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종환, 여백
언덕 위에 줄지어 선 나무들이 아름다운 건
나무 뒤에서 말없이
나무들을 받아안고 있는 여백 때문이다
나뭇가지들이 살아온 길과 세세한 잔가지
하나하나의 흔들림까지 다 보여주는
넉넉한 허공 때문이다
빽빽한 숲에서는 보이지 않는
나뭇가지들끼리의 균형
가장 자연스럽게 뻗어 있는 생명의 손가락을
일일이 쓰다듬어주고 있는 빈 하늘 때문이다
여백이 없는 풍경은 아름답지 않다
비어 있는 곳이 없는 사람은 아름답지 않다
여백을 가장 든든한 배경으로 삼을 줄 모르는 사람은
엄원태, 늦은 오후의 식당
그 식당 차림표에는
열 가지가 넘는 메뉴가 준비되어 있고
가격 또한 저렴한 편인데
가령, 낙지볶음은 한 접시에 기껏 오천원이다
홀 한쪽에는
주방으로 쓰는 씽크대와 장탁자가 있고
식탁은 세 개
의자는 열세 개 있다
손님은 하루 평균 여남은 명인데
어쩌다 술손님을 한 팀 받기라도 하는 날이면
주인아줌마는 기꺼이 식당에 딸린 방 한 칸을
내줄 준비가 되어 있다
언제나 준비가 되어 있는 그 식당이
텅, 텅, 비어 있던 어느날
나는 거기서 짠 국밥 한 그릇을
신김치와 콩나물무침으로 먹은 적이 있다
어쩌다 이렇게 조용한 주택가 길목에
이런 식당이 허술하게 문을 열고 있담
생각하는 것이 상식, 그 상식을
보기 좋게 뒤집으며 그 식당은 거기에 있는 셈인데
한번은 세무서에서 나온 젊은 주사가
조용히 업종 전환을 권유한 바 있었다 하지만
사실 그건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식당 아줌마는 늘 준비해놓은 반찬 중에서
날짜를 못 이겨 상하기 직전인 것만으로
자신의 식사를 해결하곤 하는데
그 처연한 혼자만의 식사를
그 앞을 지나다니며 무심히 몇번 보았다
삶이란 게 그런 것은 아닌가
쉬어빠지기 직전의 음식을 어쩔 수 없이
혼자서 느릿느릿 씹어대는, 어떤, 말로는 다 못할
무심함 같은, 그런 나날들의 이어짐
황지우, 길
삶이란
얼마간 굴욕을 지불해야
지나갈 수 있는 길이라는 생각
돌아다녀보면은
조선팔도
모든 명당은 초소다
한려수도, 내항선이 배때기로 긴 자국
지나가고 나니 길이었구나
거품 같은 길이여
세상에, 할 고민 없어 괴로워하는 자들아
다 이리로 오라
가다보면 길이 거품이 되는 여기
내가 내린 닻, 내 덫이었구나
이영광, 비누에 대하여
비누칠을 하다 보면
함부로 움켜쥐고 으스러뜨릴 수 있는 것은
세상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비누는 조그맣고 부드러워
한손에 잡히지만
아귀힘을 빠져나가면서
부서지지 않으면서
더러워진 나의 몸을 씻어준다
샤워를 하면서 생각한다
힘을 주면 더욱 미끄러워져
나를 벗어나는 그대
나는 그대를 움켜쥐려 했고
그대는 조심조심 나를 벗어났지
그대 잃은 슬픔 깨닫지 못하도록
부드럽게 어루만져주었지
끝내 으스러지지 않고
천천히 닳아 없어지는 비누처럼, 강인하게
한번도 나의 소유가 된 적 없는데
내 곁에 늘 있는 그대
나를 깊이 사랑해주는
미끌미끌한 그대
함민복, 나를 위로하며
삐뚤삐뚤
날면서도
꽃송이 찾아 앉는
나비를 보아라
마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