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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이 포 벤데타
게시물ID : lovestory_8058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medIUm
추천 : 3
조회수 : 667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6/12/28 10:3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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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영화'에 있는 리뷰 글 중 영화 <브이 포 벤데타>에 관한 리뷰 글을 퍼왔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매우 감명 받았던 리뷰 글이라 많은 분들과 공유하고 싶었거든요. 
많은 분들이 보셨고 뒷북일지도 모르겠네요^^;

어릴 땐 단순한 액션영화로 느껴졌던 이 영화가 우연히 이 글을 읽고 완전히 새로운 영화로 저에게 다가왔습니다.
많은 분들이 우리나라의 현재 모습과 같다고 느끼고, 근래에 다시 회자가 되는 이유겠지요. 
불교를 믿는 입장에서 이 영화를 불교적 가치와 연관지은 부분 또한 매우 인상적이었어요.
그랬던 것이 몇 년 전 일입니다. 
그런데 지금 다시 관심을 가지게 된건 이번 촛불집회를 겪은 후 다시 이 글이 또 한번 새롭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스포일러 주의] 
혹시 '브이 포 벤데타' 를 아직 보시지 않은 분이라면 한 번 보고 읽어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사실 읽고 영화를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거 같아요.


http://movie.naver.com/movie/bi/mi/reviewread.nhn?nid=250045&code=43208


<V for Vendetta>, 당신이 모크샤(Moksha)에 이르는 방법

워쇼스키 형제들의 영화가 언제나 그렇듯이, 이 영화는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여러가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언제나 워쇼스키 형제가 지니고 있었던 강점이었죠. (잠깐, 감독은 엄연히 제임스 맥티그라고요? 비록 그렇다 할 지라도 각본단계에서부터 10년 동안 이 만화를 영화화하려고 했던 워쇼스키 형제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죠.)

 

 

 

 

이 영화를, 혹자는 마거릿 대처시절에 대한 비판으로 읽을 것이고, 혹자는 이라크전쟁을 벌이는 미국정부에 대한 우화로 보기도 할 것 같습니다. 혹은 여기서 파시즘을, 나치즘을, 전체주의를, 조지 오웰의 <1984>을 보기도 하겠지요. 그러나 제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이 영화가 개인의 자각을 통한 완전한 자유에 이르는 길을 말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최근 개봉한 영화들 중에, 이토록 개인의 자각에 대해 이야기하는 영화가 있던가요?

 

워쇼스키 형제는 <매트릭스>에 이어 이번 영화에서도 개인의 자각에 대해 강조합니다. 더구나, 이번 영화에서는 보다 더 진일보한 성숙한 시각으로 각성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 집중하며 보았던 제 감상이나 이야기해볼까요. 영화와 파시즘, 대처리즘의 연관성에 대한 이야기는 다른 분들의 리뷰로도 충분히 들으실 수 있을테니까요.
개인적으로, 이 영화를 그저 "파시즘에 대한 우화"정도로만 받아들이는 분들이 많아 안타까웠습니다. 제 이야기를 읽고도 찬성하는 분들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작은 바램을 담아봅니다.

 


이 영화의 주제가 진부하게 느껴질만큼, 우리는 모두 전체주의의 위험성에 대해 "충분히"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득 궁금해지네요.

 

 


우리는 이렇게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미국이 이라크를 공격하고 애국법을 통과시키는 것을 두 눈으로 빤히 보고 있었던걸까요?  막을 방법은 없었던 걸까요? 왜 언론은 우리가 꼭 알아야 할 사실에 대해서 여전히 침묵하고 있습니까?  왜 개발도상국은 물론이고 비교적 정치선진국이라 여기는 서구사회도 종종 광기에 사로잡히는 걸까요?  멀게만 느낄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도 역시, 인터넷 종량제를 실시하겠다고 외치는 정부 아래서 살고 있으니까 말이죠.(그러보니 이 영화에서 일기장까지 검열하며 "국가에 위험한 사상이 들어있는 불순한 물건"이라고 외치는 아담 셔틀러를 봤을 때, 저작권법을 무기로 "블로그까지 검열하겠다"던 우리나라 정부가 생각나서 실소했습니다.)
<

 

 

우리는 어느 세대, 어느 인류도 일찌기 이뤄내지 못했던 광대한 아고라를 네트의 세계 속에 실현시키지 않았던가요? 원하기만 하면 모든 정보를 얻을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왜 이런 공공연한 압제가 일어나고 있는 걸까요?

