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오늘 대구광역시 비슬산 자락의 봉분만 있는 가묘(假墓)엔 아버지와 아버지의 친구분들이 모였을거다.
34년전 이즈음 광주로 향하고서 끝내 돌아오지 않은 친구들.
그때 이후로 어디에서도 찾지 못하고 소식마저 사라진지 오래인 몇명의 친구들을 기억하며 술을 따르고 술을 마시고 함께 노래를 부를것이다.
단지 사라졌을뿐, 죽었다는 소식도 없고 죽였다는 사람도 없으니 가묘를 세운것 조차 잘못된거지만
그 주인없는 봉분이라도 세워줬어야 아버지와 친구분들은 마음이 무너지지 않았을것이라 생각한다.
내가 열살때였나 혹은 그보다 약간 어렸을때 아버지와 일행들과 함께 그 가묘 앞에 선 적이 있었다.
비석도 바닥돌도 없는 기묘한 봉분 덩어리 세개.
그때 여든이 넘었던 봉분 주인의 어머니는 아버지와 친구들에게 왜 나이쳐먹고도 징그럽게 찾아오냐며 소리를 질렀지만 이내 펄펄끓는 백숙을 한 솥 가득 들고와 마당에다 내놓았다.
인삼 대추 각종 약초를 넣은 닭국물이 진하게 우러나 있었고 적어도 그 전날부터 끓이기 시작한게 분명했다.
아버지의 친구들이 내 밥그릇에 닭다리를 계속 올려주었고 난 기분이 좋아서 신나게 백숙을 먹었었다.
내 기억에 아버지는 막걸리를 다섯잔째 연거푸 비우시고야 친구들과 무덤으로 향했었다. 그때 난 이 무덤이 누구의 무덤인지.
왜 여기에 무덤이 있는지조차 몰랐지만 아버지의 그런 얼굴을 처음 보고서 아무 질문도 하지 못했다.
화가 난 것 같으면서도 웃는 것 같고, 슬픈 것 같으면서도 앙다문 입에 웃을때만 나타나는 보조개가 보였다.
둘러보니 아버지의 친구분들도 하나같이 그런 얼굴이었다.
그 친구들 중에는 욕을 참 잘하던 친구분이 있었는데
무덤을 끝까지 바라보지 못하고 뒤로 돌아 고개를 숙인 채 계속 담배를 태우며. 씨발, 이런 씨발. 을 중얼거렸다.
신부가 된 친구 한명이 "기도합시다"하고 얘기하자 그제서야 담배를 구두 밑창에 비벼끄고 돌아섰다.
하지만 끝까지 고개는 들지 않았다.
나는 그 무덤이 누구의 무덤인지 왜 주인없는 무덤을 만들었는지. 만들어야 했는지 몇 년이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되었고
해마다 오월이면 그 집 할머니가 끓여준 닭백숙. 오랜 정성으로 고아낸 그 음식의 맛이 혀 끝에 모래처럼 까끌거렸다.
34년전 함께하던 친구들은 이제 점점 머리가 희끗해지거나 벗겨지고.
그 자식들이 자라 그때 오월의 자신들과 같은 나이가 되었지만.
여전히 해마다 오늘이면 아버지와 아버지의 친구분들은 어린애처럼 비슬산 자락에서 울다가 내려오신다.
다만 그 울음에서 쇳조각 구르는 소리가 났을 뿐이다.
지금은 군대에 있는 몸이라 가지 못하지만, 아마도 제 아버지는 오늘도 친구들과 만나셨을겁니다.
집에 전화했는데 안받는거 보니 올해는 어머니도 같이 갔나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