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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샤쓰
게시물ID : lovestory_8086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등푸른선생
추천 : 4
조회수 : 503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7/01/19 19:58:34

동물 시간이었다.
"이 없는 동물이 무엇인지 아는가?"
선생이 두 번씩 거푸 물어도 손드는 학생이 없더니, 별안간 '옛' 소리를 지르면서 기운 좋게 손을 든 사람이 있었다.
"음, 창남인가? 어디 말해 봐."
"이 없는 동물은 늙은 영감입니다."
"예끼!"
하고 선생은 소리를 질렀다. 온 반 학생이 깔깔거리고 웃어도, 창남이는 태평으로 자리에 앉았다.

수신 시간이었다.
"성냥 한 개비의 불을 잘못하여 한 동네 30여 집이 불에 타 버렸으니, 성냥 단 한 개비라도 무섭게 알고 주의해야 하느니라."
하고 열심으로 설명을 해 준 선생이 채 교실 문 밖도 나가기 전에,
"한 방울씩 떨어진 빗물이 모여 큰 홍수가 되는 것이니, 누구든지 콧물 한 방울이라도 무섭게 알고 주의해 흘려야 하느니라."
하고 크게 소리친 학생이 있었다. 선생은 그것을 듣고, 터져 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참고 돌아서서,
"그게 누구냐? 아마 창남이가 또 그랬지?" 
하고, 억지로 눈을 크게 떴다. 모든 학생들은 킬킬거리고 웃다가 조용해졌다.
"예, 선생님이 안 계실 줄 알고 제가 그랬습니다. 이 다음엔 안 그러지요."
하고 병정같이 벌떡 일어서서 말한 것은 창남이었다. 억지로 골 난 얼굴을 지은 선생은 기어이 다시 웃고 말았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빙그레 웃고는 그냥 나가 버렸다.
"아하하하하…"
학생들은 일시에 손뼉을 치면서 웃어댔다.

00고등 보통학교 1년급 을반 창남이는 반 중에 제일 인기 좋은 쾌활한 소년이었다.
이름이 창남이요, 성이 한가이므로, 비행사 안창남(安昌男)과 같다고 학생들은 모두 그를 보고,
"비행사, 비행사." 
하고 부르는데, 사실상 그는 비행사같이 시원스럽고 유쾌한 성질을 가진 소년이었다.

모자가 다 해졌어도 새 것을 사 쓰지 않고, 양복 바지가 해져서 궁둥이에 조각을 붙이고 다니는 것을 보면 집안이 구차한 것도 같지만, 그렇다고 단 한 번이라도 근심하는 빛이 있거나 남의 것을 부러워하는 눈치도 없었다.
남이 걱정이 있어 얼굴을 찡그릴 때에는 우스운 말을 잘 지어내고, 동무들이 곤란한 일이 있을 때에는 좋은 의견도 잘 꺼내 놓으므로, 비행사의 이름은 더욱 높아졌다.

연설을 잘 하고 토론을 잘 하므로 갑반하고 내기를 할 때에는 언제든지 창남이가 혼자 나아가 이기는 셈이었다.
그러나 그의 집이 정말 가난한지 넉넉한지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고, 가끔 그의 뒤를 쫓아가 보려고도 했으나 모두 중간에서 실패하고 말았다. 왜 그런고 하면, 그는 날마다 20리 밖에서 학교를 다니기 때문이었다.

그는 가끔 우스운 말을 하여도, 자기 집안 일이나 자기 신상에 관한 이야기는 말하는 법이 없었다. 그런 것을 보면 입이 무거운 편이었다.
그는 입과 같이 궁둥이가 무거워서, 철봉 틀에서는 잘 넘어가지 못하여 늘 체조 선생께 흉을 잡혔다. 하학한 후, 학생들이 다 돌아간 다음에도 혼자 남아 있다가 철봉 틀에 매달려 땀을 흘리면서, 혼자 연습을 하고 있는 것을 동무들은 가끔 보았다.

