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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하루 보내고 계신가요?
오늘 스님은 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 주관으로 부산 부경대학교에서 열린 ‘2016 출가콘서트’에 출연했습니다. 지난 상반기에 이어 올해 2번째였는데요. ‘행복의 길을 찾아서’란 주제로 청년들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스님은 즉문즉설에 앞서 ‘출가란 무엇을 뜻하는가’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할 권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저마다 다 행복하게 살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실제의 삶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행복하고 싶지만 현실은 행복하지 않고, 행복할 권리가 있다고 하지만 그 권리를 행사하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각자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행복하지 않다고 하는 사람에게 제가 ‘무엇이 문제인가요?’ 라고 물어봅니다. 그러면 ‘아이가 말을 안 들어서 괴로워요’, ‘남편이 매일 술 마셔서 남편 때문에 괴로워요’, ‘직장 상사가 매일 화를 내서 괴로워요’ 이런 이유들을 대답합니다. 이렇게 자기의 괴로움을 모두 남 탓이라고 해요. 이럴 때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아이가 내 말을 잘 들어야 하고, 남편이 술을 안 마셔야 하고, 직장 상사가 화를 안 내야 합니다. 이 말은 내가 원하는 대로 되어야 행복하다는 뜻이지요?”
“네!” (청중 다함께)
“그런데 이 세상은 내가 원하는 대로 다 될까요? 만약 원하는 대로 되어야 행복하다면, 원하는 대로 되지 않으면 필연적으로 괴로울 수밖에 없겠지요. 그래서 원하는 대로 될 때는 즐거웠다가 또 원하는 대로 안 될 때는 괴로웠다가 합니다. 즉, 즐거움과 괴로움 사이를 왔다 갔다 반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윤회(輪廻)’라고 합니다.
죽어서 욕심이 많으면 돼지로 태어나고, 미련하면 소로 태어나고, 독한 마음을 먹으면 독사로 태어나는 것을 윤회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욕구가 충족될 때 즐거워하고, 충족되지 않을 때 괴로워하는, 이 고와 락 둘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것을 윤회라고 하는 겁니다.
욕구를 따라가면 반드시 과보(果報)가 생깁니다. 반면 욕구를 억제하면 스트레스가 쌓여요. 예를 들어, 화가 난다고 화를 내버리면 주변 사람이 나를 떠나는 등 그에 따른 과보가 생깁니다. 그렇다고 화를 안 내겠다고 참으면 이번에는 내가 스트레스 받아요. 그러니 이래도 문제, 저래도 문제입니다.
대개 우선 성질대로 했다가, 그래서 미움을 받게 되면 그 다음에는 참는 방향으로 갑니다. 그런데 참는다고 해봐야 두 번밖에 못 참고 세 번째에는 터집니다. ‘이게 보자, 보자 하니까’ 하면서 터지거나, ‘이게 한두 번도 아니고!’ 하면서 터지고 맙니다. (청중 웃음)
그래서 세 번을 잘 못 넘겨요. 마음먹은 일도 3일을 잘 못 넘긴다고 해서 ‘작심삼일’이라는 말도 있잖아요. 그렇게 두 번 참았다가 세 번째 못 참고 터뜨리고 나면 그 부작용이 크니까 ‘다시는 안 해야지’ 하고 후회하고 다짐합니다. 그 다짐으로 참다가 또 언젠가는 터뜨리고 후회하고, 터뜨리고 후회하고를 되풀이 하게 됩니다.
그러니 어떤 욕구가 일어날 때에는 따라가거나 참는 것이 아니라 다만 ‘알아차릴 뿐’이어야 해요. ‘아, 지금 나에게 이런 욕구가 일어나는 구나’ 하고 그 욕구를 알아차리면, 거기에 끌려가지도 않고 ,억제하지도 않게 됩니다. 예를 들어,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 담배를 피우고 싶은 욕구가 일어날 때 다만 알아차리면, 욕구대로 피우는 것도 아니고, ‘안 피워야지’ 하고 욕구를 참지도 않게 됩니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욕구와 마주치면 대개 따라가든지 참든지, 두 가지의 길 밖에 생각하지 못합니다. 가령 명상을 하다가 다리가 아프면 다리를 펴든지 참든지 둘 중 하나를 해요. 그런데 ‘알아차림’이라는 것은 그렇게 다리에 통증이 생길 때 ‘다리에 통증이 있구나’하고 통증을 느끼고 알아차리는 거예요. 통증이 싫다고 다리를 펴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통증을 억제하지도 않는 거예요. 물론 현실에서는 잘 안 됩니다. 그래서 연습이 필요한 거예요.
