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리그도 없는 한산한 어느 날이었다. 정민과 용호는 어디 가고 진호만 허름한 츄리닝차림으로
공방에서 넥서스 뿌시기를 하고 있는데 연성과 현진이 연습생을 이끌고 찾아와 말했다.
"그분께서 부르십니다. 폭풍께서는 얼른 갈 채비를 하십시오." 그 돌연한 부름에 진호는 놀라움과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드론이 버로우한 격이었다. 그러나 내색없이 물었다.
"몹시 긴한 일이오?" "모릅니다. 그저 제게 가서 그분께서 오시도록 청하란 분부만 내리셨습니다."
현진이 무뚝뚝히 대답했다. 혹시나 어뷰저 모의에 연루된 일이 소문나지 않았는가 하는 불안도 있었지만 달리 가지않을 구실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아무도 딸리지 못한 채 그분이 기다리는 곳으로 갔다.
"요사이 숙소에서 큰일을 하고 있다 들었소만 ----." 요환이 웃는 얼굴로 진호를 맞으며 말했다.
큰일이라는 말에 진호는 가슴이 섬뜩했다. 절로 입이 오그라 든채 어버버버 거리며 대꾸조차 못했다.
그러나 요환은 어찌된 셈인지 여전히 다정하게 진호의 손을 잡고 자신의 연습실로 갔다.
"진호, 얼굴을 성형하는 일은 쉽지 않소. 어떠시오? 박순희들이 꺅꺅 거리며 봐 줄만하오?"
요환이 다시 그렇게 물은 뒤에야 진호는 문득 요환이 말한 큰일이 변태라는걸 깨달았다.
변종석과 꾸미고 있는일을 가리킨 것이 아니란 걸 알자 진호도 마음을 놓으며 대답했다.
"별일이 없기에 간지 난다는 소리가 듣고싶어서 피부미용을 할 뿐입니다. 성형이라 할 수야 있겠습니까?"
그리고 슬몃 보니 레고머리의 요환은 왠지 기분이 놓은 눈치였다.
아마도 몰래 사람을 놓아 진호의 용모를 살피다가 그가 성형외과에서 상담을 받는다는 소문을 듣고 속 깊이 가진 의심을 다고나마 푼 모양이었다.
진호는 속으로 새삼 얼굴 가꾸기를 잘 시작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 리플레이를 보니 테란이 참 암울했던 시절이 생각나는구려. 문득 레퀴엠에서 저그를 상대할 때의 일을 생각하니 감회가 새로웠소. 그때 러쉬 중에 가스가 모자라 마린들이 모두 스팀팩에 목이 말라 했는데, 나는 한 가지 전략을 썼더랬소. SCV를 앞세워 벙커를 지으며 조금만 기다리면 메딕이 도착한다고 거짓으로 컨트롤한 것이오. 그 말을 들은 마린들은 메딕들의 얼굴을 생각하자 한결같이 얼굴을 홍조를 뚸고 아잉 좋아하며, 그래서 벙커링을 성공시킬 수 있었던 것이오. 이제 그 리플레이를 보니 어찌 느껴지는 게 없겠소? 마침 유즈맵 세팅에 벙커 블러드가 잘 나왔기에 마우스를 클릭하며 폭풍과 함께 추억을 나누고 싶었소. 그 때문에 연성을 보내 폭풍을 청한 것이오."
요환이 드디어 진호를 부른 참뜻을 밝혔다. 진호는 그제서야 완연히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불러 준 정에 가볍게 감사한 다음 요환이 이끄는 대로 삼성 칸 컴퓨터 앞에 앉았다. LCD 모니터에는 이미 화면이 떠 있었는데, 요환이 말한 대로 테란 진영에는 SCV와 마린이 대기하여 있고 저그는 12드론 해처리를 하기 위해 최적화된 맵으로 구성 되어있었다. 두 사람은 곧 자리를 마주하고 앉아 컨트롤을 하기 시작했다. 테크를 반쯤 탈 무렵 갑자기 모니터의 화면이 디스커넥트로 바뀌더니 이윽고 공포의 파란화면으로바뀌기 시작했다.
"쉐키정이다! 쉐키정이 빠따로 랜선을 끊는다."
창문 너머로 빠따 형상이라도 비쳤던 것인지 지하실 에서 두 사람의 플레이를 옵하던 자들 가운데 하나가 문득 놀란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 소리에 요환과 진호도 덜덜덜 떨면서 쳐다보았다.
그러나 소리친 자가 가리킨 창문가에는 올드마린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폭풍은 치어풀의 변화를 아시오?" 자리로 돌아온 요환이 무얼 생각했는지 불쑥 진호에게 물었다.
평소처럼 진호가 겸손하게 대답했다.
"몇 가지 보고 들은게 있습니다만 자세히는 알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내가 말해 드리겠소." 요환이 갑자기 정색을 하며 말했다.
"치어풀이란 느끼하고 영웅화 되기를 마음대로 하며, 박순희들이 표현하기를 또한 대로 하오.
예를들면 PARSON(빠순)문학의 최고봉이라 일컷는
<나도현 당신을 사랑합니다. 영원히 사랑합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죠.>처럼 역겨워버리기도 할 수 있는 것이오.