"이애, 비행사가 하학 후 혼자 남아서 철봉 연습을 하고 있더라."
"땀을 뻘뻘 흘리면서 혼자 애를 쓰더라."
"그래, 이제는 좀 넘어가든?"
"웬걸, 한 2백 번이나 넘도록 연습하면서, 그래도 못 넘어가더라." 
"그래, 맨 나중에는 자기가 자기 손으로 그 누덕누덕 기운 궁둥이를 자꾸 때리면서, '궁둥이가 무거워, 궁둥이가 무거워' 하면서 가더라!"
"제가 제 궁둥이를 때려?"
"그러게 괴물이지…." 
"아하하하하하…."
모두 웃었다. 어느 모로든지 창남이는 이야깃거리가 되는 것이었다.

겨울도 겨울, 몹시도 추운 날이었다. 손을 입에 대고 호호 부는 이른 아침에 상학 종이 치고 공부는 시작되었는데, 한 번도 결석한 일이 없는 창남이가 이 날은 오지 않았다.
"신문으로 치면 호욀세, 호외야! 아니, 글쎄 비행사가 결석을 하다니!"
"어제 저녁 그 무서운 바람에 어디로 날아간 게지!"
"아마 병이 났나 보다. 감기가 든 게지." 
"이놈아, 능청스럽게 아는 체 마라."
1학년 을반은 창남이 소문으로 수군수군 야단이었다.

첫째 시간이 반이나 넘어갔을 때, 교실 문이 덜컥 열리면서 창남이가 얼굴이 새빨개 가지고 들어섰다.
학생과 선생은 반가워하면서 웃었다. 그리고 그들은 창남이가 신고 서 있는 구두를 보고 더욱 크게 웃었다. 그의 오른편 구두는 헝겊으로 싸매고, 또 새끼로 감아 매고, 또 그 위에 손수건으로 싸매고 하여 퉁퉁하기 짝이 없다.

"한창남, 오늘은 웬일로 늦었느냐?"
"예"
하고 창남이는, 그 괴상한 퉁퉁한 구두를 신고 있는 발을 번쩍 들고,
"오다가 길에서 구두가 다 떨어져서 너털거리기에 새끼를 얻어서 고쳐 신었더니, 또 너털거리고 해서, 여섯 번이나 제 손으로 고쳐 신고 오느라고 늦었습니다."
그리고도 창남이는 태평이었다. 그 시간이 끝나고 쉬는 동안에, 창남이는 그 구두를 벗어 들고 다 해져서 너털거리는 구두주둥이를 손수건과 대님짝으로 얌전스럽게 싸매어 신었다. 그러고도 태평이었다.

날이 따뜻해도 귀찮은 체조 시간이, 이처럼 살이 터지도록 추운 날이었다.
"어떻게 이 추운 날 체조를 한담."
"또 그 무섭고 딱딱한 선생이 웃통을 벗으라고 하겠지…. 아이구 아찔이야."
하고 싫어들 하는 체조 시간이 되었다. 원래 군인으로 다니던 성질이라 무뚝뚝하고 용서 없는 체조 선생님이 호령을 하다가 그 괴상스러운 창남의 구두를 보았다.
"한창남! 그 구두를 신고도 활동할 수 있나? 뻔뻔스럽게…."
"예,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이것 보십시오."
하고 창남이는 시키지도 않은 뜀도 뛰어 보이고, 달음박질도 하여 보이고, 제자리걸음도 부지런히 해 보였다. 체조 선생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음! 상당히 치료해 신었군!"
하고 말았다. 
그리고 다시 호령을 계속하였다. 
"전열만 세 걸음 앞으로옷!"
"전후열 모두 웃옷 벗엇!"
죽기보다 싫어도 체조 선생의 명령이라, 온 반 학생이 일제히 검은 양복 저고리를 벗어 샤츠만 입은 채로 서 있고 선생까지 벗었는데, 단 한 사람 창남이만 벗지를 않고 그대로 있었다.

