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 차
0.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1. 정치와 사회
2. 생산과 경제
3. 외교와 군사
4. 결 론
보통 사료에는 그 나라를 다루는 부분에는 필연적으로 다루게 되는 부분중 하나가 물산일것입니다. 즉 물건이 나고 팔리고 하지만 환단고기에 기록된 경제적인 행위는 연방으로 부터 조공을 받았다는 기록외에는 전무합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부족한 기록이나마 추정이 가능한 부분을 통해 바라보자면 결코 생산과 경제에 있어 낮은 문명은 아닐것이라는 추측은 가능합니다. 문제는 이 것이 현실일수 없다는 사실이라는 것이지요,
환단고기에서 다루는 환국 문명 중 환국은 최장 6만 8천여년에서 최소 3천여년이라고 하며 7명의 지도자들이 군주제로서 절대 왕권을 유지한것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본론을 시작하기 이전에 잠시 다른 이야기를 해보자면, 생산력이 인구 부양력에 미달될 경우에는 필연적으로 그 사회는 붕괴를 향해 치닫기 마련입니다. 이는 우크라이나 대기근이나, 조선의 경신 대기근, 중국의 삼국시대를 비릇한 수많은 전란과 자연재해가 벌어진 사례들을 본다면 쉽게 알수 있는 내용이지요,
6만 8천여년 전 환국이 건설된 시대는 위스콘신이나 프레이저라고도 불리는 뷔름 빙하기입니다. 이 시기가 어떤 시기인가 보자면 바이칼 호수 밑의 몽골 고원과 대흥안령산맥 알타이 산맥에 빙하가 얼어 사실상 시베리아 지방과 아시아 대륙 남부의 교류가 불가능해진 까닭에 인류학에서 원시 몽골로이드 간의 진화가 서로 상이하게 진행된 주요한 원인으로 짚고 있는 시기입니다.
평균 날씨는 영하 50도 남짓으로 현재의 북극과 유사한 기후를 보이고 있었는데, 이해가 잘 안되실것 같아 사례를 몇가지 들어보자면 이렇습니다.
소빙기가 17세기에 급격하게 조선에 영향을 미친 까닭에 경신대기근이 벌어져 조선 전체 인구의 10%~25%가 사망했습니다. 네 철기 문명을 갖추었으며 충분히 체계적이고 전국적으로 잘 갖추어진 구휼대책을 운용하고 있던 국가에서 총 인구 1천만여명중 100만여명 이상이 단 2년만에 정말 뷔름 빙하기에 비하자면 별거 아닌 소빙기에 쓸려나갔습니다.
서양의 이야기를 들자면 바이킹의 사례가 유명할것입니다. 소빙기가 끝나고 농업 생산력이 증가되어 인구가 급증한 바이킹들은 활발하게 외부로 진출을 하게 되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들이 개척한 그린란드는 이 들을 해방시켜준 소빙기의 재림으로 전멸하게 됩니다.
정확하게는 소빙기가 찾아오며 그린란드 북부의 원주민들이 남하하게 되어 충돌이 벌어졌는데, 이후의 생존자들도 바다가 얼어붙어 연락이 두절되었고 이후에 소빙기가 종료된 이후 다시 찾아가보았을때는 사람을 찾아볼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또한 소빙기가 벌어졌을 당시 유럽을 본다면 지중해 마르세유 앞바다가 얼어붙었고 영국은 포도농사가 전멸했다고 하며 30년 전쟁이나 프랑스의 프랑드의 난, 청교도 혁명, 러시아의 스테가리진의 난 등 굵직굵직한 사건들은 바로 소빙기가 영향을 미치던 시대에 벌어졌는데 그 만큼 단순하게 농업 생산력을 넘어 사회 전반에 그 파급력을 퍼트렸다는것을 알수 있습니다만 이 당시 온도차는 평균 기온의 1~2도에 불과한 수준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소빙기에 비하면 환국문명이 건립되었다고 주장하는 6만 8천여년 전의 뷔름 빙기는 어떨까요?
