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희덕, 나뭇가지가 오래 흔들릴 때
세상이 나를 잊었는가 싶을 때
날아오는 제비 한 마리 있습니다
이젠 잊혀져도 그만이다 싶을 때
갑자기 날아온 새는
내 마음 한 물결 일으켜놓고 갑니다
그러면 다시 세상 속에 살고 싶어져
모서리가 닳도록 읽고 또 읽으며
누군가를 기다리게 되지만
제비는 내 안에 깃을 접지 않고
이내 더 멀고 아득한 곳으로 날아가지만
새가 차고 날아간 나뭇가지가 오래 흔들릴 때
그 여운 속에서 나는 듣습니다
당신에게도 쉽게 해지는 날 없었다는 것을
그런 날 불렀을 노랫소리를
박이도, 한 세상
짧은 한평생이라는데
가도가도 끝이 없구나
안경알을 닦으면
희미하게 생각나는
지난 일들
가다가 가다가 서글퍼
주저앉으면
안경알 저쪽에
희미하게 떠오르는
짧은 희망
다시 가다가 문득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그것을 잊어버리기도 한다
문인수, 오후 다섯 시
내가 한 쪽으로 기우뚱, 할 때가 있다
부음을 듣는 순간 더러 그렇다
그에게 내가 지긋이 기대고 있었다는 것 아닌가, 그가 갑자기
밑돌처럼 빠져나간 것이다. 나는 지금
오랜 세월 낡은 읍성 같다
“조금 전, 오후 다섯 시에 운명했습니다.” 2007년 1월 19일
그의 이마 쪽 초록 머리카락 한 줌
염색이 아니라 섣달
시린 바람 아래 웬 생풀처럼 나부낀다
도대체, 인생이 어디 있나, 있긴 있었나 싶을 때가 있다
나 허물어지는 중에 장난치듯
한 죽음이 오히려 생생할 때 그렇다
곽효환, 얼음새꽃
아직 잔설 그득한 겨울 골짜기
다시금 삭풍 불고 나무들 울다
꽁꽁 얼었던 샛강도 누군가 그리워
바닥부터 조금씩 물길을 열어 흐르고
눈과 얼음의 틈새를 뚫고
가장 먼저 밀어 올리는 생명의 경이
차디찬 계절의 끝을 온몸으로 지탱하는 가녀린 새순
마침내 노오란 꽃망울 머금어 터뜨리는
겨울 샛강, 절벽, 골짜기 바위틈의
들꽃, 들꽃들
저만치서 홀로 환하게 빛나는
그게 너였으면 좋겠다
아니 너다
정현종, 견딜 수 없네
갈수록, 일월(日月)이여
내 마음이 더 여리어져
가는 8월을 견딜 수 없네
9월도 시월도
견딜 수 없네
흘러가는 것들을
견딜 수 없네
사람의 일들
변화와 아픔들을
견딜 수 없네
있다가 없는 것
보이다 안 보이는 것
견딜 수 없네
시간을 견딜 수 없네
시간의 모든 흔적들
그림자들
견딜 수 없네
모든 흔적은 상흔(傷痕)이니
흐르고 변하는 것들이여
아프고 아픈 것들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