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선미, 찰나의 무채색
너는 맨발로 걸어와
깊은 발자국을 남겼고
너는 빈손으로도
내 세상을 가득 채워주었고
너는 체취만으로
나를 물들였다
김세실. 첫사랑
그 달콤한 추억
수줍은
언어
너를
가슴에
맨 처음 묻었다
백가희, 여전히 날이 좋다
봄은 잠시인데
그 봄이 전부 인양 사는 꽃들이 있다
그대는 잠시인데
그대가 전부 인양 살아버린 나도 있었다
고결한 나의 봄
그대를 보내기엔
여전히 날이 좋다
홍영철, 그리워질 오늘
길 위에 있었네
길 위에서는 어디로든 가야만 하는 것인지
모르는 사람들 모르는 곳으로 스쳐 지나가는 저물녘
아프다, 살았다는 것 밖에는 아무 추억이 없을 하루
불현듯 쏟아지는 어둠 저 너머에 희미한 별 하나
먼 길 허위허위 달려 내게 안기는 조그만 그 빛
반갑다, 살았다는 것도 눈물나게 그리워질 오늘
김정환, 육교를 건너며
육교를 건너며
나는 이렇게 사는 세상의
끝이 있음을 믿는다
내 발바닥 밑에서 육교는 후들거리고
육교를 건너며 오늘도 이렇게 못다한 마음으로
나의 이 살아있음이 언젠가는 끝이 있으리라는 것을
나는 믿고
또 사랑하는 것이다
육교는 지금도 내 발바닥 밑에서 몸을 떤다
견딘다는 것은 오로지 마음 떨리는 일
끝이 있음으로 해서
완성됨이 있음으로 해서
오늘, 세상의 이 고통은 모두 아름답다
지는 해처럼
후들거리는 육교를 건너며
나는 오늘도 어제처럼 의심하며 살 것이며
내일도 후회 없이
맡겨진 삶의 소름 떠는 잔칫밤을 치를 것이다
아아 흔들리는 육교를 건너며
나는 오늘도, 이렇게 저질러진 세상의
끝이 있음을 나는 믿는다
나의 지치고 보잘것없는 이 발걸음들이
끝남으로, 완성될 때까지
나는 언제나 열심히 살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