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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성호, 식은 밥
어머니 밥 잡수신다
시래기국에 찬밥덩이 던져
넣어 후룩후룩 얼른 얼른
젖은 행주처럼 조그맣게 쭈그리고 앉아
목 퀭한 환자복의 아들이 남긴
식은 밥 다아 잡수신다
어머니 마른 가슴으로 먼 하늘 보신다
삭풍에 거슬러 살 날리던
유리의 땅은 바닷바람 같은 먼 나라
내 목숨 같은 먼 나라
봄에서 여름으로
여름에서 가을로
한 계절을 씻어내리는 비
두만강 물소리에 밥 말아
어머니 이른 아침밥 드신다
붉은 흙 퍽퍽 가슴에 채우신다
김종삼,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시가 뭐냐고
나는 시인이 못됨으로 잘 모른다고 대답하였다
무교동과 종로와 명동과 남산과
서울역 앞을 걸었다
저물녘 남대문 시장 안에서
빈대떡을 먹을 때 생각나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이
엄청난 고생 되어도
순하고 명랑하고 맘 좋고 인정이
있으므로 슬기롭게 사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알파이고
고귀한 인류이고
영원한 광명이고
다름 아닌 시인이라고
이갑수, 요약
모든 일은 시작하는 순간 반으로 요약된다
배부름은 첫술에 요약되어 있다
어떤 술도 그 맛은 첫잔과 마주한 사람이 나누어 좌우한다
귀뚜라미는 소리로서 그 존재를 간단히 요약한다
평행한 햇살을 요약하여 업은 잎사귀 하나 아래로 처지고 있다
방향은 가늘게 요약되어 동쪽은 오로지 동쪽만을 묵묵히 담당한다
요란한 것들을 집합시켜 보면 사소한 것 하나로 요약할 수 있다
물질은 한 분자에 성질을 전부 요약하여 담는다
한 방울 바닷물이 바다 전체를 요약하고 있다
서해는 서해를 찾아드는 모든 강의 이름을 요약한다
목숨은 요약되어 한 호흡과 호흡 사이에 있다
파란만장한 생애는 굵고 검은 활자로 요약되어 부음란에 하루 머무른다
하루살이는 일생을 요약하여 하루에 다 산다
너는 모든 남을 요약하여 내게로 왔다
정현종, 그림자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의 그림자가 물에 비쳤다
나는 그 물을 액자에 넣어 마음에 걸어놓았다
바라볼 때마다 그림자들은 물결에 흔들렸다
그리고 나는 그림자들보다 더 흔들렸다
김명인, 눈
꽃이 핀다, 일만 세계의 저편에
내 일만 번 눈맞춰둔 별이 있음을
그 별을 스쳐 여기에 닿는
인연의 무한한 짧음이여
죽음이 여러 죽음을 거쳐 눈 날리듯
문득 옷깃으로 스치는 목숨의 또 다른 변신
그대는 어느 별자리에서 이리로
사뿐히 옮겨오시는가
손을 펴면 한아름 가득 눈부시게
손짓해 다가오는 눈, 눈, 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