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라, 얼룩
검버섯 피부의 시간이 당신을 지나간다
시간을 다 얼룩이 지나간다
날이 저물고 아픈 별들이 뜨고
내가 울면
세상에 한 방울 얼룩이 지겠지
우리가 울다 지치면
한 문명도 얼룩이 되고
갓 피어나는 꽃들도 얼룩이 되지
지금 나는
당신의 얼룩진 날들이 나에게 무늬를 입히고
달아나는 걸 본다
모든 것을 사랑하였어도
밤을 떠나는 별처럼 당신이 나를 지나간다
그러다가 어느 날
사라진 문명이 돌연 찾아든 것처럼
내 벽에는 오래된 당신의
벽화가 빛나겠지
천 년을 휘돌아온 나비가 찾아들고
다시 한바탕 시간들 위로 꽃잎 날리고
비 내리고 사랑하고 울고 이끼 끼고
나의 얼룩도
당신처럼 시간을 지나가겠지
이승희, 그리운 맨드라미를 위하여
죽고 싶어 환장했던 날들
그래 있었지
죽고 난 후엔 더 이상 읽을 시가 없어 쓸쓸해지도록
지상의 시들을 다 읽고 싶었지만
읽기도 전에 다시 쓰여지는 시들이라니
시들했다
살아서는 다시 갈 수 없는 곳이 생겨나고 있다고
내가 목 매달지 못한 구름이
붉은 맨드라미를 안고 울었던가 그 여름
세상 어떤 아름다운 문장도
살고 싶지 않다로만 읽히던 때
그래 있었지
오전과 오후의 거리란 게
딱 이승과 저승의 거리와 같다고
중얼중얼
폐인처럼
저녁이 오기도 전에
그날도 오후 두시는 딱 죽기 좋은 시간이었고
나는 정말 최선을 다해 울어보았다
이병률, 자상한 시간
의자에 앉으려고 하고 있다
사람은 사람을 서로 아프게 하여
스스로 낫기도 하겠다는데
나는 한사코 혼자 앓겠다는 사람 옆에 있다
의자는 의자에 앉으려 애쓰고 있지만
꽃과 이 사람은 무엇을 애써 누르려 한 적도
살겠다고 애쓰는 것도 본 적이 없다
어둠이 소금처럼 짠 밤에
병이란 것과
병이 아닌 것을 아는 시간이 뜨겁게 피었다
의자를 의자에 앉힐 수 없어
풀과 나무들과
공기들의 땀 냄새를
마시고 녹이는 사이
그 바깥은
죽을 것처럼 맞춰진 시간들이
다시 죽을 것처럼 어긋나고 있었다
까치야
소용없단다
이 밤에 아무리 울어도
기쁜 일은 네 소관이 아니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