"한창남! 왜 웃옷을 안 벗나?"
창남이는 얼굴을 푹 숙이면서 빨개졌다. 그가 이러기는 처음이었다. 한참 동안 멈칫멈칫하다가 고개를 들고,
"선생님, 만년 샤쓰도 좋습니까?"
"뭐? 만년 샤쓰? 만년 샤쓰란 뭐야?"
"매 매 맨몸 말씀입니다." 
성난 체조 선생은 당장에 후려갈길 듯이 그의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가면서,
"벗어랏!"
호령하였다. 창남이는 양복 저고리를 벗었다. 그는 샤쓰도 적삼도 안 입은 벌거숭이 맨몸이었다. 선생은 깜짝 놀라고 학생들은 깔깔 웃었다.

"한창남! 왜 샤쓰를 안 입었지?"
"없어서 못 입었습니다."
그 때, 선생의 무섭던 눈에 눈물이 돌았다. 그리고 학생들의 웃음도 갑자기 없어졌다.
'가난! 고생! 아아, 창남이 집은 그토록 몹시 구차하였던가….'
모두 생각하였다.
"창남아, 정말 샤쓰가 없니?"
눈물을 씻고 다정히 묻는 소리에,
"오늘하고 내일만 없습니다. 모레에 인천에서 형님이 올라와서 사 줍니다."
"음! 그럼 웃옷을 다시 입어라!"
체조 선생은 다시 물러서서 큰 소리로,
"한창남은 오늘은 웃옷을 입고 해도 용서한다. 그리고 제군에게 특별히 할말이 있다. 제군은 다 한창남 군같이 용감한 사람이 되란 말이다. 누구든지 샤쓰가 없으면 추운 것은 둘째요, 첫째 부끄러워서라도, 결석이 되더라도 학교에 오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오늘같이 제일 추운 날, 한창남 군은 샤쓰 없이 맨몸, 으으응, 즉 그 만년 샤쓰로 학교에 왔단 말이다. 여기 서 있는 제군 중에는 샤쓰를 둘씩 포개 입은 사람도 있을 것이요, 자켓에다 외투까지 입고 온 사람이 있지 않은가…. 물론 맨몸으로 나오는 것이 예의는 아니야. 그러나 그 용기와 의기가 좋단 말이다. 한창남 군의 의기는 1등이다. 제군도 다 그 의기를 배우란 말야."

'만년 샤쓰!'

비행사란 말이 없어지고, 그날부터 만년 샤쓰란 말이 온 학교에 퍼져서 만년 샤쓰라고만 부르게 되었다.

그 다음 날, 만년 샤쓰 창남이가 늦게 오지 않았건마는, 그가 교문 근처까지 오기가 무섭게 온 학교 학생이 허리가 부러지도록 웃기 시작하였다.

창남이가 오늘은 양복 웃저고리에 바지는 어쨌는지 얄따랗고 해져 뚫어진 한복 겹바지를 입고, 버선도 안 신고 맨발에 짚신을 끌고 뚜벅뚜벅 걸어온 까닭이었다. 맨가슴에, 위는 양복 저고리 아래는 한복 바지, 그나마 다 떨어진 겹바지, 맨발에 짚신, 그 꼴을 보고, 이십 리 길을 걸어왔으니 한길에서는 오죽 웃었으랴…. 그러나, 당자는 태평이었다.

"고아원 학생 같으니! 고아원 학생."
"밥 얻어먹으러 다니는 아이 같구나."
하고들 떠드는 학생들 틈을 헤치고, 체조 선생이 '무슨 일인가?' 하고 살펴보니까 창남이의 그 꼴이라, 선생도 놀랐다.
"너 양복 바지를 어쨌니?"
"없어서 못 입고 왔습니다."
"어째 그리 없어지느냐? 날마다 한 가지씩 없어진단 말이냐?"
"예에, 그렇게 한 가지씩 두 가지씩 없어집니다."
"어째서?"
"예." 하고 침을 삼키고 나서,
"그저께 저녁에 바람이 몹시 불던 날, 저희 동네에 큰 불이 나서 저희 집도 반이나 넘어 탔어요. 그래서 모두 없어졌습니다."
듣기에 하도 딱해서 모두 혀끝을 찼다.
"그렇지만, 양복 바지는 어저께도 입고 있지 않았니? 불은 그저께 나고…"
"저희 집은 반만이라도 타다 남아서 세간을 건졌지만, 이웃집이 10여 채나 다 타 버려서 동네가 야단들이어요. 저는 어머니하고 단 두 식구만 있는데, 반만이라도 남았으니까 먹고 잘 것은 넉넉해요. 그런데 동네 사람들이 먹지도 못 하고 자지도 못 하게 되어서 야단들이어요. 그래 저희 어머니께서는, 우리는 먹고 잘 수 있으니까 두 식구가 당장에 입고 있을 옷 한 벌씩만 남기고는 모두 길거리에 떨고 있는 동네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라고 하셔서, 어머니 옷, 제 옷을 모두 동네 어른들께 드렸습니다. 그리고 양복 바지는 제가 입고 주지 않고 있었는데, 저의 집 옆에서 술 장사 하시던 영감님이 병든 노인이신데, 하도 추워하시길래 보기가 딱해서 어제 저녁에 마저 주고, 저는 가을에 입던, 해진 겹바지를 꺼내 입었습니다."

