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희상, 돌을 줍는 마음
돌밭에서 돌을 줍는다
여주 신륵사 건너편
남한강 강변에서
돌을 줍는다
마음에 들면, 줍고
마음에 들지 앟으면, 줍지 앟는다
마음에 드는 돌이 많아
두 손 가득
돌을 움켜쥐고 서 있으면
아직 줍지 않은 돌이 마음에 들고
마음에 드는 돌을 줍기 위해
이미 마음에 든 돌을 다시 내려놓는다
줍고, 버리고
줍고, 버리고
또다시 줍고, 버린다
어느덧, 두 손에 마지막으로 남는 것은
빈 손이다
빈 손에도 잡히지 않을
어지러움이다
해는 지는데
돌을 줍는 마음은 사라지고
나도 없고, 돌도 없다
천양희, 너무 많은 입
재잘나무 잎들이 촘촘하다 나무 사이로 새들이
재잘된다 잎들이 많고 입들이 너무 많다
이(李) 시인은
마흔살이 되자
나의 입은 문득 사라졌다
어쩌면 좋담,이라 쓰고 있다
그런데 어쩌면 좋담
쉰살이 되어도 나의 입은
문득 사라지지 않고
목쉰 나팔이 되어버렸다
어쩌면 좋담?
다릅나무 잎들이 촘촘하다 나무 사이로 새들이
다른 소리를 낸다 잎들이 다르고 입들이 너무 다르다
문인수, 머위
어머니 아흔셋에도 홀로 사신다
오래 전에 망한 장남 명의의 아버지 집에
홀로 사신다
다른 자식들 또한 사정 있어서 홀로 사신다
귀가 멀어
깜깜
소태 같은 날들을 사신다
고향집 뒤꼍엔 머위가 많다
머위 잎에 쌓이는 빗소리도
열두 권
책으로 엮고도 남을 만큼 많다
그걸 쪄 쌈 싸먹으면 쓰디쓴 맛이다
아 낳아 기른 죄
다 뜯어 삼키며 어머니 홀로 사신다
손택수, 거미줄
어미 거미와 새끼 거미를 몇 킬로미터쯤 떨어뜨려 놓고
새끼를 건드리면 움찔
어미의 몸이 경련을 일으킨다는 이야기,
보이지 않는 거미줄이 내게도 있어
수천 킬로 밖까지 무선으로 이어져 있어
한밤에 전화가 왔다
어디 아픈데는 없냐고,
꿈자리가 뒤숭숭하니 매사에 조신하며 살라고
지구를 반 바퀴 돌고 와서도 끊어지지 않고 끈끈한 줄 하나
고은, 그대 순례
좀 느린 걸음걸이면 된다
갑자기 비가 오면
그게 그대 옛 친구야
푹 젖어보아라
가는 것만이 아름답다
한 군데서
몇 군데서 살기에는
너무 큰 세상
해질녘까지
가고 가거라
그대 단짝
느린 그림자와 함께
흐린 날이면
그것 없이도
그냥 가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