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현순, 산다는 것
산다는 것이 무언지 아세요
새처럼 가벼워지는 일
나무처럼 뿌리를 깊이 내리는 일
바다처럼 깊고 푸르르는 일
바람처럼 춤추는 일
꽃잎처럼 감싸안는 일
들풀처럼 다시 일어나는 일
햇살처럼 반짝이는 일이지요
때론
비처럼 울어도 볼 일
가랑비에 젖어도 볼 일
안개에 묻혀 숨어도 볼 일
이슬처럼 또르르 굴러도 볼 일이지요
벼랑끝에 핀
선홍빛 진달래
아스라이 피었다 지는 일
열두 폭 치맛자락에 엎어져
울다 울다 지쳐 꿈꾸어 보는 일이지요
정일근, 부석사 무량수
어디 한량없는 목숨 있나요
저는 그런 것 바라지 않아요
이승에서의 잠시 잠깐도 좋은 거예요
사라지니 아름다운 거예요
꽃도 피었다 지니 아름다운 것이지요
사시사철 피어 있는 꽃이라면
누가 눈길 한 번 주겠어요
사람도 사라지니 아름다운 게지요
무량수를 산다면
이 사랑도 지겨운 일이어요
무량수전의 눈으로 본다면
사람의 평생이란 눈 깜짝할 사이에 피었다 지는
꽃이어요, 우리도 무량수전 앞에 피었다 지는
꽃이어요, 반짝하다 지는 초저녁별이어요
그래서 사람이 아름다운 게지요
사라지는 것들의 사랑이니
사람의 사랑 더욱 아름다운 게지요
이시영, 나의 나
여기 앉아있는 나를 나의 전부로 보지마
나는 저녁이면 돌아가 단란한 밥상머리에
앉을 수 있는 나일수도 있고
여름이면 타클라마칸 사막으로 날아가
몇날 며칠을 광포한 모래바람과 싸울 수
있는 나일 수도 있고
비 내리면 가야산 해인사 뒤쪽 납작
바위에 붙어 앉아
밤새도록 사랑을 나누다가 새벽녘
솔바람 소리속으로
나 아닌 내가되어 허청허청 돌아올 수도 있어
여기에 이렇듯
얌전히 앉아 있는 나를
나의 전부로 보지마
제임스 카바노, 언젠가는
언젠가는 떠나련다
자유로워지련다
무미건조한 것들을 지나
안전한 밋밋함을 떠나
연락처도 남기지 않으련다
황량한 광야를 가로질러
그곳에 세상을 떨구기 위해
아무런 근심 없이 떠돌련다
한가한 지도책처럼
임길택, 재중이네를 보니
돈이 없으면
안 쓰고
옷이 없으면
기워 입고
쌀이 없으면
굶기도 하면서
할머니와 둘이서
살아가요
가난해도
어떻게든 살아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