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재훈, 고마워, 내 사랑
창문을 열자, 새소리가 들려온다
고마워, 내 사랑, 내 마음이 저 새소리를 들을 수 있다니
보이지 않는 것들을
들리게 해 주는 것은
오로지 너의 사랑뿐
소나무 가지 사이에 새 한 마리 휙 날아간다
고마워, 내 사랑, 저 날아가는 새들을 보여 주다니
들리지 않는 것들을
보이게 하는 것은
오로지 너의 사랑뿐
들리고 보이는 모든 것들은 먼 곳에서 오지 않았다
창문을 열면 바로 거기에 있었다
내 심장보다도 더 가까운 곳
내 눈물, 웃음보다 더욱 더 가까운 곳
그곳에 님이 있었다
고마워, 내 사랑
정말 고마워
서정주, 국화 옆에서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간밤에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내게는 잠도 오지 않았나 보다
문정희, 러브호텔
내 몸 안에 러브호텔이 있다
나는 그 호텔에 자주 드나든다
상대를 묻지 말기를 바란다
수시로 바뀔 수도 있으니까
내 몸 안에 교회가 있다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교회에 들어가 기도한다
가끔 울 때도 있다
내 몸 안에 시인이 있다
늘 시를 쓴다 그래도 마음에 드는 건
아주 드물다
오늘, 강연에서 한 유명 교수가 말했다
최근 이 나라에 가장 많은 것 세 가지가
러브호텔과 교회와 시인이라고
나는 온몸이 후들거렸다
러브호텔과 교회와 시인이 가장 많은 곳은
바로 내 몸 안이었으니까
러브호텔에는 진정한 사랑이 있을까
교회와 시인들 속에 진정한 꿈과 노래가 있을까
그러고 보니 내 몸 안에 러브호텔이 있는 것은
교회가 많고, 시인이 많은 것은
참 쓸쓸한 일이다
오지 않는 사랑을 갈구하며
나는 오늘도 러브호텔로 들어간다
정현종, 개들은 말한다
개들은 말한다
나쁜 개를 보면 말한다
저런 사람 같은 놈
이리들은 여우들은 뱀들은
말한다 지네 종족이 나쁘면
저런 사람 같으니라구
한국산 호랑이가
멸종된 건
개와 이리와 여우들 탓이 아니지 않은가
한국산 호랑이의 멸종은
전설의 멸종
깨끗한 힘의 멸종
용기의 멸종과 더불어 진행된 게 아닌가
날(生) 기운의 감소
착한 의지의 감소
제 정신의 감소와 더불어 진행된 게 아닌가
한국산 호랑이의 멸종은 하여간
개와 이리와 여우들 탓은 아니지 않은가
김종해, 저녁은 짧아서 아름답다
사라져 가는 것보다 아름다운 것은 없다
안녕히라고 인사하고 떠나는
저녁은 짧아서 아름답다
그가 돌아가는 하늘이
회중전등처럼 내 발밑을 비춘다
내가 밟고 있는 세상은
작아서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