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오현, 아지랑이
나아갈 길이 없다 물러설 길도 없다
둘러봐야 사방은 허공 끝없는 낭떠러지
우습다
내 평생 헤매어 찾아 온 곳이 절벽이라니
끝내 삶도 죽음도 내던져야 할 이 절벽에
마냥 어지러이 떠다니는 이 아지랑이들
우습다
내 평생 붙잡고 살아온 것이 아지랑이더란 말이냐
유치환, 생명의 서
나의 지식이 독한 회의(懷疑)를 구(救)하지 못하고
내 또한 삶의 애증(愛憎)을 다 짐지지 못하여
병든 나무처럼 생명이 부대낄 때
저 머나먼 아라비아의 사막(沙漠)으로 나는 가자
거기는 한 번 뜬 백일(白日)이 불사신같이 작열하고
일체가 모래 속에 사멸한 영겁(永劫)의 허적(虛寂)에
오직 알라의 신(神)만이
밤마다 고민하고 방황하는 열사(熱砂)의 끝
그 열렬한 고독(孤獨) 가운데
옷자락을 나부끼고 호올로 서면
운명처럼 반드시 '나'와 대면(對面)케 될지니
하여 '나'란 나의 생명이란
그 원시의 본연한 자태를 다시 배우지 못하거든
차라리 나는 어느 사구(沙丘)에 회한 없는 백골을 쪼이리라
정일근, 사랑에 답하여
수선화 해를 따라 도는 꽃인 걸
마당에 노란 수선화 피어서 알았다
가녀린 꽃대에 크고 무거운 꽃을 달고서
동쪽에서 서쪽으로 해를 따라 간다
달마는 마음 따라 동쪽에서 왔다지만
땅 속에 마음 묻은 수선화의 해바라기는
갈 수 없는 사랑의 지독한 형벌이다, 고
나는 오래전부터 수선화 꽃 뒤에 놓여있는
낡은 의자에 앉아 생각했다, 나도
그런 아픈 사랑한 적이 있었다, 고
해를 기다리는 말없는 꽃이나
사람을 기다리는 사람이나
같은 앉음새 같은 가부좌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노란 수선화 지면서 알았다
꽃은 마르면서도 해를 따라 가고
말라 바스라지면서도 저 수선화
뜨거운 해바라기는 멈추지 않았다
수선화 꽃 뒤에 놓아둔 의자도, 사실
누군가를 기다리겠다고 놓아두었지만
의자에 앉아 사람을 기다렸던 시간보다
비어두었던 시간 더 많았으니
나는 꽃처럼 사랑하지 못했다
나는 꽃처럼 사랑에 답하지 못했다
조운, 여서를 받고
너도 밤마다
꿈에
나를 본다 하니
오고
가는 길에
만날 법도 하건마는
둘이 다 바쁜 마음에
서로 몰라보는가
바람아 부지 마라
눈보라치지 마라
어여쁜 우리 딸의
어리고 고운 꿈이
날 찾아
이 밤을 타고 이백 리를 온단다
천상병, 나의 가난함
나는 볼품없이 가난하지만
인간의 삶에는 부족하지 않다
내 형제들 셋은 부산에서 잘 살지만
형제들 신세는 딱 질색이다
각 문학사에서 날 돌봐주고
몇몇 문인들이 날 도와주고
그러니 나는 불편함을 모른다
다만 하늘에 감사할 뿐이다
이렇게 가난해도
나는 가장 행복을 맛본다
돈과 행복은 상관없다
부자는 바늘귀를 통과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