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현정, 염소와 풀밭
염소가 말뚝에 매여 원을 그리는
안쪽은 그의 것
발을 넣고 깨끗한 입을 넣고 몸을 넣고
줄에 매여 멀리 원을 그리는 안쪽은
그의 것
염소가 발을 넣고 뿔을 넣고 그리는 원을 따라
원을 그리는 하늘도 안쪽은 그의 것
그 안쪽을 지나가는 가슴 큰 구름이며, 새들이며
뜯어먹어도 또 자라는 풀은 그의 것, 그러하냐
박인환, 세월이 가면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김승희, 솟구쳐 오르기
상처의 용수철
그것이 우리를 날게 하지 않으면
상처의 용수철
그것이 우리를 솟구쳐 오르게 하지 않으면
파란 싹이 검은 땅에서 솟아오르는 것이나
무섭도록 붉은 황토밭 속에서 파아란 보리가
씩씩하게 솟아올라 봄바람에 출렁출렁 흔들리는 것이나
힘없는 개구리가 바위 밑에서
자그만 폭약처럼 튀어나가는 것이나
빨간 넝쿨장미가 아파아파 가시를 딛고
불타는 듯한 담벼락을 기어 올라가는 것이나
민들레가 엉엉 울며 시멘트 조각을 밀어내는
것이나
검은 나뭇가지 어느새 봄이 와
그렁그렁 눈물 같은 녹색의 바다를 일으키는 것이나
상처의 용수철이 없다면
삶은 무게에 짓뭉그러진 나비알
상처의 용수철이 없다면
존재는
무서운 사과 한 알의 원죄의 감금일 뿐
죄와 벌의 화농일 뿐
김광규, 다시 떠나는 그대
그래도 그대는 떠난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을 것처럼 집안 단속을 하고
문을 잠갔나 확인하고
손때 묻은 세간살이 가득 찬 정든
집을 등 뒤로남겨놓은 채
손가방만 하나 들고 결연히 떠나서
새 집을 찾는다 언젠가
그 집을 가득 채우고 다시
비어놓은 채 뒤돌아보며 집을
떠날 그대여
몇 번이고 망설이며 떠났다가
소리없이 돌아와 혼자서
다시 떠나는 그대여
이현주, 한 송이 이름 없는 들꽃으로
한 송이 이름 없는 들꽃으로
피었다가 지리라
바람으로 피었다가 바람으로 지리라
누가 일부러 다가와
허리 굽혀 향기를 맡아준다면 고맙고
황혼의 어두운 산그늘만이
찾아오는 유일한 손님이어도 또한 고맙다
홀로 있으면 향기는 더욱 맵고
외로움으로 꽃잎은 더욱 곱다
하늘 아래 있어 새벽이슬 받고
땅의 심장에 뿌리박아 숨을 쉬니
다시 더 무엇을 기다리랴
있는 것 가지고 남김없이 꽃 피우고
불어가는 바람 편에 말을 전하리라
빈들에 꽃이 피는 것은
보아 주는 이 없어도 넉넉하게 피는 것은
한 평생 홀로 견딘 그 아픔의 비밀로
미련 없는 까만 씨앗 하나 남기려 함이라고
한 송이 이름 없는 들꽃으로
피었다가 지리라
끝내 이름 없는 들꽃으로 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