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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복, 음악
비 오는 날 차 안에서
음악을 들으면
누군가 내 삶을
대신 살고 있다는 느낌
지금 아름다운 음악이
아프도록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있어야 할 곳에서
내가 너무 멀리
왔다는 느낌
굳이 내가 살지
않아도 될 삶
누구의 것도 아닌 입술
거기 내 메마른 입술을
가만히 포개어 본다
나희덕, 풀포기의 노래
네 물줄기 마르는 날까지
폭포여, 나를 내리쳐라
너의 매를 종일 맞겠다
일어설 여유도 없이
아프다 말할 겨를도 없이
내려꽂혀라, 거기에 짓눌리는
울음으로 울음으로만 대답하겠다
이 바위틈에 뿌리 내려
너를 본것이
나를 영영 눈뜰 수 없게 하여도
그대로 푸른 멍이 되어도 좋다
네 몸은 얼마나 또 아플 것이냐
이응준, 칠 일째
카프카는 체코어로 까마귀라는 뜻이다
나는 열여덟에
그런 이름을 가지고 싶었다
타클라마칸은 위구르어로
한번 들어가면 영원히 빠져나올 수 없는 곳이라는 뜻이다
나는 서른이 되던 날 밤
차라리 그런 이름이었으면 했다
바이러스는 라틴어로 독(毒)이라는 뜻이다
나는 요즘 그런 이름으로 지낸다
납인형 같은 생(生)이 경(經)을 덮고
칠 일째 아무 말도 않고 있다
이 세계를 소독할 유황불을 기다리고 있다
안도현, 꽃
바깥으로 뱉어내지 않으면 고통스러운 것이
몸 속에 있기 때문에
꽃은, 핀다
솔직히 꽃나무는
꽃을 피워야 한다는 게 괴로운 것이다
내가 너를 그리워하는 것
이것은 터뜨리지 않으면 곪아 썩는 못난 상처를
바로 너에게 보내는 일이다
꽃이 허공으로 꽃대를 밀어올리듯이
그렇다 꽃대는
꽃을 피우는 일이 너무 힘들어서
자기 몸을 세차게 흔든다
사랑이여, 나는 왜 이렇게 아프지도 않는 것이냐
몸 속의 아픔이 다 말라버리고 나면
내 그리움도 향기나지 않을 것 같아 두렵다
살아남으려고 밤새 발버둥을 치다가
입 안에 가득 고인 피
뱉을 수도 없고 뱉지 않을 수도 없을 때
꽃은, 핀다
이기철, 별까지는 가야 한다
우리 삶이 먼 여정일지라도
걷고 걸어 마침내 하늘까지는 가야 한다
닳은 신발 끝에 노래를 달고
걷고 걸어 마침내 별까지는 가야 한다
우리가 깃든 마을엔 잎새들 푸르고
꽃은 칭찬하지 않아도 향기로 핀다
숲과 나무에 깃들인 삶들은 아무리 노래해도
목쉬지 않는다
사람의 이름이 가슴으로 들어와 마침내
꽃이 되는 걸 아는 데
나는 쉰 해를 보냈다
미움도 보듬으면 노래가 되는 걸 아는 데
나는 반생을 보냈다
나는 너무 오래 햇볕을 만졌다
이제 햇볕을 뒤로 하고 어둠 속으로 걸어가
별을 만져야 한다
나뭇잎이 짜 늘인 그늘이 넓어
마침내 그것이 천국이 되는 것을
나는 이제 배워야 한다
먼지의 세간들이 일어서는 골목을 지나
성사(聖事)가 치러지는 교회를 지나
빛이 쌓이는 사원을 지나
마침내 어둠을 밝히는 별까지는
나는 걸어서 걸어서 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