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현림, 경희궁 연애시
당신의 몸이 얼었군요
이리 오세요 함께 따뜻한 돌계단에 앉아요
쌀알 같은 봄볕을 받으며 몸을 녹여요
우리에게 남은 봄날은 얼마일까요
이렇게 환한 날이면 가슴이 아팠는데
이젠 아프지 않아요
내일이란 없으니 고마워만 할래요
천천히 경희궁길을 걸으니
나라 잃어 이리저리 떠도는 설움 같다 할까요
그런 무력감, 절망감이 씻겨지네요
정말 뭐든 잘 될 거란 막연한 기대는 위험해요
바다에 가고프면 바로 가고
친구 만나고프면 바로 만나고
당신 보고프면 바로 말하고
기를 모아 더는 머뭇거리지 않으니
길에 고운 쌀이 환히 쌓여갑니다
이상, 이런 시(詩)
유하, 나도 네 이름을 간절히 부른적이 있다
간교한 여우도
피를 빠는 흡혈박쥐도
치명적인 독을 가진 뱀도
자기의 애틋함을 전하려 애쓰는
누군가가 있다
그들이 누군가에게 애틋함을 갖는 순간
간교함은 더욱 간교해지고
피는 더욱 진한 피냄새를 풍기며
독은 더욱 독한 독기를 품는다
나도 네 이름을 간절히 부른 적이 있다
돌이켜보면, 결국
내가 내게 깊이 취했던 시간이었다
기형도, 가수는 입을 다무네
걸어가면서도 나는 기억할 수 있네
그때 나의 노래 죄다 비극이었으나
단순한 여자들은 나를 둘러쌌네
행복한 난투극들은 모두 어디로 갔나
어리석었던 청춘을, 나는 욕하지 않으리
흰 김이 피어오르는 골목에 떠밀려
그는 갑자기 가랑비와 인파 속에 뒤섞인다
그러나 그는 다른 사람들과 전혀 구별되지 않는다
모든 세월이 떠돌이를 법으로 몰아냈으니
너무 많은 거리가 내 마음을 운반했구나
그는 천천히 얇고 검은 입술을 다문다
가랑비는 조금씩 그의 머리카락을 적신다
한마디로 입구 없는 삶이었지만
모든 것을 취소하고 싶었던 시절도 아득했다
나를 괴롭힐 장면이 아직도 남아있을까
모퉁이에서 그는 외투 깃을 만지작거린다
누군가 나의 고백을 들어주었으면 좋으련만
그가 누구든 엄청난 추억을 나는 지불하리라
그는 걸음을 멈춘다, 어느새 다 젖었다
언제부턴가 내 얼굴은 까닭없이 눈을 찌푸리고
내 마음은 고통에게서 조용히 버림받았으니
여보게, 삶은 떠돌이들을 한군데 쓸어담지 않는다, 그는
무슨 영화의 주제가처럼 가족도 없이 흘러온 것이다
그의 입술은 마른 가랑잎, 모든 깨달음은 뒤늦은 것이니
따라가보면 축축한 등뒤로 이런 웅얼거림도 들린다
어떠한 날씨도 이 거리를 바꾸지 못하리
검은 외투를 입은 중년 사내 혼자
가랑비와 인파 속을 걷고 있네
너무 먼 거리여서 표정은 알 수 없으나
강조된 것은 사내도 가랑비도 아니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