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승,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사람들은 사랑을 모른다
자기 마음대로 사랑하고
사랑한다고 말을 하다
너는 어찌되든지
나만 사랑하고
사랑한다고 말을 한다
너는 무엇을 원하는지
너는 무엇이 되고 싶은지
물어보지도 않는다
내 마음대로 네가 되는 것을
사랑이라고 말한다
사랑하다가 죽어야 하는데
너를 사랑하기 위해
내가 죽어야 하는 것이
사랑인 것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사랑하다가 죽어 버려라
당신들에게 난 지금 말해야겠다
사랑의 크기를 시험하는 당신은 사랑할 자격이없다
사랑하지 말거라
당신들은 흉터만 남길 뿐이다
그리고 사랑에 힘겨워 울고 웃는 자들이여
그렇게 사랑하다 죽어 버려라
도종환, 작아지는 것들을 위하여
작아지는 우리의 정신을 위하여
깊은 밤 가장 큰 소리로
너는 내게 온다
이기지 못한 것들 거대하게 남겨둔 체
바람벽 안 안온함 속에 숨어들어
어깨에 휴식과 온기를 묻히려 할 때
안개 속에서
벌판 끝에서 맥박 속에서
보도블럭 위에서 등불 밑에서
거침없는 소리로 너는 달려온다
잔혹한 문자들을 빼고 더하다
가느다란 손끝에 꽈리처럼 잡힌
물집을 터뜨리며
골목 골목 다니며 노래를 부르며
외롭다고 말하며 답답하다고 말하며
너는 우리의 이름을 찾는다
작아지는 것들을 위하여
작아지는 것들을 위하여
우리를 가볍게 무찌르던 적들이 모두
차광막을 내리고 평온하게 돌아간 밤
야광시계의 분침 사이를 전전하며
시간이 갈라 세우는 이분법을 무시하며
너는 노래로 살아서
비겁하지만
그러나 비겁하지 아니하기 위하여
그러나 비겁하지 아니하기 위하여
이성부, 봄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에도 너는 온다
어디 뻘밭 구석이거나
썩은 물 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
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판 하고
지쳐 나자빠져 있다가
다급한 사연 들고 달려간 바람이
흔들어 깨우면
눈부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
너를 보면 눈부셔
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다
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
나는 아무것도 미리 알릴 수가 없다
가까스로 두 팔을 벌려 껴안아보는
너, 먼 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심보선, 음력
내가 아주 슬펐을 때
나는 발 아래서 잿빛 자갈을 발견했었지
나는 그때 나의 이름을 어렵게 기억해냈어
나에게 말했지, 내일이면 괜찮아질 거야
내일은 음력으로 모든게 잊혀진 과거야
젊은 시절 어떤 여행길은
목적지가 있다기 보다
서쪽으로, 그저 서쪽으로 가는 길이었지
그때 나는 노래했지
어제까지 돌 위에 서 있던 사람이
오늘은 돌 아래 누워 있네
어제까지 돌 아래 누워 있던 사람이
오늘은 그 옆의 또 다른 돌이 되었네
내가 아주 슬펐을 때
나는 최대한 낮은 어조로
서쪽의 지평선을 읽었지
서쪽은 음력으로 어제의 동쪽이고
지평선은 하나의 완벽한 입체니까
나는 그 때 나의 이름을 영영 잊어버리고
미래에 펼쳐질 운명의 면적을
달 뒷면의 운석 자국처럼
느릿느릿 넓혀가고 있었던 거야
내가 아주 슬펐을 때
나는 발 아래서 잿빛 자갈을 발견했었지
그것은 음력으로
인간의 아물지 않은 흉터이고
그때 그대의 사랑스러운 이름은
지상에서 반쯤 지워진 채
화석같은 인광으로 푸르게 빛나고 있었던 거야
전윤호, 수몰지구
자꾸 네게 흐르는 마음을 깨닫고
서둘러 댐을 쌓았다
툭하면 담을 넘는 만용으로
피해주기 싫었다
막힌 난 수몰지구다
불기 없는 아궁이엔 물고기가 드나들고
젖은 책들은 수초가 된다
나는 그냥 오석처럼 가라앉아
네 생각에 잠기고 싶었다
하지만 예고 없이 태풍은 오고 소나기 내리고
흘러 넘치는 미련을 이기지 못 해
수문을 연다
콸콸 쏟아지는 물살에 수차가 돌고
나는 충전된다
인내심에 과부하가 걸리지 않기를
꽃 피는 너의 마당이
잠기지 않기를
전화기를 끄고 숨을 참는다
때를 놓친 사랑은 재난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