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호, 령(零)
시간들이 네 얼굴을 하고 눈앞을 스치는
뜬 눈의 밤
매우 아름다운 한자를 보았다
영원이라는 말을 헤아리려 옥편을 뒤적대다가
조용히 오는 비 령(零)
마침 너는 내 맘에 조용히 내리고 있었으므로
령, 령, 나의 零
나는 네 이름을 안았다 앓았다
비에 씻긴 사물들 본색 환하고
넌 먹구름 없이 날 적셔
한 꺼풀 녹아내리는 영혼의 더께
마음속 측우기의 눈금은 불구의 꿈을 가리키고
零, 무엇도 약정하지 않는 구름으로
형식이면서 내용인 령, 나의 령, 내
영하(零下)
때마침 너는 내 마음속에 오고 있었기에
그리움은 그리움이 고독은 고독이
사랑은 사랑이 못내 목말라 한생이 부족하다
환상은 환상에, 진실은 진실에 조갈증이 들었다
령, 조용히 오는 비
밤새 글을 쓴다
삶과의 연애는 영영 미끈거려도
박연준, 푸른 멍이 흰 잠이 되기까지
날이 무디어진 칼
등이 굽은 파초라고 생각한다
지나갔다
무언가 거대한, 파도가 지나갔나
솜털 하나하나 흰 숲이 되었다
문장을 끝내면 마침표를 찍고 싶은 욕구처럼
생각의 끝엔 항상 당신이 찍힌다
나는 그냥 태연하고
태연한 척도 한다
살과 살이 분리되어 딴 길 가는 시간
우리는 플라나리아처럼 이별한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매 순간
흰 숲이 피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