치어풀이란 물건은 영웅에 비하여 말할 수 있을 것이외다. 폭풍께서는 스타리그를 두루 올라가셨으니
틀림없이 스타의 S급 영울이라 할 사람들을 알고 있으리다. 바라건대 내게 한 사람만이라도 말해 주시오." 치어풀로 시작된 이야기가 느닷없이 영웅론으로 번진 것이었다. 얼른 듣기에는 자연스러웠으나 진호는 그 뒤에 숨은 요환의 뜻을 짐작했다. 영웅론을 통해 진호의 안목은 물론 스타급 센스의 크기를 가늠해 보려 함에 틀림없었다.
"제 안목으로 어찌 영웅을 알아볼 수 있겠습니까?" 진호가 일시에 어떻게 대꾸할지 몰라 그렇게 발뺌을 했다. 진호가 일부러 대답을 피하고 있다느 것까지 알아채지 못할 요환은 아니었다. 한층 홍조를 띤 얼굴로 진호를 다그쳤다.
"지나친 겸손이오. 그러지 말고 한번 속을 터놓고 이야기해 보시오." 제가 스타리그까지 올라와 준우승 까지 하게 되었습니다만 스타 영웅에 대해서는 실로 아는 바가 없습니다. 진호가 다시 한번 의뭉을 떨었으나 소용이 없었다. "그 실력은 모른다 해도 이름은 듣지 않았게소? 어디 들은 대로라도 말씀해
보시오." 요환은 끝내 진호를 놓아 주지 않았다. 진호는 어쩔 수 없다는 걸 알자 한동안을 생각하는 체하다 우물우물 대답했다.
"팬택의 윤열이 어떠하겠습니까? 그랜드 슬램과 승률이 받춰주니 영웅이라 할 만하지 않겠습니까?"
"낙동강 속의 조개나 잡을 해달일 뿐이오. 이르든 늦든 반드시 내게 관광당할 위인이외다."
요환이 한 마디로 윤열을 여지없이 깎아내리며 재촉하듯 진호를 살폈다. 진호는 다시 크게 마음에도 없는 인물을 댔다.
"GO의 태민도 있습니다. 3개의 리그에 걸쳐 우승권에 근접했었고 리플레이에 영향을 입은 공방양민들이 많습니다. 거기다가 지금은 같은 팀원 가운데 여러 종족에 능한 이들이 매우 많으니 영웅이라 할 만합니다."
요환이 약간 허세가 밴 웃음으로 진호를 반박했다. "태민은 겉모양은 번듯하나 매너가 없고,
저그와 프로토스전에 승률이 좋아도 테란 전에는 힘이 없소. 저그가 지나치게 테란에게 약하니 어찌 영웅이라 할 수 있겠소이까?"
"또 한 사람 생각 나는 이가 있습니다. KTF 의 에이스의 하나로 프로브에도 할루시네이션을 펼치는 강민은 영웅이라 할 만합니다."
진호는 다시 같은 팀원인 강민을 들먹여 보았다. 요환는 한층 가소롭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강민은 헛된 이름뿐 양대리그 다 탈락한 자요. 영웅이 아니외다." "그럼 한창 혈기 있고 억센 박성준은 어떻겠습니까? 지금 스타리그를 제패하고 프리미엄 리그도 우승했으니 영웅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박성준은 망고쥬스의 약효를 받은 것뿐이니 영웅이라 할 수 없소. 도핑테스트를 하면 모를까"
"한빛의 강도경은 어떻겠습니까?" 끝까지 놓아주지 않는 요환에게 까닭 모를 불안까지 느끼며 진호는 한빛의 도경까지 끌어냈다. 팀플에 의지해 겨우겨우 프로게이머나 지켜나가는 위인을 지신은 한 번도 영웅이라 여겨본 적이 없음에도 요환의 심문 같은 물음을 배겨내지 못해 주워섬긴 것이었다.
"도경이 비록 올드 게이머라 하나, 다만 한빛의 빠따 강에 지나지 않소. 어찌 영웅이라 하겠소!" 요환은 마찬가지로 그렇게 부인해 놓고 또다시 진호를 빤히 쳐다보았다.
진호는 한층 다급해지는 기분으로 생각나는 대로 이름을 대기 시작했다. "태규`수범`은종 등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들은 말할 가치조차 없는 소인들이오. 그야말로 시시한 조무래기들이지."
요환이 손뼉을 치고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두 눈만은 여전히 진호를 살피고 있었다. 진호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 능청을 떨며 화제를 돌리려고만 애를 썼다. "지금 제가 댄 사람들을 빼면 이 콩은 실로 아는 바가 없습니다."
하지만 요환은 기어이 진호가 속으로 두렵게 생각하던 말을 꺼내고 말았다.
"무릇 S급영웅이란 마우스에는 큰 뜻을 품고 좋은 전략이 가득한 사람으로 맵의 기운을 머금고 컨트롤과 전략을 토해 내는 자요." "그런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정말 모르시겠소?" 요환이 다짐하듯 그렇게 묻더니 손가락을 들어 먼저 진호를 가리키고 이어 자신을 가리키며 호탕하게 말했다.
"지금 스타의 영웅이라면 오직 폭풍과 여기 이 가르시아가 있을 뿐이오!"
후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