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출처 : http://yes-hipster.tumblr.com/
BGM 출처 : https://youtu.be/hNAnCmxGRNg
이문재. 햇볕에 드러나면 슬픈 것들
햇볕에 드러나면 짜안해지는 것들이 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흰 쌀밥에 햇살이 닿으면 왠지 슬퍼진다
실내에 있어야 할 것들이 나와서 그렇다
트럭 실려 가는 이삿짐을 보면 그 가족사가 다 보여 민망하다
그 이삿짐에 경대라고 실려 있고, 거기에 맑은 하늘이라도 비칠라치면
세상이 죄다 언짢아 보인다 다 상스러워 보인다
20대 초반 어느 해 2월의 일기를 햇빛 속에서 읽어보라
나는 누구에게 속은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진다
나는 평생을 2월 아니면 11월에만 살았던 것 같아지는 것이다
천양희, 뒤편
성당의 종소리 끝없이 울려퍼진다
저 소리 뒤편에는
무수한 기도문이 박혀 있을 것이다
백화점 마네킹 앞모습이 화려하다
저 모습 뒤편에는
무수한 시침이 꽂혀 있을 것이다
뒤편이 없다면 생의 곡선도 없을 것이다
이선영, 인생
내 인생이 남들과 같지 않다고 생각됐던 때의, 외딴길로 밀려나 있다는 낭패감
그러나 내 인생도 남들과 다르지 않다는 안도감을 느끼게 되었을 때
이윽고 그 남다르지 않은 인생들이 남다르지 않게 어우러져 가는 큰길에 줄지어 서서
이 늘비함을 따라 가야 할 뿐 슬며시 도망 나갈 외딴길이 없다는 낭패감
무산, 앵화
어린 날 내 이름은
개똥밭의 개살구나무
벌 나비 질탕한 봄도
꽃인 줄 모르다가
담 넘어 순이 가던 날
피 붉은 줄 알았네
연인선, 듣기
마른 강아지풀도 말을 한다
노란 아카시아도 말을 한다
도시를 메운 문명의 소리에
길든 사람들 고요를 못 견뎌
통하지도 않는 말에 매달려
하루, 한달, 일년, 생을 난다
그 사이
사방 귀머거리 된 살기 바쁜
사람들 옆에서
씨앗 피며
봉오리 터지며
나무 크며
단풍 타며
낙엽 털며
자연이
소리없이
말을 한다
누가 듣지 않아도 좋은
자기만의 말을
생명의 말을
한다
그 말
듣기
얼마나
복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