그리고 권력을 통한 이 모든 압제가 너무 빈번히 일어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아직도 세상은 뒤바뀌지 않았는가요?

 

V가 방송국을 장악하고 자신의 메시지를 공중파에 처음 송출했을 때를 떠올려봅니다.

그 때 V는 분명히 그 이유에 대해 말했었지요.

 

"이렇게 된 가장 큰 책임은 물론, 국가가 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국가로 하여금 반드시 죄의 댓가를 치르게 할 작정입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게 된 원인은, 

 거기 앉아 있는 여러분 때문이지요.

 

바로 여러분이 방임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말하는 "당신"이, 2040년의 영국대중을 지칭하고 있는 것만이 아님은 자명합니다. V는 이 장면을 통해, 극장에 앉아서 팝콘을 먹고 있는 관객들에게 직접적으로 질문하지요.

 

세상이 이 지경이 되도록, 당신은 거기 앉아서 무엇을 하고 있는거지?

 

매우 신선한 질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사소한 소비영화가, 관객들을 대화 상대로 여기고 있기 때문이죠.
자본주의 사회는 대중들을 항상 [우매한 다수]로 저평가하면서도 그 대중을 상대로 세일즈에 나설 때는 대중의 기호와 선택에 대해 추호의 의문도 던지지 않습니다. 그럼요, 고객은 항상 옳구말구요. 하물며 고객이 지난날 내린 선택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은 것은 당치도 않습니다. 그런데, 이 헐리우드 소비영화는, 이런 낡은 틀 대신에 대중에게 새로운 질문을 던진 거지요. 왜 상황이 이 지경이 되도록 방관하고 있느냐고.

 

 

물론 우리도 항변할 말은 있습니다.

상황을 주도적으로 선택하고 그에 따르는 책임을 지기 위해서는 대상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고 있어야 하잖아요. 그리고, 책임을 지겠다는 기꺼운 마음, 즉 대상에 대한 사랑이 있어야 하지요.

책임을 진다는 것은 매우 두려운 일입니다.
V가 "아마도 여러분은 필시, 두려웠던 것이겠지요"라고 말했듯이요. 다분히, 상황을 직시하고 책임을 지는 것이 두려워서 방관했던 우리를 아프게 꼬집으며. 이 말을 아니라고 부정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그러나, 그 개인이 두려움을 제거하고 명확한 신념을 갖게 될 때, 개개인은 초인으로 거듭납니다. 그리고 한 명 한 명이 이런 의지를 지닐 때, 이 사회는  그야말로 안으로부터의 혁명을 겪게 되는거지요.

 

 

 

개인의 각성이라는 주제는 워쇼스키 형제의 대표작 <매트릭스>에서도 나왔던 문제해결 방식입니다. 제가 워쇼스키 형제의 작품을 볼 때마다 불교적인 해석을 자꾸 가하는 것 같아 미안하지만, 불교철학에 심취한 제게 있어서는 이만큼 불교사상을 제대로 그리고 있는 영화를 모른척 하기도 힘든 일입니다.


니체가 "신은 없다"고 선언하기도 전에 이미 기원전 5세기에 석가모니는, 이렇게 말한 바 있습니다. 


스스로를 구원하라
다른 누가 구원해주기를 기다리지 말고. 
바르게 보고, 
인과관계를 명확하게 깨닫고, 
바른 행위를 통해 이웃에게 유익한 일을 하고, 
개인의 앎을 실천하고, 

그럼으로써 당신 스스로를, 
당신이 처해있는 나쁜 상황에서 구제해 내라.
진흙탕 속에 빠져있는 코끼리가 진창을 벗어나듯이.