이렇게 욕구에 끌려가지도 않고 욕구를 참지도 않는 제 3의 길이 ‘중도(中道)’입니다. 욕구를 따라가는 쾌락주의도 아니고, 욕구를 억제하는 고행주의도 아닌, 이 새로운 길이 부처님께서 발견하신 ‘중도’예요.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시고 제자들에게 하신 첫 번째 말씀도 ‘수행자는 쾌락의 길을 가도 안 되고, 고행의 길을 가도 안 된다. 양 극단을 버리고 중도의 길을 가라’ 였습니다. 이런 중도의 길은 즐거움과 괴로움을 윤회하지 않는 지속가능한 행복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일상생활에서 기분이 좋을 때 마음이 들뜨나요, 가라앉나요?”
“들떠요.”(청중)
“화가 나도 마음이 들뜹니다. 기분이 좋을 때나 화가 날 때가 사실은 같은 거예요. 둘 다 마음이 들뜬 상태입니다. 그래서 그 둘이 계속 되풀이 되는 거예요. 반면 알아차림은 마음이 고요한 상태입니다. 좋다고 들뜨지도 않고, 싫다고 가라앉지도 않는 상태예요.
그런데 대개 그런 경지를 체험하지 못한 채, 기분이 좋아서 들뜨는 것을 행복한 상태라고 생각하고 그 상태가 계속 되었으면 좋겠다고 바라는데 그런 상태는 계속 유지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대로 되면 행복한 것이다’라는 가치관을 갖고 있는 한, 우리는 영원히 행복해질 수 없습니다. 그저 고(苦)와 락(樂)이 되풀이 될 뿐입니다.
그래서 가치관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이 가치관의 전환을 다른 말로 출가(出家)라고 할 수 있어요. 지금까지 살아온 집의 가치관, 즉 고와 락 중, 락만을 바라는 가치관을 버리는 것입니다. 락만 갖기를 바라지만 락에는 필연적으로 고가 따릅니다. 그래서 괴로울 때는 집을 나갔다가 또다시 편안함을 그리워하면서 집으로 들어오고, 그렇게 나갔다가 들어오고를 반복합니다. 이런 건 가출이라고 해요. (청중 웃음)
‘고와 락의 되풀이’를 불살라 버리는 것, 그런 기존의 가치관을 집이라고 대변하여 ‘집을 불살라 버리는 것’을 ‘집을 떠난다, 출가했다’라고 표현합니다. 여기 계신 분들이 절에 들어와도 스님이 볼 때에는 열에 아홉은 출가가 아니라 가출을 하는 것 같아요. (청중 웃음) 집이 싫어서 나왔다가 절에서 살기 힘들어지면 다시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렇게 돌아갔는데 귀찮아서 못 살겠으면 다시 나옵니다. 이렇게 나왔다 들어갔다가 하는, 이런 오고 감은 ‘가출’입니다.
여러분들은 괴롭다고 할 때 대개 ‘무엇 때문에 괴롭다’라고 말하는데, 그 가치관을 붙들고 있는 한 지속가능한 행복에 도달할 수는 없습니다. 탓을 하기 시작하면 여름에는 더워서, 겨울에는 추워서, 봄에는 알레르기가 있는데 꽃이 펴서 괴롭다는 등 날씨부터 온갖 것을 다 탓하고 살게 됩니다. (청중 웃음)
그런데 관점이 탁 바뀌면 여름에는 수영을 할 수 있어서 좋고, 겨울에는 스키를 탈 수 있어서 좋고, 봄에는 꽃구경을 해서 좋고, 가을에는 단풍 구경을 할 수 있어서 좋다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날씨에 따라 내 마음이 좌지우지 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조건에 긍정적으로 대응을 하게 됩니다. 즉, 욕구에 따라 마음이 흔들리지 않으니 훨씬 더 자유롭고 행복해지는 거예요.
그런 삶으로 나아가는 것이 출가이지, 꼭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는 것만이 출가가 아닙니다. 자기의 기존 가치관으로부터 벗어나서 자유의 길로 나아간다면 출가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런데 현실적으로 아무래도 세속에서 살면 자꾸 옆 사람과 비교해서 시류를 따라가기 때문에 이렇게 되기가 어려워요. 그래서 초심자일수록 세속으로부터 일정 기간 격리가 필요합니다. 그렇지만 어느 정도 자유로워진 다음에는 세간(世間)과 출세간(出世間)을 나눌 필요가 없어집니다. 어디에 있어도 늘 알아차림을 유지하기 때문입니다.”
