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호, 먼 여름
아무리 채찍질해도 닿을 수 없는
벼랑처럼 아스라한 그대여
내 마음에 무수히 살면서도
도무지 삶이 되지 않는
어떤 꽃처럼
먹먹한 그대여
이성선, 만나고 싶은 사람
몸에서 소리 나는 사람을 만나고 싶습니다
매양 알 수 없는 빛에 젖어서
그의 내면으로부터 신비한 소리가 들려오는
고독한 사람을 만나고 싶습니다
듣고 싶습니다
이 여름의 깊은 밤 한가운데서
그가 부는
영혼의 맑은 갈대 피리
서쪽에서 왔을까
세상의 한 골짜기를 열고
안으로 안으로 노래하며 흘러가는
흐느낌 같은 사람
반편 같은 사람
별이 비치는 하늘 아래가 아니라도 좋습니다
비 젖은 바닷가가 아니라도 좋습니다
그의 곁에서
깨어 있는 또 다른 그를 들으며
걸어가고 싶습니다
독경 같은 그 음악으로
빈 손을 적시며 살아가고 싶습니다
허수경, 고마웠다, 그 생애의 어떤 시간
그때, 나는 묻는다
왜 너는 나에게 그렇게 차가웠는가
그러면 너는 나에게 물을 것이다
그때, 너는 왜 나에게 그렇게 뜨거웠는가
서로 차갑거나 뜨겁거나
그때 서로 어긋나거나 만나거나 안거나 뒹굴거나 그럴 때
서로의 가슴이 이를테면 사슴처럼
저 너른 우주의 밭을 돌아 서로에게로 갈 때
차갑거나 뜨겁거나 그럴 때
미워하거나 사랑하거나 그럴 때
나는 내가 태어나서 어떤 시간을
느낄 수 있었던 것만이 고맙다
이기철, 내가 만난 사람은 모두 아름다웠다
잎 넓은 저녁으로 가기 위해서는 이웃들이 더 따뜻해져야 한다
초승달을 데리고 온 밤이 우체부처럼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채소처럼 푸른 손으로 하루를 씻어놓아야 한다
이 세상에 살고 싶어서 별을 쳐다보고
이 세상에 살고 싶어서 별 같은 약속도 한다
이슬 속으로 어둠이 걸어 들어갈 때 하루는 또 한번의 작별이 된다
꽃송이가 뚝뚝 떨어지며 완성하는 이별
그런 이별은 숭고하다
사람들의 이별도 저러할 때 하루는 들판처럼 부유하고 한 해는 강물처럼
넉넉하다
내가 읽은 책은 모두 아름다웠다
내가 만난 사람도 모두 아름다웠다
나는 낙화만큼 희고 깨끗한 발로 하루를 건너가고 싶다
떨어져서도 향기로운 꽃잎의 말로
내 아는 사람에게 상추잎 같은 편지를 보내고 싶다
조병화, 하루만의 위안
잊어버려야만 한다
진정 잊어버려야만 한다
오고 가는 먼 길가에서
인사 없이 헤어진 지금은 그 누구던가
그 사람으로 잊어버려야만 한다
온 생명은 모두 흘러가는 데 있고
흘러가는 한 줄기 속에
나도 또 하나 작은
비둘기 가슴을 비벼대며 밀려가야만 한다
눈을 감으면
나와 가까운 어느 자리에
싸리꽃이 마구 핀 잔디밭이 있어
잔디밭에 누워
마지막 하늘을 바라보는 내 그날이 온다
그날이 있어 나는 살고
그날을 위하여 바쳐 온 마지막 내 소리를 생각한다
그날이 오면
잊어버려야만 한다
진정 잊어버려야만 한다
오고 가는 먼 길가에서
인사 없이 헤어진 지금은 그 누구던가
그 사람으로 잊어버려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