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안진, 홀림
문득 너무 오래 사람이었구나
아장걸음 걸어오는 새벽 봄비에
미리 젖어 촉촉하게
사람 아닌 무엇이고 싶구나 오오랜만에
산짐승의 어린 새끼
외따로 눈을 뜨는 초목의 첫싹같은
풋것이 약한 것이 고운 것이 되어서
난생 처음 보는 사람 구경에
놀라 넋이 빠진 오줌싸개라도
여름 폭풍우 아니면 겨울 눈보라였던 과거에서
그 무슨 알에서 갓 깨어난
애버러지라도
그 눈망울 속 무한 숙맥이고 싶구나
파블로 네루다, 우리는 질문하다가 사라진다
어디에서 도마뱀은
꼬리에 덧칠할 물감을 사는 것일까
어디에서 소금은
그 투명한 모습을 얻는 것일까
어디에서 석탄은 잠들었다가
검은 얼굴로 깨어나는가
젖먹이 꿀벌은 언제
꿀의 향기를 맨 처음 맡을까
소나무는 언제
자신의 향을 퍼뜨리기로 결심했을까
오렌지는 언제
태양과 같은 믿음을 배웠을까
연기들은 언제
공중을 나는 법을 배웠을까
뿌리들은 언제 서로 이야기를 나눌까
별들은 어떻게 물을 구할까
전갈은 어떻게 독을 품게 되었고
거북이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
그늘이 사라지는 곳은 어디일까
빗방울이 부르는 노래는 무슨 곡일까
새들은 어디에서 마지막 눈을 감을까
왜 나뭇잎은 푸른색일까
우리가 아는 것은 한 줌 먼지만도 못하고
짐작하는 것만이 산더미 같다
그토록 열심히 배우건만
우리는 단지 질문하다 사라질 뿐
이해인, 외딴 마을의 빈집이 되고 싶다
나는 문득
외딴 마을의
빈집이 되고 싶다
누군가 이사오길 기다리며
오랫동안 향기를 묵혀둔
쓸쓸하지만 즐거운 빈집
깔끔하고 단정해도
까다롭지 않아 넉넉하고
하늘과 별이 잘 보이는
한 채의 빈집
어느 날
문을 열고 들어올 주인이
‘음, 마음에 드는데’
하고 나직이 속삭이며 미소지어 줄
깨끗하고 아름다운 빈집이 되고 싶다
나희덕, 귀뚜라미
높은 가지를 흔드는 매미 소리에 묻혀
내 울음소리 아직은 노래 아니다
차가운 바닥 위에 토하는 울음
풀잎 없고 이슬 한 방울 내리지 않는
지하도 콘크리트벽 좁은 틈에서
숨막힐 듯, 그러나 나 여기 살아있다
귀뚜르르 뚜르르 보내는 타전소리가
누구의 마음 하나 울릴 수 있을까
지금은 매미떼가 하늘을 찌르는 시절
그 소리 걷히고 맑은 가을이
어린 풀숲 위에 내려와 뒤척이기도 하고
계단을 타고 이 땅밑까지 내려오는 날
발길에 눌려 우는 내 울음도
누군가의 가슴에 실려가는 노래일 수 있을까
정현종, 경청
불행의 대부분은
경청할 줄 몰라서 그렇게 되는 듯
비극의 대부분은
경청하지 않아서 그렇게 되는 듯
아, 오늘처럼
경청이 필요한 때는 없는 듯
대통령이든 신(神)이든
어른이든 애이든
아저씨든 아줌마든
무슨 소리이든지 간에
내 안팎의 소리를 경청할 줄 알면
세상이 조금은 좋아질 듯
모든 귀가 막혀 있어
우리의 행성은 캄캄하고
기가 막혀
죽어가고 있는 듯
그게 무슨 소리이든지 간에
제 이를 닦는 소리라고 하더라도
그걸 경청할 때
지평선과 우주를 관통하는
한 고요 속에
세계는 행여나
한 송이 꽃 필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