행복과 출가에 대한 강연에 이어 즉문즉설 시간을 가졌습니다. 전국비구니회 사서실장 진명 스님의 사회로 진행되었습니다.
진명 스님은 “사전에 인터넷으로 신청 받은 질문들이 많다”고 소개하면서 가장 많이 나온 질문 하나를 스님에게 물었습니다. 출가콘서트여서 그런지 가장 많이 나온 질문도 “법륜 스님은 왜 출가하셨나요?” 였습니다.
“법륜 스님은 왜 출가를 하셨나요? 출가하실 때 주변 사람들의 반대는 없었나요?”
“저는 원래 과학자가 되는 게 꿈이였어요. 그런데 고등학교 1학년 때였어요. 현재 저의 스승님이 되시는 불심 도문 스님께서 저를 부르셨어요. 이 분은 한 번 이야기를 시작하시면 3~5시간씩 말씀을 하신단 말이죠.
마침 다음 날 시험이 있었는데, 그 날은 스님께 붙잡히면 큰일이라고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스님께서 부르시자마자, 제가 ‘스님, 저 오늘 바쁩니다’ 라고 말씀드렸어요. 그랬더니 스님께서 ‘어, 그래?’ 하시더니 ‘너 어디서 왔어?’하고 되물으셨어요. 그래서 ‘학교에서 왔습니다’ 라고 대답했더니 ‘그 전에는?’ 하고 또 물으셨어요. 그렇게 ‘그 전에는?’ 하는 문답을 계속 주고받다가 결국 제 대답이 ‘어머니 뱃속에서 나왔겠죠’ 까지 갔습니다. 그런데 스님께서 다시 ‘그 전에는?’ 하고 물으셨어요. 그래서 제가 ‘그걸 제가 어떻게 압니까?’ 하고 대답지요.
그랬더니 스님께서 이번에는 ‘너 지금 어디 갈거니?’ 하고 물으셨어요. 그래서 ‘도서관이요’ 하고 대답하니 ‘그 후에는?’, ‘학교요’, ‘그 후에는?’, ‘집이요’ 이렇게 ‘그 후에는?’ 하는 문답을 계속 주고받다가 결국 제 대답이 ‘그 후에는 죽겠죠’ 까지 갔습니다. 이번에도 스님께서 ‘그 후에는?’ 하고 한 번 더 물으셨어요. 그래서 제가 ‘몰라요’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랬더니 스님께서 갑자기 ‘야 이놈아,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놈이 바쁘기는 왜 바빠’ 라고 벽력같이 고함을 치셨어요.
요점은 이렇습니다. 스님께서 부르시자마자 제가 바쁘다는 말씀부터 드렸잖아요. 바쁘다고 하면 적어도 어디로 갈지는 알고 바빠야 하는데 스님께서 질문 몇 개를 던지고 나니 제 대답이 어디에서 왔는지도 모르고, 또 결국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다고 나온 거예요. 그러니까 스님께서는 어디에서 왔는지도 또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사람이 바쁘기는 왜 바쁘냐는 말씀을 하신 거예요. 논리적으로 생각하면 이치에 맞는 말씀이지요? 그래서 저한테도 이 질문이 남게 되었어요.
분명히 내 입으로 바쁘다고 했는데, 왜 바쁜지 물어보니 또 내 입으로 모른다고 했어요. 그래서 스님께 ‘그걸 아는 사람이 있습니까?’ 하고 여쭈었더니 도리어 ‘어떻게 그걸 모르고 살아가느냐?’ 라고 하세요. 그래서 ‘어떻게 하면 알 수 있습니까?’ 했더니 ‘절에 들어와’ 라고 하셔서 절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청중 웃음) 이 일이 하나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또 하나는, 어느 날 저희 어머니께서 제가 절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절로 찾아오셨어요. 오셔서 스님께 울고불고 항의를 하신 거예요. 어머니 말씀은 고등학교라도 졸업을 하면 그때 데려가시지 어쩜 이렇게 어린 아이를 데려가느냐는 요지였어요. 그랬더니 스님께서 그러셨어요.
‘보살님!’
‘네’
‘이 아이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알아요?’
‘아니요.’
‘저는 알아요. 그러면 아는 사람이 아이를 지도해야겠어요, 모르는 사람이 지도해야겠어요?’