더욱이 환국 문명의 정치 사회적 체제를 본다면 이 들은 분명 생산력의 증가와 더불어 산업 혁명에 준하는 생산력의 급증을 겪었어야만 합니다. 본디 인류의 문화라는게 까놓고 말해서 삶의 여유가 생기면 따라오는 바 당시 생활상 대로 중기 구석기 시대 문명을 유지하고 있었다면 불가능한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점은 산맥과 고원이 빙하로 둘러 막혀 시베리아 이남과 이북간의 교류가 사실상 차단된 상태였다는 같은 몽골로이드라도 그 바탕이 달라지게되는 계기가 되었던 기후라는 점을 상기해봐야 합니다.
이 들이 농업 생산력을 바탕으로 인구를 부양할수 있다는 이야기는 이누이트들의 주요 생업 수단이 농업이라는 이야기와 같다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인구 부양력에 대한 생산력이 농업만 있는것은 아닙니다, 지하의 신이 머무르는 땅과 연결된 동굴이 지상 어딘가에 있을것이다 라는 이야기가 통설로 받아들여졌던 정말 사람 반 동물 반의 수렵의 절정을 보여줬던 북아메리카 원주민의 사례등이 있기는 합니다만 북아메리카 원주민들과 마찬가지로 대개의 비 농업 문화에서는 이러한 수렵과 더불어 농업이 병존하였는데 이는 농업기술이 아직 미비하던 시절 물론 지금도 위험성이 상존합니다만 농업이 실패할경우 받는 타격력과 더불어 수렵이 가지는 생산력을 생각해본다면 사방 수만리의 영토를 차지하고 연방을 거느렸던 정치체제를 갖출정도로 고도의 사회 문화를 유지한 환국 문명에서는 필연적으로 이행하여야 될 주요한 인구 부양책은 농업입니다.
최소한 수만년의 문명 격차를 가지고 있는 이 들과 교역을 할만한 수준의 재화의 국가는 사실상 존재할수가 없었으며, 간혹 시행된 조공 무역의 댓가로 지불해야되는 댓가는 수렵으로 대응할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생활 유적지를 본다면 이 들의 주장은 사실일수가 없습니다, 중기 구석기 당시 산업 수준은 초기의 석기를 다듬어 기존에 주먹도끼 하나를 만능화 하던것을 도구의 세분화를 추구한던 방향으로 전환해 나가던 시기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이 들의 주장 대로라면 생산물의 잉여가 상당히 발생되어 신분과 사회 및 철학 등이 갖추어져야 하며 이러한 생산력의 증가를 다시 급증시킬 어떠한 요인이 작용되어 그에 따른 사회의 변화와 민중의 의식 체계 변동등이 따라와야 하나 실제 유적지에서는 전무합니다.
지금 아무리 그 들의 지배지가 있던 지역들을 찾아보더라도 이러한 고도의 산업화나 문명의 발전은 그 들의 삶에서 찾아볼수가 없습니다. 오직 야외 취침과 막집, 석기 만이 잔존할 뿐이지요,
문명이라는 것은 앞서 사회 정치에서 언급드렸지만 내가 고립한다 해서 고립될수가 없습니다. 더욱이 그것이 문화 철학 SOD TOKYO HOT등 비 재화성 자원이라면 더욱이 그러할것이며 이러한 발전에 따라 보자면 반드시 환국 문명 내에서도 수 없는 기록들이 생겨날것이고, 그 것은 비단 환국 내에서만 머무를수 없는 노릇입니다.
그것은 현대의 사회와 견주어도 전혀 뒤떨어지지 않는 아니 문명이라 한다면 그러할수 밖에 없다는 것은 조금이라도 역사를 공부한 사람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문명의 발전은 산업과 경제와 별개의 개념이 아닌것을 볼때 이러한 문명의 전파성이나 물산의 기록이 전무한것은 작가의 의도라고 밖에 설명할수 없습니다.
일부 추종자들은 설명합니다, 분명 많은 유적과 사료가 남았는데 일본과 중국의 조작으로 삭제되었다고 말이지요, 그러나 우리는 다시 한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일본이 일제 강점기 시절 발굴되어 감추고 부정했던 함북 종성 동관진 구석기 유적지가 그 들의 의도와는 다르게 결코 숨겨지지 않았다거나 그 들로서 가장 숨겨야 할 것은 삼국시대 건너간 문명의 전파이며, 중국의 입장에서는 동북공정이라는 하나의 중국이라는 정책을 생각해볼때 밝히고 포용하는게 이득이면 이득이지 결코 손해는 아닐겁니다.