모든 학생들은 죽은 듯이 고요하고, 고개들이 말없이 수그러졌다. 선생도 고개를 숙였다.
"그래, 너는 네가 입을 샤쓰까지도 양말까지도 주었단 말이냐?"
"아니오. 양말과 샤쓰만은 한 벌씩 남겼었는데, 저희 어머니가 입었던 옷은 모두 남에게 줘 놓고 추워서 벌벌 떠시길래, 제가 '어머니 제 샤쓰라도 입으실래요?' 했더니, '네 샤쓰도 모두 남 주었는데 웬 것이 두 벌씩 남았겠니?' 하시기에 저는, 제가 입고 있는 것 한 벌뿐이면서도, '예, 두 벌 남았으니 하나는 어머니 입으십시오' 하고 입고 있던 것을 어저께 아침에 벗어 드렸습니다. 그러니까 '네가 먼 길에 학교 가기 추울 텐데 둘을 포개 입을 것을 그랬구나' 하시면서 받으셨어요. 그리고 아주 발이 시려 하시면서 '얘야, 창남아, 양말도 두 켤레가 있느냐?' 하시기에 신고 있는 것 한 켤레였지만, '예, 두 켤레올시다. 하나는 어머니 신으시지요' 하고 거짓말을 하고, 신었던 것을 어제 저녁에 벗어 드렸습니다. 저는 그렇게 어머니께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나쁜 일인 줄 알면서도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오늘도 아침에 나올 때에 '얘야, 오늘같이 추운 날 샤쓰를 하나만 입어서 춥겠구나. 양말을 잘 신고 가거라' 하시기에 맨몸 맨발이면서도 '예, 샤쓰도 잘 입고 양말도 잘 신었으니까 춥지는 않습니다' 하고 속이고 나왔어요. 저는 거짓말쟁이가 됐습니다."
하고, 창남이는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네가 거짓말을 하더라도, 어머니께서 너의 벌거벗은 가슴과 버선 없이 맨발로 짚신을 신은 것을 보시고 아실 것이 아니냐?"

"아아, 선생님…."
하는 창남이의 소리는 떨렸다.
그리고 그의 수그린 얼굴에서 눈물 방울이 짚신 코에 뚝뚝 떨어졌다.

"저희 어머니는 제가 여덟 살 되던 해에 눈이 머셔서 보지를 못 하고 사신답니다."
체조 선생의 얼굴에는 굵다란 눈물이 흘렀다. 와글와글 하던 그 많은 학생들도 자는 것같이 고요하고, 훌쩍훌쩍 우는 소리만 여기저기서 조용히 들렸다.


                                                            방정환    1927년 3월 [어린이] 5권 3호


출처 찬 바람이 불 때면 문득 생각나곤 하는 동화입니다.
<사랑의 선물> 이란 방정환 동화집에 수록된 이야긴데, 5학년때쯤 읽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근데 어릴 적엔 읽고나서 눈물 흘리고 그러진 않았던 것 같은데,, 흠,, 이거 참,,

이 동화가 발표된 지 벌써 90년이 지났네요.
방정환선생님은 그 당시 사회의 어떤 모습들을 보고 이 글을 쓰신 건지 생각해봅니다. 90년 후, 지금 이 사회는 어떠한가.. 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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