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진,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믿었던 사람의 등을 보거나
사랑하는 이의 무관심에 다친 마음 펴지지 않을 때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두 번이나 세 번, 아니 그 이상으로 몇 번쯤
더 그렇게 마음속으로 중얼거려 보라
실제로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지금 사랑에 빠져 있거나 설령 심지 굳은 누군가 함께 있다 해도
다 허상일 뿐 완전한 반려(伴侶)란 없다
겨울을 뚫고 핀 개나리의 샛노랑이 우리 눈을 끌 듯
한때의 초록이 들판을 물들이듯 그렇듯 순간일 뿐
청춘이 영원하지 않은 것처럼
그 무엇도 완전히 함께 있을 수 있는 것이란 없다
함께 한다는 건 이해한다는 말
그러나 누가 나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가
얼마쯤 쓸쓸하거나 아니면 서러운 마음이 짠 소금물처럼
내밀한 가슴 속살을 저며 놓은다 해도 수긍해야 할 일
어차피 수긍할 수밖에 없는 일
상투적으로 말해 삶이란 그런 것 인생이란 다 그런 것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그러나 혼자가 주는 텅 빔
텅 빈 것의 그 가득한 여운 그것을 사랑하라
숭숭 구멍 뚫린 천장을 통해 바라보는
밤하늘 같은 투명한 슬픔 같은 혼자만의 시간에 길들라
별들은 멀고 먼 거리, 시간이라 할 수 없는
수많은 세월 너머 저 홀로 반짝이고 있지 않은가
반짝이는 것은 그렇듯 다 혼자다
가을날 길을 묻는 나그네처럼
텅 빈 수숫대처럼 온몸에 바람소릴 챙겨 넣고 떠나라
함민복, 섬
물 울타리를 둘렀다
울타리가 가장 낮다
울타리가 모두 길이다
이용악, 그리움
눈이 오는가 북쪽엔
함박눈 쏟아져 내리는가
험한 벼랑을 굽이굽이 돌아간
백무선(白茂線) 철길 위에
느릿느릿 밤새워 달리는
화물차의 검은 지붕에
연달린 산과 산 사이
너를 남기고 온
작은 마을에도 복된 눈 내리는가
잉크병 얼어드는 이러한 밤에
어쩌자고 잠을 깨어
그리운 곳 차마 그리운 곳
눈이 오는가 북쪽엔
함박눈 쏟아져 내리는가
문차숙, 나는 굽 없는 신발이다
그때는 뾰족 구두로 똑, 똑 소리 나게 걸었는데
나이가 들수록 신발 굽이 낮아진다
그저 높낮이 없이 바닥이 평평하고
언제 끌고 나가도 군말 없이 따라 오는
편안한 신발이 좋다
내가 콕, 콕 땅을 후비며 걸었을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헤지게 했는지
또닥거리며 걸었을 때
또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가슴 저리게 울렸을지
굽을 낮추면서 알겠다
신발이 닳아 저절로 익숙해진 낮은 굽은
굽 높은 신발이 얼마나 끄덕거리면서
흔들흔들 살아가는지 말해준다
이제 나는
온들 간들 소리 없고 발자국도 남기지 않는
하얀 고무신이고 싶다
어쩌다 작은 발이 잠깐 다녀올 때 쏘옥 신을 수 있고
큰 발이 꺾어 신어도 이내 제자리로 돌아오는
나는 굽이 없는 신발이다
최영미, 사는 이유
투명한 것은 날 취하게 한다
시가 그렇고
술이 그렇고
아가의 뒤뚱한 걸음마가
어제 만난 그의 지친 얼굴이
안부 없는 사랑이 그렇고
지하철을 접수한 여중생들의 깔깔웃음이
생각나면 구길 수 있는 흰 종이가
창 밖에 비가 그렇고
빗소리를 죽이는 강아지의 컹컹거림이
매일 되풀이되는 어머니의 넋두리가 그렇다
누군가와 싸울 때마다 난 투명해진다
치열하게
비어가며
투명해진다
아직 건재하다는 증명
아직 진통할 수 있다는 증명
아직 살아있다는 무엇
투명한 것끼리 투명하게 싸운 날은
아무리 마셔도 술이
오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