그럼에도 일본과 중국이 환국 문명에 대하여 일절 관심을 보이지 않는것은 비밀이 있거나 무지해서가 아닙니다.
제가 환국 문명에서 환국만을 언급한것은 신시 배달국과의 연관성을 분명히 해놓았기 때문입니다, 즉 그 들은 생산성이나, 문화, 정치, 경제등 사회 체계가 고스란히 이어져 내려왔다는 애기와 일맥상통합니다.
그러나 그 들의 지배지에서 발굴되는 유적 유물이나 인접한 국가나 집단의 하다못해 연방국 중 하나라는 수밀이 즉 수메르까지 이러한 문명의 자취는 전무합니다.
당장 6만년이 아니라 3천년으로 환국의 시기를 내린다 할지라도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가 태동하던 시기이며 아시아 지역은 중석기 즉 잔석기를 사용하던 시기입니다.
사례를 하나 들어보자면 신석기 시절 농업의 급격한 발전 이전에 아주 짧았지만 정착 채집 시기가 존재합니다. 쉽게 말해서 빙하기가 끝나고 온도가 올라가기 시작한 시기라는 것인데, 이때는 식용가능한 야생의 식물이나 사냥 가능한 수준의 동물의 숫자가 아주 많았다는 겁니다.
그러니 따로 일에 매진할 필요가 없는 정말 낙원과 같은 시대라고 할수가 있겠습니다.
그러나 온도가 급증하기 시작하면서 에덴의 동산은 끝났고 인류는 좀 더 살기 좋은 곳을 찾아 몰려오는 이주민과 뒤떨어져가는 생산력 다급해져가는 생존의 기로에서 살아남기 위해 부족을 보다 집단화 시키며 농업 생산력을 급증시켜 나가야 했습니다.
또한 나날히 잡기 힘들어지고 있는 동물들을 상대하기 위해 석기를 좀더 다듬고 발전시켜 나가야했지요,
이것은 간단하게 입증된 이론입니다, 전자인 정착 채집시기의 인구의 유골은 매우 건강한 상태에서 만수를 누렸음을 보여주는 경우가 많았고 발견된 유물 유적은 실용성보다는 장식에 집중된 형태를 보였지만 이후의 모습은 정 반대로 하나의 집단 거주지가 보다 정교해지면서 계층의 상 하가 발생하고 선진 문물을 가진 이주민들과의 교역 혹은 마찰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이 것이 바로 현대의 문명과 견주어도 결코 뒤떨어지지 않았던 환국 문명의 지배지에서 발굴되는 것인데, 중국이나 일본이 없앴다는 가정이 무의미하다는것을 보여주는 한편, 자칭 사서라는 책과 현실의 괴리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중 하나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결코 문명의 발전은 고립될수도 없으며 어느 부분만 비 정상적으로 발전할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구석기 후반이나 중석기 시기의 산업과 경제력을 보유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현실의 사례를 비록 기술이나 언급조차 다른 내용과 마찬가지로 회피되며 무시되고 있는 환단고기와 대조해본다면 과연 환단고기에서 실수로 누락시켰다고 가정한다 하더라도 가능하다고는 말할수가 없습니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문화의 발전은 속된말로 배때지가 불러야 가능한것이며 생산과 경제라는 뿌리가 없는 뿌리와 다른 종류의 나무는 존재할수 없기때문입니다.
따라서 현존하는 생활 유적지의 그것을 통해 볼수밖에 없기에 석기 시대의 그것을 바탕으로 현대의 사회 문화 체제를 영위했다 말하고 있는 환단고기의 저술은 잘못되었다고 단언할수 있는것 입니다.
쉽게 설명드리자면 주요 공단과 대기업에서는 뗀석기 연구하고 있는데 여러분은 인터넷을 즐기고 계시다고 생각해보세요,
이게 가능할까요? 그래요 인터넷 없다고 생각하고 여러분이 직장에 출근하면 열에 아홉은 사냥과 수렵 채집에 동원되고 남은 사람들은 높으신 분들만 쓸수 있다는 장신구를 만들고 정말 뛰어난 친구들은 석기 개량 연구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데, 다들 모이면 하는 이야기가 지방 분권화와 대통령 선거, 해외 파병, 인기 가요와 드라마입니다.
현실적인가요? 이게 환단고기에서 말하는 현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