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근, 희미한 것들에 대하여
거울의 뒷면은 깜깜하고 어둠이다
쨍그랑 하고 깨어지는 것은 어둠 때문이다
어릴 때, 별을 보면
선명하게 빛나는 별들 옆에 희미한 별빛이 있었다
똑바로 쳐다보면 사라지는
그러나 다시 빛나는 눈 밖의 빛
내 사랑은 대체로 희미하였다
똑바로 쳐다보지 않았다
가물가물한 기억 속에 누군가가 있었을 뿐
너를 눈앞에 두고도 나는
눈 밖에서 부지런히 기억을 만들었다
선명한 것들은 나의 적이었다
선명한 것들은 끊임없이 나를 지웠고
나는 줄기차게 선명한 것들을 지웠다
희미한 사람들과 희미한 불빛 아래에서
희미하게 웃고 울었다
희미하게 집으로 돌아왔다
희미해지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날들이 흘러갔다
나, 이제 희미해졌다
내가 그러했듯 지금쯤 너의 사랑도 희미할 것이므로
너의 눈 밖에서 나는 희미하게 빛날 것이다
똑바로 쳐다보면 사라지는
그러나 분명히 있는, 저, 눈 밖의 빛
신현림, 바다를 보면 바다를 닮고
바다를 보면 바다를 닮고
나무를 보면 나무를 닮고
모두 자신이 바라보는 걸 닮아간다
멀어져서 아득하고 아름다운 너는
흰 셔츠처럼 펄럭이지
바람에 펄럭이는 것들을 보면
가슴이 아파서
내 눈 속의 새들이 아우성친다
너도 나를 그리워할까
분홍빛 부드러운 내 손이 다가와
돌려가는 추억의 영사기
이토록 함께 보낸 시간이 많았구나
사라진 시간 사라진 사람
바다를 보면 바다를 닮고
해를 보면 해를 닮고
너를 보면 쓸쓸한 바다를 닮는다
김하늘, 북극 나비
흰 발을 물에 담그면 많은 것들이 괜찮아져
우산을 숨기지 않아도 파래지는 시간
우리는 12시적인 것들을 사랑하자고 맹세했지
따듯한 고양이 똥, 한 스푼의 컵케이크, 파란 나비 같은 것들
너는 수요일이라고 했어
그런 날에는 부패한 소시지처럼 물속에 있자고
추위의 세계에 대해서만 생각하자고
지루할 정도로 쉬고 싶다고 속삭였어
몸을 말아서 동그란 게 아니라
동그랗기 때문에 온몸을 이렇게 말고 있는 거라며
다슬기처럼 아주 가끔씩 살아 있는 흉내를 냈지
나는 고요를 쬐며
막 두 번째 허물을 벗고 있었어
팟-르르르 팟-르르르
젖은 날개를 말리는 동안 한 쌍의 나비가 되는 우리
모든 게 침묵하는데도 진화하는 것들은
어떤 무심함을 인내하는 걸까
그런 생각으로 아무것도 껴안지 못하는 마음
물속에서 갓 건져낸 무릎
푸른 멍
우리는 없는데
시간은 자꾸만 북극으로 질주하고 있어
비로소 수면 위로 달이 차오르면
캄캄한 밤의 방해를 견딘 날갯짓, 나비의 온기, 비행
그런 것들이 정말 환영 같을 때가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