‘아이고, 그야 아는 사람이 지도해야죠.’이렇게 어머니께서는 스님께 일단 기가 꺾이셨어요. 그런데 어머니도 궁금하실 거잖아요? 그래서 어머니께서 ‘얘가 어떻게 되는데요?’ 하고 물으셨어요. 그랬더니 스님께서 ‘이 아이는 단명해요’ 라고 딱 한 마디만 하셨어요. 단명(短命)한다는 말은 일찍 죽는다는 말입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어머니는 너무 놀라서 ‘아이고, 그럼 스님 아들 하세요’ 하고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저는 집안 문제가 이렇게 잘 정리되었습니다. (청중 웃음)
저는 도를 이루겠다고 출가를 한 것도 아니고, 대학을 가려고 출가한 것도 아니고, 실연을 당해서 절에 들어온 것도 아니고, 돈을 벌려고 들어온 것도 아니었어요. 인생이 궁금해서 들어왔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어머니와의 정을 끊게 된 게 계기가 되었어요.
그러다보니 절에 들어와도 신통력(神通力) 같은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어요. 오히려 신비한 것은 왜 우리가 심리적으로 신비하다고 느끼는 것일까 탐구를 해봤어요. 그리고 결국 신비하다는 생각은 우리가 어떤 현상에 대해 왜 일어나는지 원인을 모를 때 일어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예를 들어, 비행기가 날아가는 것은 신기해하지 않는데 앉아있는 사람이 갑자기 뜨는 것은 신기해하잖아요?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원리를 모르기 때문이에요. 인간에게 두려움은 왜 생길까요? 마찬가지로 원리를 모르기 때문에 생겨납니다. 즉, 무지(無智)때문에 생겨나는 거예요.
이렇게 탐구하는 자세로 부처님의 일생이나 부처님의 법문을 공부하면, 붓다야말로 모든 것에 대한 탐구자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처음에는 조금 억지로 출가한 면이 없지 않은데 시간이 갈수록 적성에 맞았어요.(청중 웃음)
경전을 읽어도 ‘어떤 사람이 붓다에게 이러한 질문을 했는데, 그 사람은 과연 어떠한 사회적 배경과 상황 속에서 어떤 고뇌로 이런 질문을 했고, 또 부처님께서는 그것을 어떻게 깨우쳐 주셨는가’ 하고 잘 살펴보면 바로 질문하는 사람이 뭔가에 대해 사로잡힌 상태로부터 부처님은 깨우쳐주신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부처님께서는 어떠한 경우에도 질문하는 사람에게 끌려 다니지 않으세요. 화제를 탁 바꾸어서 마치 늪에 빠진 사람을 구하듯이 사로잡힘에 빠진 사람을 거기로부터 꺼내어주십니다. 그러니 공부하다보면 부처님의 이야기가 과학보다 더 재미있어요. 물론 지식을 쌓는 것과는 성격이 다르지만, 이야기를 따라 가다보면 논리적으로도 잘 맞아 떨어져요. 이렇게 공부하는데 재미를 붙여나갔습니다.”
다음은 청중석에서 질문을 받아보았습니다. 많은 분들이 손을 들고 질문을 했는데요. 그 중 한 청년은 출가를 하면 주위 가족의 반대가 심할 것 같다는 걱정을 내비쳤습니다.
“출가를 하면 주위 사람들이나 가족들이 반대를 많이 할 것 같아요. 주위의 인연을 다 끊어야 출가를 할 수 있나요?”
“스스로 봤을 때 주변 사람에 대한 집착이 있다면 끊어야 합니다. 그런데 집착이 없다면 끊을 게 없잖아요? 만약 절에 들어왔는데 부모님이 찾으러 와서 난리를 피우면, 대개 도망을 가거나 저항을 합니다. 그런데 저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부모가 멱살을 잡고 끌고 가면 그냥 따라가면 됩니다. 그리고 따라가다가 부모님 손에 힘이 좀 빠진다 싶으면 다시 돌아오면 돼요.(청중 웃음)
끌고 가고 싶은 부모의 마음을 이해하니까 끌고 가면 그냥 따라 가다가, 나는 또 내 길을 가야 되니까 부모님 손에 힘이 빠지면 다시 돌아오면 되고, 또 돌아와서 끌고 가면 또 따라 가다고 또 돌아와서 지내면 돼요. 그걸 가지고 부모님과 싸울 게 뭐가 있을까 싶어요.