 

 

두려움을 벗어나면, 그동안 두려워했던 것들이 실은 허구라는 사실도 깨닫게 됩니다. 두려움은 실체가 없으니까요. 두려움은 마치 감옥 복도 끝에 서 있는 마네킨 인형과도 같습니다.

 

"개인의 변혁"이 해답이라는 말은 여전히 진부하거나 너무 순진한 이야기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혹은 이 영화가 또다른 파시즘을 강요한다고, 감독이 관객에게 자신들의 생각을 주입하려는 시도가 너무 거창하다고 여기는 분도 물론 계시겠죠.

 

그러나 이 영화는, 두 가지 미덕을 지님으로써 뻔한 프로파간다 수준으로 전락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고 저는 봅니다.

 

첫번째 미덕은, -제가 이 영화를 불교철학적으로 볼 수 있는 준거틀을 마련해주기도 하는데- 이 영화가 "인과율"을 알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 영화의 주인공인 V로 말하자면, 그는 그 자신이 말하듯 "우연이란 없다"고 생각하는 인과론자입니다.

그의 말대로, "작용이 있으면 반작용이 있는 법"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자신이 저질렀던 과거의 행위 때문에 댓가를 받는 "인과율의 법칙" 앞에는 V 또한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V는 체제를 전복하기 위해 혹은 누군가가 과거에 저질렀던 행위를 처벌하기 위해 행동하지만, 동시에 그 복수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지 역시 잘 알고 있습니다. 원인의 결과로서 복수를 행한 V로서는, 그 피의 연쇄(Vendetta)가 다시 자신에게 돌아오리라는 것 역시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죽음 앞에 저항하지 않지요.

대신, 자신의 손은 피로 더럽히되 이비-로 대변되는 새 세대에게는-에게는 순결한 새 세상을 넘겨주려 합니다.

 

 
"Evey, I Can"t."

 

 

인과율을 다른 말로 하자면 운명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는데, 이것은 영화 전반에 걸쳐 꾸준히 나오는 키워드이기도 합니다.(V가 크리디 당수를 협박할 때 흐르던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은 5(V)번 교향곡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인과율"을 상징한다고도 봅니다.)

 

즉, 우리 모두가 커다란 연관선상에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키워드가 되는 셈입니다.

 

영화 초반부에는 브이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가이 포크스의 모습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마치 이비의 모습을 보는 듯한 젊은 여인이 가이 포크스를 보며 비통한 눈물을 흘리지요. 군중 가운데 그녀만이 가이 포크스를 진정 사랑하고 염려하는 것 같습니다. 마치 전생 이야기처럼 보이기까지 하는 이 장면은, 브이가 가이 포크스의 가면을 쓰면서 현재 시점으로 이어집니다.

 

브이는, 다섯명의 지배자가 피지배자들을 실험했기 때문에 태어났습니다.
또한 브이는, 국가가 국민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에 태어난 거지요.
혹은 브이는, 가이 포크스가 사형 당했기 때문에 태어났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브이는 옆 감방의 누군가가 개화시킨 존재이며, 국민이 동조했기에 실현될 수 있었던 어떤 이념이자, 이비가 기억하기에 우리 모두가 알게 될 수 있었던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현재 일어나는 일은 모두 과거와 연관이 있다"는 말은, 단순한 작용-반작용을 벗어나 사람과 사람사이를 잇는 인연의 고리가 되지요.

 

엄정한 눈으로 이를 통찰할 줄 아는 사람은, 인연의 사슬과 이 세계의 법칙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됩니다.

핀치 형사가 어느날 밤, 홀연히 앞으로 무슨 일들이 벌어질지를 깨닫게 된 것도 마찬가지의 이치입니다. 핀치 형사가 "V가 원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로군. 이 모든건 하나로 연결돼있어"라고 말할 때, 도미닉이 "어떻게 그런걸 알 수 있지요?"라고 물었더랬습니다. 그때의 핀치 형사 대답은 이랬지요:
"안게 아닐세. 그냥 느낀거지."

 

그리고, 이 모든 인연의 그물 중심에는 사랑이 있습니다.

