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상주군 화동면 이소1리....
내가 태어난 산골 마을이다. 행정구역상 이소1리, 2리 이렇게 지정되었지만,
해발 고도가 높은 산골 마을에서는 간재, 어방, 마평, 시장, 쑥박골, 물감마, 신촌, 느래이, 용바우, 개머리..... 이렇게 각 동네를 구획하여 불렀다.
나는 시장에 살았고 우리 초등학교는 느레이 쪽에 있었다.
학교는 옹기종기 모여있는 마을에서 꽤나 떨어져 있었는데, 그사이에는 주로 논, 밭이었다.
어린 나이에 다니기가 불편하였고, 어머니의 증언에 따르면 몸이 약했던 나는 바람이 심한 날이면 덩치 큰 녀석 뒤에 딸려보냈다고 한다.
더구나, 요즘 같은 겨울철에는 바람이 심하고 고도가 높아 추운 동네인지라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텅빈 벌판에 칼바람이 불어제끼면 한발한발 내딛기가 힘들었다.
이런 상황에 오아시스 같은 곳이 있었다.
집과 학교의 중간 지점쯤
논가에 관리를 위한 초가집이 한채 있었다.
볏짚을 섞은 흙벽돌로 지어진 초가집의 옆면 벽은 딱 남향이라 햇살이 눈부시게 좋았다.
그 벽에 등을지고 딱붙어 있으면
바람도 막아주고, 햇살도 풍성하여 봄날 같이 따뜻하였다.
지금 생각해도 그 온기가 느껴지는듯 하다.
대다수의 아이들이 겨울철 등교길엔 그 고마운 초가집 벽에 기대어 쉬었다 몸을 추스리고 학교로 향했다.
재미있는 것은 작은 초가집이라 그벽의 크기가 세네명이면 가득찰 정도였는데,
아이들은 다닥다닥 붙어 있다가
저멀리서 한녀석이 뛰어오면 당연하다는듯 제일 오래 있었던, 그중 처음으로 온 녀석이
학교를 향해 뛰어 갔다.
추워서 달려오는 몸을 위해 따뜻한 자리를 내어 주는 것이다.
그럼 그녀석은 그 빈자리에서 차가운 한숨을 내쉬며
빨개진 두볼을 연신 비비고 있다.
한녀석이 오면 또 한녀석이......
그땐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이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어린 시절 시골에서는 배려라는 것이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서로의 몸에 베어 있었던것 같다.
생각하고 그렇게 하는것이 아니라 그렇게 배워왔고, 자연스레 익숙해져 버린.....
세상이 너무 각박해져 가고 있다.
먹고살기가 힘들어져 그렇다고 하는데....
사실 먹고 살기는 그때가 더 힘들었다.
콩한쪽, 쌀 한톨 나누어 먹던 그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