊혀져있었다
어느 날 눈 마주쳐 고요히 들여다보니
아직은 살이 뽀얗게 도톰한 몸이
꺼멓게 죽은 심지를 물고 있는 것이
왠지 미안하고 안쓰러워
다시 보고 다시 보다가
기름 한 줌 흘리고 불을 켜보니
처음엔 당혹한 듯 눈을 가리다가
이내
발끝까지 저린 황홀한 불빛
아 불을 당기면
불이 켜지는
아직은 여자인 그 몸
박태일, 풀나라
그 먼 나라를 아시는지 여쭙습니다
젖쟁이 노랑쟁이 나생이 잔다꾸
사람 없고 사람 닮은 풀들만
파도밭을 담장으로 삼고 사는 나라
예순 아들이 여든 어머니 점심상을 차리고
예순 젊은이가 열 살 버릇대로
대소사 상다리 이고 지는 마을
사람만 봐도 개는 굼실 집 안으로 내빼
이름 잊혀진 채 그저 풀로만 불리는
강바랭이 씀바구 광대쟁이 독새기
이장 댁 한산 할배 마을 회관 마룻바닥에
소금 전 양 등줄 꺼지게 누운 마을
토광 옆 마늘 종다리는 무슨 힘으로
아침저녁 울컥벌컥 잘도 돋는데
한때 마흔 이제 스무 집 어른들
집집 다 버리고 마을 회관 두 방
문지방 내외하며 자고 먹는 풀나라
굴 양식 뜰것이 아침마다 허옇게
저승길 종이꽃처럼 피는 바다
그 먼 나라를 아시는지 여쭙습니다
도종환, 부석사에서
오백년 천년을 사는 것은
어떻게 사는 것일까
가슴께에 칠해진 어지러운 원색의 빛깔들
여름이면 바다처럼 펼쳐진 산줄기에 나누어주고
가을이면 새빨간 빛깔들 뒷산 숲에 던져주고
나머지 짙게 덧칠해진 단청빛마저 마음에 걸려
바람에 던져주고 하늘에 풀어주고
세월 속에 가장 때묻지 않은 얼굴빛으로 엷어져
본래 제가 지녔던 나무 빛깔로 돌아오며 겸허해지고
담백하게 욕심을 벗어 더욱 굳세어지고
그렇게 버리면서 육백년을 지나왔으려니
백년도 백년의 절반도 다 못 살면서
더 화려하고 더 강렬할 빛깔을 지니고자
더 큰 목소리와 더욱 단단한 기둥을 거느리고자
기를 쓰다가 허세부리다가
우리들은 사바세상 티끌과 먼지로 사라지느니
진정 오래오래 사는 길은 어떻게 사는 것인지
요란한 파격은 애당초 마음에 두지 않았던
맞배지붕은 보여주고 있나니
동안거 끝내고 마악 문 앞에 나와 선 듯한
무량수전 기둥은 말하고 있나니
돌축대 위에서 좌탈하고 앉아 있는
안양루로 가르쳐주고 있나니
서정홍, 기다리는 시간
나는
사람을 기다리는 시간이 좋다
사람을 기다리다 보면
설레는 마음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만나기로 한 사람이 오지 않으면
여러 가지 까닭이 있겠지 생각한다
내가 사람들에게
마음 놓고 베풀 수 있는 것은
사람을 기다려 주는 일
내가 사람들에게
마음 놓고 베풀 수 있는 것은
다음에 또 기다려 주는 일
나는 사람을 만나는 일보다
사람을 기다리는 시간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