 

이 영화가 뻔한 프로파간다로 타락하지 않을 수 있었던 두번째는, 바로 이 영화의 중심에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비와 로저간의 우정, 발레리와 루스의 사랑, 이비의 부모가 이비에게 보여줬던 사랑, 더 나은 세상을 다음세대에 물려주고자 하는 사랑……그리고 물론, 이비와 V의 사랑.

 

발레리가 <비록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몰라도, 당신을 만난적도, 함께 웃은 적도, 운 적도, 입맞춘 적도 없다해도,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한 그런 류의 사랑 말이지요.

애초에 "오락영화"인줄 알고 보러갔던 수많은 여성관객들이 이 영화를 보고나서 "로맨틱하다"고 평가한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해요. V라는 인물로 대변되는 사랑에 대한 예찬을 은연중에 느낀 거겠지요.

 

사람의 본질적인 부분에 호소하는 이러한 "사랑"은, 더 나아가 비폭력저항과 연결되며 "정치적 의미"를 갖게 됩니다.

 

사족입니다만, 대중들이 거리로 뛰어나가 군대를 넘어서서 국회의사당으로 향하는 장면에서, 대부분의 관객들은 큰 불만을 느낀 모양이더군요.
군중이 충돌하며 폭력이 난무하는 "스팩타클"이 없었기 때문이지요. 많은 사람들이, "나는 군인들이 군중에게 발포하는 장면이 이제나 저제나 나오기를 기다렸다"고 말하거나 "저들은 혁명을 쟁취한게 아니다. 그저 V가 권력부를 처치하는 동안 무임승차한 것이다"라고 불만을 쏟아냈습니다.


영화를 보는 사람들이 얼마나 폭력에 익숙하며, 폭력을 "소비"하는 일에 익숙한지 보여주는 반응이겠지요. 

한편 우리는, 스크린 위를 벗어나 관객에게까지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던 영화제작자들에 의해, 영화속 세상이 어떻게 변화를 이끌어내게 되는지 주목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개개인의 각성과 변혁을 겪은-즉, 소파에서 일어나 행동하는 주체가 된-민중들은 그 자체로 거대한 힘을 발휘합니다. 그들은 폭력을 일으키지 않고도 세상을 전복했습니다. 비록 무장한 군대라 하더라도, 그 군대에 힘을 부여한 것은 바로 국민이며, 국민이 더 이상 그들에게 힘을 부여하기를 거부할 때, 권력은 힘을 잃고만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이지요.

 

이들이 비폭력으로 혁명을 쟁취해야만 하는 커다란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작용과 반작용의 힘" 즉, 인과율 때문입니다.영화는 V가 도미노를 무너뜨리는 장면에서, 영국 국민들이 시위대에 진압되던 실제 뉴스영상들을 교차편집 해 보여주며 폭력적 시위가 폭력적 대응을 불러오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마치, 폭력으로 쟁취한 힘은 또다른 폭력으로 무너지게 됨을 방증하는 것처럼 다가오더군요. 이는 쿠테타로 성취한 사회개혁이 독재로 부패되버리는 이유일수도, 혹은 더 큰 압제로 무너지게 되는 이유일수도 있겠지요.

 

개인의 각성과 정당한 방법을 통해 사회 변화를 성취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워쇼스키 형제들이 원작의 결말을 바꿔가면서까지 말하고자 했던 사회변혁방식이 아닐까요.
(원작에서는 이비가 V의 가면을 물려받아 새로운 테러리스트가 됩니다.)

 

누군가가 말했었죠. 공산주의가 멸망한 이유는 사랑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냉전시대에 탄생한 원작을 21세기에 스크린으로 옮기며 제시한 새로운 화두는 "사랑"과 "자비"일 겁니다.

 

그리고, 영화는 당신에게 말합니다.

 

 

 

기억하라
기억하라
그리고
일어나서 행동하라.

 

당신에게는 아직도 이 영화가 그저 봄 밤의 짧은 꿈에 불과합니까?

출처 http://movie.naver.com/movie/bi/mi/reviewread.nhn?nid=250045&code=43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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