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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로써 내가 이 세상에 쓰여진다는 것은 그러고보면 참 슬픈 일이다. 성적, 석차, 등급, 연봉, 재산. 헤아리고자 인간은 수를 만들어냈다지만, 사람을 숫자로썬 다 헤아릴 수 없는 것을. '그는 x년간 사범대에서 수학했고, y년간 임용시험을 준비했으며, 현재는 z호봉의 교원이다.' 라는 문장이, 그는 3학년 1반 학생들의 성장을 보람으로 삼고, 그들의 꿈을 함께 바라는 사람이라는 걸 말해주지 않는 것을.
어제, 나는 버스를 잘못 탔다. 148번 버스를 탄다는 걸, 144번 버스를 타고 말았다. 148번 버스는 성수대교를, 144번 버스는 한남대교를 건넌다. 무려, 다릴 건너고 나서야 버스를 잘못 탔다는 걸 깨달았는데, 그래, 차라리 깨닫지 못했더라면. 성수대교에서 보는, 한남대교에서 보는, 두 한강 모두 이렇게나 아름다운데. 갑자기 이 세상에 틀린 길 따위는 없고, 그저 다른 길만이 무수히 트여있는 기분이 들었다. 어제, 나는 가끔은 버스를 잘못 타기로 했다.
엔딩 크레딧이 끝까지 올라갈 때까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던 것. 긴 여행 끝에 닿은 공항 앞에서, 도착한 버스를 멍하니 떠나보냈던 것. 지루한 졸업 연사를 끝으로 학창시절은 막을 내렸지만, 졸업장을 꼭 손에 쥔 채, 혹여나 앙코르가 있진 않을까, 하고 강당의 자리를 지켰던 것. 1월의 중순을 지나면서도, 탁상 위의 달력 속, 지나가버린 12월을 애써 넘기지 않았던 것. 네게 받은 보라색 안개꽃 한 다발이, 비쩍 마른 줄기만 남긴 채 책장 한 켠에 피어 있는 것. 그렇게 아쉬움을 남기지 않으려, 미련히 끝까지 아쉬워하는 것.
여행 가는 날처럼 살았으면 좋겠다. 터무니 없을만큼 이어진 체크인 줄 앞 기다림에도, 설레는 마음 하나 붙잡은 채 친구와 지루함 대신에 기꺼이 기대를 나누고. 샅샅이 살펴지고 또 시험에 들어야할 보안검색대와 출국심사대 앞에서도 의연한 마음으로 당당한 나를 보여줄 수 있으며. 미처 보지 못했던 시계가 야속해, 딱 5분간만 더 열려 있어줄 탑승 게이트까지 미칠 듯이 내달려야 할지라도, 다급함보다 더 치밀어 오르는 설레는 기분을 감추지 못하고 결국 호탕하게 웃으며 내달릴 수 있는. 여행 가는 날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