이렇게 자기중심이 잡히면 굳이 주변 사람들과 갈등을 일으킬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대개 자기중심이 없기 때문에 안 가려고 저항하거나 부모에게 붙잡혀서 끌려가는 일이 생깁니다. 앞에서도 욕구에 끌려가는 것과 저항하는 것 모두 욕구에 대해 치우친 반응이라고 말씀드렸듯이, 이 경우에도 부모의 손에 끌려가는 것과 저항하는 것 모두 양극단에 치우친 반응입니다.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듯이, 끌고 가려고 하면 조금 따라가다가 다시 돌아오면 됩니다. 그러면 부모님이 찾아오시면 인사드리고, 이야기도 나누고, 행여 끌고 가시면 조금 따라가다가 오고 그렇게 서너 번만 하고 나면 부모님도 어쩔 수가 없어요. 가자고 하면 ‘네’ 하고 안 가면 돼요. ‘이제 집에 올 거지?’ 하면 ‘네’ 하고 안 가면 돼요.(청중 웃음)
만약 부모님이 시키는 대로 하면 나는 부모의 노예가 되고, 부모님께 ‘그런 말 하지 마세요’라고 하면 어른 말씀에 저항을 하게 되니 불효가 됩니다. 부모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는 그 마음은 충분히 이해가 되잖아요? 그러니 그 마음을 알겠다는 의미로 ‘알겠습니다’ 라고 말씀드리고 나는 또 자유인으로서 내 갈 길을 가면 됩니다. 이렇게 자기중심을 잡고 대응을 하면 괜찮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스님의 명쾌한 답변에 모두가 한바탕 큰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콘서트가 끝나갈 무렵에는 속사포 랩퍼로 유명한 가수 ‘아웃사이더’가 출연해 흥겨운 무대를 보여주었습니다. 아웃사이더는 “지난 5월 시청광장에서 열린 청춘콘서트 무대에서 법륜 스님을 처음 만났다”고 하면서 “그 때 이후 스님의 법문을 자주 들으면서 무척 존경하게 됐다”고 스님과의 인연을 소개했습니다.
이어서 사회자가 속사포 랩을 염불과 접목시켜 볼 수 없을지 물어보았는데요. 아웃사이더는 곧바로 ‘광명진언’을 속사포로 읊어 청중들의 큰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습니다.
한편, 아웃사이더도 법륜 스님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다며 질문을 청했습니다. 스님은 단 한 문장으로 아웃사이더의 고민을 명쾌하게 해결해 주었습니다.
“사람들이 제 음악이 변했다고 해요. 17년 동안 음악을 꾸준히 해왔는데, 초반에 만들었던 음악들은 외로움과 상처를 주로 다루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결혼을 하게 되고 아이를 낳게 되니까 삶이 너무 행복해졌어요. 그것이 자연스럽게 음악에 담겨서 밝은 노래를 만들게 돼요. 그래서 옛날 팬들은 ‘외로운 음악을 안 하고 왜 밝은 음악을 해? 변했어?’ 라고 이야기를 해요.
제가 지금 표현하고 싶은 음악은 밝은 음악인데, 사람들이 저에게 듣고 싶은 음악은 외롭고 상처받는 음악들이에요. 제가 앞으로 어떤 음악을 해야 될지 무척 고민입니다.“
“첫째,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해라. 둘째, 남이 원하는 음악도 좀 해줘라.”
“정말 현답입니다. 명쾌합니다.” (크게 웃음)
아웃사이더는 스님의 답변에 아주 만족해하며 크게 웃었습니다. 청중들도 박수로 공감을 표했습니다.
자, 이제 마칠 시간이 되었는데요. 웃다보니 어느덧 콘서트를 시작한지 2시간이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사회자는 스님에게 청중들을 위해 격려 말씀을 부탁했습니다. 스님은 행복할 권리와 국민 주권에 대해 강조하며 콘서트를 마쳤습니다.
“사람은 자유롭게 그리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소질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즉, 바탕은 원래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도록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어리석어서 혹은 욕심이나 자기 견해에 사로잡혀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본래의 바탕을 잃어버리고 살아갑니다. 여기 계신 분들 모두 자기가 본래 가지고 있는 권리를 되찾아서 보다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아가시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대한민국 국민은 나라의 주인, 주권자입니다. 지금까지는 주권을 장롱에 묻어 놓고 노예처럼 살아왔지만, 이제는 자신이 이 나라의 주인이라는 것을 자각해서 올바른 주인 행세를 하는 시민이 되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지금 행복하신가요? 어쩌면 출가의 기회는 매순간 주어지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각자 처한 삶 속에서, 행복과 자유로 나아가는 하루되시기 바랍니다.
출처 | http://www.jungto.org/buddhist/budd8.html?sm=v&b_no=75816&page=1&p_no=7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