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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 광주여, 내 젊음의 중심이여
게시물ID : sisa_51342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고민동물
추천 : 5
조회수 : 391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4/05/18 05:22:23

 1980년 저는 인천의 S재단에 있는 중학교 3학년생이었습니다. 광주의 영향을 받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재단소속 고등학생들이 시위도하고 재단내의 중학교들을 순회하면서 중학생들도 시위에 동참하라고 학교에 들이닥쳐서 무서워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래서 재단 내 공터에 군인들이 임시 막사를 쳐놓고 장갑차며 트럭이며 적지 않은 규모로 상주하였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중대규모였습니다. 군대가 학교에 상주한 것이지요. 

버스 타고 집에 가는데 군인들이 버스에 들이닥쳐 같은 재단의 고등학생들을 연행해갔습니다. 광주에서처럼 군화발로 재단의 고등학생이면 무조건 연행했습니다. 저는 빡빡머리 중학생이라 연행되진 않았죠. 연행된 고등학생들이 군인들한테 맞아서 병신 되었다는 소문이 흉흉했었습니다. 그렇게 80년의 중3시절이 지나갔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광주에서 한 녀석이 전학 왔습니다. 떠버리기 좋아하는 그 녀석을 통해서 1년 전 광주에서의 무용담(?)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 녀석 말을 믿지는 않았습니다. 너무나 허무맹랑한 소리를 지껄였기 때문이죠. 군인들이 여고생을 칼로 찌르고 버스를 폭파하고 사람들을 잡아다 고문하고 죽이고 등등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통에 모두들 그 녀석을 떠벌이라고 했고 녀석은 친구들이 믿어주지 않자 입을 다물었습니다. 그 후로 남들처럼 박 터지게 공부하고 학원 다니고 땡땡이도 좀치고 하면서 고교시절을 보냈습니다.

  대학에 입학하자 학도호국단이 폐지되고 학생들이 선거해서 집행부를 뽑는 총학생회가 탄생했습니다. 그리고 곧 민주화 투쟁이 캠퍼스의 신입생들을 흔들었습니다. 

 연일 집회가 열렸고 교내에는 최루탄과 돌맹이, 화염병이 춤을 추었습니다. 저도 시위대에 동참하여 학살자 전두환을 몰아내자는 구호를 외쳤습니다. 군사정권퇴진 하라고도 하였습니다. 최루탄에 지랄탄에 눈물 콧물이 범벅이 되어 목청과 가슴이 터질 듯이 소릴 질러댔죠. 전경들 백골단 녀석들이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워서 여학생들이 깨주는 보도블럭을 미친 듯이 던졌습니다. 화염병도 던졌죠. 이렇게 대학교 신입생시절이 지나갔습니다. 

 2학년이 되자 5월에 총학생회가 광주성지순례단을 만들어 학생들을 관광버스로 광주로 광주로 실어 날랐습니다. 저는 친한 고교동창이 다니던 인하대의 순례단에 친구와 같이 같습니다.

광주로 가는 길에 딱 한번 휴게소에서 쉬었습니다. 화장실도 가고 담배도 피고 있는데 버스에서 흘러나오는 데모가에 맞춰 몇몇이 해방춤을 추더군요. 저도 얼른 가서 같이 춤을 추었습니다. 금세 수백명이나 되는 학생들이 단체로 해방춤을 추었죠. "삼천만 잠들었을 때 우리는 깨어..." 스스로 감격에 겨워 이마의 땀이 귀밑으로 흐르는 줄도 모르고 신명 나게 추었죠.

광주에 도착하니 제일 먼저 전경들이 눈에 들어 옵니다. 전국의 모든 전경들이 광주에 모였나 봅니다. 전남대에 도착해서 '80년 광주'의 사진과 영상물을 보고 시민들의 이야기도 듣고 하였습니다.

저녁에는 강의실 맨바닥에서 밤새 토론을 했습니다. 80년 광주에 대해서 군사정권과 이 땅의 민주주의에 대해서... 등등 술 먹어가며 토론했죠. 토론이라기 보다는 울분을 토해 놓았죠. 격정에 휩싸여 간간히 눈물을 흘리면서 말이죠. 이때 저는 나만이 군사정권으로 망가진 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 젊음을 바치면 민주주의는 곧 오리라는 생각이 들었죠. 겨우 스물한 살짜리 청년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다음날 조를 짜서 '80년 광주'의 격전지를 순회하였습니다. 금난로에 도청에 그리고 이름이 생각 안 나는 시장통 등을 기자처럼 다니면서 시민들 인터뷰를 하였습니다.

 이때 광주 사람들... 최루탄에 돌맹이에 이런 것들이 
날라 다녀 보행과 생업에 지장을 주는데도 학생들을 탓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광주를 잊지 않고 서울서 학생들이 내려와 줘서 고맙다고 합니다. 특히 시장통을 다닐 때 야채 행상하는 아주머니, 할머니들이 찐계란 주면서 이야기를 쏟아냅니다.
광주사람은 빨갱이가 아니라고, 군인들이 우리를 죽이니까 맞서 싸운 것이라고 학생들이 서울 올라가면 꼭 얘기 전해 달라고 눈물까지 흘리면서 말합니다. 
듣고 있던 학생들도 같이 웁니다. 꼭 그러겠습니다 할머니.. 아줌마... 이렇게 85년의 광주가 지나갔습니다.  

 20대의 5월에는 늘 광주를 생각했습니다. 나이 먹어가면서 차츰 잊어져서 해마다 5월에 광주를 생각하진 않게 됩니다. 85년 광주 현지에서 느낀 '80년 광주'는 지금까지도 가슴에 살아 있습니다. 머리에 담은 기억보다는 가슴에 담긴 것이 더 오래가는 것처럼 5월에는 '80년 광주'가 생각이 납니다. 

 오늘처럼 화창한 오월에는 빛나는 오월뿐 아니라 정권욕에 사로 잡힌 전두환과 그 일당들이 제 나라 국민에게 무자비하게 총칼을 휘둘러 고난한 민초들이 꽃잎처럼 스러져간 슬픈 오월도 있었음을 기억합시다. 

불과 30여년전 짧은 과거 이야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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