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록, 줄탁
어미의 부리가
닿는 곳마다
별이 뜬다
한 번에 깨지는
알 껍질이 있겠는가
밤하늘엔
나를 꺼내려는 어미의
빗나간 부리질이 있다
반짝, 먼 나라의 별빛이
젖은 내 눈을 친다
박노해, 꽃샘바람 속에서
꽃샘바람 속에서
우리 꽃처럼 웃자
땅속의 새싹도 웃고
갓나온 개구리도 웃고
빈 가지의 꽃눈도 웃는다
꽃샘바람에 떨면서도
매운 눈물 흘리면서도
우리 꽃처럼 웃자
봄이 와서 웃는 것이 아니라
웃기 때문에 봄이 오는 것이니
이원규, 독거
남들 출근할 때
섬진강 청둥오리 떼와 더불어
물수제비를 날린다
남들 머리 싸매고 일할 때
낮잠을 자다 지겨우면
선유동 계곡에 들어가 탁족을 한다
미안하지만 남들 바삐 출장 갈 때
오토바이를 타고 전국 일주를 하고
정말이지 미안하지만
남들 야근 할 때
대나무 평상 모기장 속에서
촛불을 켜놓고 작설차를 마시고
남들 일중독에 빠져 있을 때
나는 일 없이 심심한 시를 쓴다
그래도 굳이 할 일이 있다면
가끔 굶거나 조금 외로워하는 것일 뿐
사실은 하나도 미안하지 않지만
내게 일이 있다면 그것은 노는 것이다
일하는 것이 곧 죄일 때
그저 노는 것은 얼마나 정당한가
스스로 위로하고 치하하며
섬진강 산 그림자 위로
다시 물수제비를 날린다
이미 젖은 돌은 더 이상 젖지 않는다
백무산, 듯
잊은 듯
깜박 잊은
듯
이슬방울이
서로 만난
듯
불을 이고
폭풍우 바다를 이고
사뿐한
듯
눈 한번 감은 듯이
천년 흐른
듯
나인 듯
너인
듯
정미숙, 살다 보면 그런 날 있지 않은가
문득 떠나고 싶고
문득 만나고 싶은
가슴에 피어오르는 사연 하나
숨 죽여 누르며
태연한 척 그렇게 침묵하던 날
그런 날이 있지 않은가
고독이 밀려와
사람의 향기가 몹시
그리운 그런 날이 있지 않은가
차 한잔 나누며
외로운 가슴을 채워 줄
향기 가득한 사람들을 만나고 싶은
그런 날이 있지 않은가
바람이 대지를 흔들어 깨우고
나뭇가지에 살포시
입맞춤하는 그 계절에
몹시도 그리운 그 사람을 만나고 싶은
그런 날이 있지 않은가
살다 보면 가끔은
그런 날이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