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인, 의자
창고에서 의자를 꺼내
처마 밑 계단에 얹어놓고 진종일
서성거려온 내 몸에게도 앉기를 권했다
와서 앉으렴, 내 몸은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왔다
때로는 창고 구석에 처박혀
어둠을 주인으로 섬기기도 했다
마른장마에 잔비 뿌리다 마는 오늘
어느새 다 자란 저 벼들을 보면
들판의 주인은 바람인가
온 다리가 휘청거리면서도 바람에게
의자를 내주는 것은
그 무게로 벼를 익히는 것이라 깨닫는다
흔들리는 생각이 저절로 무거워져
의자를 이마 높이로 받들고 싶어질 때
저쪽 구산 자락은 훨씬 이전부터 정지의 자세로
지그시 뒷발을 내리고 파도를 등에 업는 것을 본다
우리에게 어떤 안식이 있느냐고 네가
네 번째 나에게 묻는다
모든 것을 부인한 한낮인데 부지런한
낮닭이 어디선가 길게 또 운다
아무도 없는데 무엇인가 내 어깨에 걸터앉아
하루 종일 힘겹게 흔들린다
기형도, 엄마생각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최영미, 행복론
사랑이 올 때는 두 팔 벌려 안고
갈 때는 노래 하나 가슴속에 묻어놓을 것
추우면 몸을 최대한 웅크릴 것
남이 닦아논 길로만 다니되
수상한 곳엔 그림자도 비추지 말며
자신을 너무 오래 들여다보지 말 것
답이 나오지 않는 질문은 아예 하지도 말고
확실한 쓸모가 없는 건 배우지 말고
특히 시는 절대로 읽지도 쓰지도 말 것
지나간 일은 모두 잊어버리되
엎질러진 물도 잘 추스려 훔치고
네 자신을 용서하듯 다른 이를 기꺼이 용서할 것
내일은 또 다른 시시한 해가 떠오르리라 믿으며
잘 보낸 하루가 그저 그렇게 보낸 십년 세월을
보상할 수도 있다고, 정말로 그렇게 믿을 것
그러나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은 없고
인생은 짧고 하루는 길더라
강윤후, 성북역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다가
나는 알게 되었지
이미 네가
투명인간이 되어
곁에 서 있다는 것을
그래서 더불어 기다리기로 한다
문태준, 엽서
바람이 먼저 몰아칠 것인데, 천둥소리가 능선 너머 소스라친다
이리저리 발 동동 구르는 마른 장마 무렵
내 마음 끌어다 앉힐 곳 파꽃 하얀 자리뿐
땅이 석 자가 마른 곳에 목젖이 쉬어 핀 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