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희숙, 내 가슴이 폭삭 내려앉거나 말거나
세월이
흐르는 물과 같다는 그것이
인정사정 없이 꼬박꼬박
일수돈 챙기듯 내 나이를 챙기더니
이제 헤아려보기도 찡한 연수(年數)가 되고 말았다
귀밑에 흰 머리카락이야 돋았거나 말았거나
사랑하던 이가 뒤 안 보고 떠났거나 말았거나
그래서 마음이야 오래도록 아프거나 말거나
개나리는 피고 지고
산천에 흰눈도 쌓였다가 녹고
강물은 일도 없이 잘도 흘렀다
들판의 아찔한 풀향기에 내 가슴이
폭삭 내려앉거나 말거나
아이들은 기쁘게 노래하고 꽃망울 터지듯 쑥쑥 자랐다
그대는 슬프지 아니한가
그러거나 말거나, 자라나는 모든 것들이
조은, 통증
광화문 육교 옆 어두운 곳에서
걸음을 멈췄다
등에 큰 혹을 진 팔순의 할머니
입김을 내뿜으며 나를 활짝 반겼다
광주리를 덮은 겹겹의 누더기를 벗겨냈다
숯막 같은 할머니가 파는 것은
천 원에 세 개짜리 귤, 영롱했다
할머니를 놀릴 마음으로 다가간 것은 아닌데
내겐 돈이 없었다 그것을
수시로 잊을 수 있는 것은
초라한 내 삶의 동력이지만
바짝 얼어 몸이 굼뜨고 손이 굽은 할머니
온기 없는 생의 외투는 턱없이 얇았다
그래도 그 할머니
어쩔 줄 몰라하는 내게 웃어주었다
이현주, 대답해 보아라
사람이 없어도 나무는
열매를 맺는다
나무가 없으면 사람은
숨도 못 쉰다
그래도 사람이 나무보다 크냐
사람이 없어도 강은
유유히 흐른다
강물이 없으면 사람은
목말라 죽는다
그래도 사람이 강보다 크냐
문태준, 찰나 속으로 들어가다
벌 하나가 웽 날아가자 앙다물었던 밤송이의 몸이 툭 터지고
물살 하나가 스치자 물속 물고기의 몸이 확 휘고
바늘만 한 햇살이 말을 걸자 꽃망울이 파안대소하고
산까치의 뾰족한 입이 닿자 붉은 감이 툭 떨어진다
나는 이 모든 찰나에게 비석을 세워준다
이정록, 흰 별
볍씨 한 톨 매만지다가
앞니 내밀어 껍질을 벗긴다
쌀 한 톨에도, 오돌토돌
솟구쳐 오른 산줄기가 있고
까끄라기 쪽으로 흘러간 강물이 있다
쌀이라는 흰 별이
산맥과 계곡을 갖기 전
뜨물, 그 혼돈의 나날
무성했던 천둥 번개며 개구리 소리들
문득 내 머리 속에
논배미라는 은하수와
이삭별자리가 출렁인다
알 톡 찬 볍씨 하나가
밥이 되어 숟가락에 담길 때
별을 삼키는 것이다
밤하늘 별자리를
통째로 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