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재휘, 지독한 어둠
아홉 살 딸아이는 어둠이 무섭다고
잠자리에 누워 말한다 나는 스탠드의 불빛을
가을 이불처럼 흐리게 덮어주고 나온다
그러면 딸아이는 오늘 밤
흉한 꿈을 꾸지 않으리라
하지만 나는 불 꺼진 거실에 서서
나의 어둠이 밝아지도록 한참을 기다린다
어둠 저편의 방으로 건너가기 위해 나의 눈은
그저 기다릴 수밖에 없다
스탠드도 없이
변명도 없이
몸 하나로 기다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캄캄함 속에 서보면 안다 그러나 기어이
어둠보다 먼저 밝아오는 슬픔
언젠가는 너도 이 지독한 어둠 속에
결국 혼자 서 있을 수밖에 없을 터인데
나는 온몸에 가난한 어둠을 묻히고
다시 딸아이의 방으로 들어간다
이내 이불을 차버리고 잠든 모습이
그런데 오늘은 왜 이렇게 서글픈 것이냐
조병화, 해마다 봄이 되면
해마다 봄이 되면
어린 시절 그분의 말씀
항상 봄처럼 부지런해라
땅속에서, 땅 위에서
공중에서
생명을 만드는 쉬임 없는 작업
지금 내가 어린 벗에게 다시 하는 말이
항상 봄처럼 부지런해라
해마다 봄이 되면
어린 시절 그분의 말씀
항상 봄처럼 꿈을 지녀라
보이는 곳에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생명을 생명답게 키우는 꿈
봄은 피어나는 가슴
지금 내가 어린 벗에게 다시 하는 말이
항상 봄처럼 꿈을 지녀라
오, 해마다 봄이 되면
어린 시절 그분의 말씀
항상 봄처럼 새로워라
나뭇가지에서, 물 위에서, 뚝에서
솟은 대지의 눈
지금 내가 어린 벗에게 다시 하는 말이
항상 봄처럼 새로워라
박재삼, 무언으로 오는 봄
뭐라고 말을 한다는 것은
천지신명께 쑥스럽지 않느냐
참된 것은 그저 묵묵히 있을 뿐
호들갑이라고는 전연 없네
말을 잘함으로써 우선은 그럴싸해 보이지만
그 무지무지한
추위를 넘기고
사방에 봄빛이 깔리고 있는데
할 말이 가장 많은 듯한
그것을 그냥
눈부시게 아름답게만 치르는
이 엄청난 비밀을
곰곰이 느껴보게나
복효근, 상처에 대하여
오래 전 입은 누이의
화상은 아무래도 꽃을 닮아간다
젊은 날 내내 속썩어쌓더니
누이의 눈매에선
꽃향기가 난다
요즈음 보니
모든 상처는 꽃을
꽃의 빛깔을 닮았다
하다못해 상처라면
아이들의 여드름마저도
초여름 고마리꽃을 닮았다
오래 피가 멎지 않던
상처일수록 꽃향기가 괸다
오래된 누이의 화상을 보니 알겠다
향기가 배어나는 사람의 가슴속엔
커다란 상처 하나 있다는 것
잘 익은 상처에선
꽃향기가 난다
공광규, 한심하게 살아야겠다
얼굴 표정과 걸친 옷이 제각각인
논산 영주사 수백 나한
언제 무너져 덮칠지 모르는 바위벼랑에 앉아
편안하게 햇볕 쬐고 있다
새 소리 벌레 소리 잡아먹는
스피커 염불 소리에 아랑곳 않고
지저분한 정화수 탓하지 않고
들쥐가 과일 파먹어도 눈살 하나 찌푸리지 않는다
다람쥐가 몸뚱이 타고 다녀도 아랑곳 않고
산새가 머리 위에 똥을 깔겨도 그냥 웃는다
초파일 연등에 매달린 이름들
세파처럼 펄럭여도 가여워 않고
시주돈 많든 적든 상관 않는다
잿밥에 관심이 더한 스님도 꾸짖지 않는다
불륜 남녀가 놀러 와 합장해도 혼내지 않고
아이들 돌팔매에 고꾸라져도
누가 와서 제자리에 앉혀줄 때까지
그 자세 그 모습이다
바람이 휙 지나다
하얀 산꽃잎 머리 위로 흩뿌리면
그것이 한줌 바람인 줄만 알고
들짐승과 날새
흘러가는 구름과 바람결 속에
화도 안 내고 칭찬도 안하는
참 한심한 수백 나한들
나도 이 바람 속에서
한심하게 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