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견 때문이었을까 심장이 쿵쿵대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두근거리지도 않았다. 풋풋했던 흔한 사랑만큼의 설렘도 없었다. 그저 느낀 희열의 감정은 ‘무시당하지 않았다’ 그냥 이런 안도감이었다. 그래도 꼴에 꼴값은 떤다고 남자는 밀당이지 라는 생각에 답장을 머뭇머뭇 거리다 피곤에 져서 잠에 들었다. 꿈을 꾸진 않았지만 무슨 감정이었는지 눈을 뜨고 정신을 차리기 전부터 이미 ‘그 연락에 대한 답장을 뭐라고 보낼까’에 대한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있었고 그 후 가볍게 던진 연락들은 간단했다 돌아오는 대답도 간단했고 서로 얼굴이나 한번 보자 라는 간단한 말도 좁디좁은 내 자존심 때문에 해보고 싶어도 못하였다. 그렇게 서로의 연락은 흔한 남녀들처럼 마무리 절차를 밟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영화라면 삼류영화고 드라마라면 막장드라마 같은 우연이 일어났다. 서로가 서로를 더 이상 의식하지 않게 됐을 때 즈음에 오랜만에 찾은 이태원 거리는 여전했다 눈에 불을 켜고 굶주려 돌아다니는 남자들이 많았고 특유의 도도한 척의 표정으로 상황들을 즐기는 여자들도 역시나 여전했다. 놀 때는 워낙 끼리끼리 노는걸 좋아하는 우리라 조용한 곳에 테이블을 잡아 서로 지난 얘기들을 하며 오랜만에 신나게 웃고 떠들며 있었다. 웃음이 퍼질 때마다 술은 점점 비워졌고 특히 오랜만에 만나서인지 술은 평소보다 훨씬 빨리 동이 나있었다. 시간이 흐르고 서로가 한둘씩 핸드폰을 들어 무료함을 달래려고 할 때쯤 분위기가 식어가는걸 느낀 한 친구가 허우대 괜찮은 친구의 손을 잡고 무작정 무대 쪽으로 달려나갔다. 뭐, 워낙 흥이 많은 친구라는걸 서로 알기에 무대에 올라가서 춤이나 추고 있으려나 생각하고 남은 친구들끼리 우리도 슬슬 다시 달려볼까 라는 단합으로 술을 추가하여 나머지 수다를 떨고 있었다. 한 이십 여분이 지났을까 흥이 넘치는 친구는 후다닥 우리 테이블로 달려오며 우리를 쓰윽 훑더니 “그래 너가 빠지면 안되지.” 라며 내 손을 잡고 어디론가 급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신나게 놀아주려나 보다 라는 정도로 생각을 하고 있었고. 도착한 곳은 허우대 괜찮은 친구와 여자 셋이 앉아있는 조금 시끌벅적한 테이블이었다. 날 데려온 친구는 풀쩍 뛰어 모자를 푹 눌러쓴 여자 옆에 앉았고 이제 혼자 남게 된 여자는 내 얼굴은 보지도 않고 내가 앉기를 기다린다는 듯이 잔 하나를 가져와 이미 술을 따르고 있었다. 딱히 이런데 거부감 있는 성격은 아니기에 기다릴 친구들에게 오늘 여기서 불을 태운다며 우스갯소리를 해놓은 후 차분하게 옆자리에 앉았다.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던 친구는 벌떡 일어나 신나서 내 소개를 여자애들에게 해주었고 웃으며 인사를 한 후에 내 옆에 앉은 여자를 보게 되었다. 나이는 한 20대 중반 정도 되었을까 이미 많은 남자들이 한번 말이라도 섞어보기 위해 다녀갔을듯한 평범하지 않은 얼굴을 가지고 있는 이 여자는 내가 나름 호감형 이였는지 여러가지 질문을 하며 서로의 친밀도를 점점 쌓아갔다. 분위기도 점점 과열되어 갔고 약간 취한 이 여자는 애교 섞인 목소리로 내가 좋다며 여기서 그만 먹고 같이 나가서 둘이 먹자는 말까지 나온 상태였다. 전에 마신 술 때문인지 올라오는 취기에 바람을 쐴 겸 기다리라는 짧은 말과 함께 담배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늦은 저녁인대도 현란한 가로등에 거리는 밝게 비추어지고 있었고 그날따라 많이들 보이는 서로를 사랑해주며 걸어가는 연인들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는 가슴 한편에 부러움보다는 이전의 씁쓸한 기억들만 가로등 불빛과 아울러 내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술김이었는지 아니면 씁쓸한 기억을 달래야 했는지 배터리가 꺼져가는 핸드폰을 들고 문득 생각난 끝나가던 연락에 주저 없이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세번정도 흘렀을까 “여보세요?” 라는 당황스러워 하는 목소리가 휴대폰을 통해 흘러왔고 무슨 말을 해야 할까 하며 푹 숙여있던 고개를 드는 순간 우연일까 아니면 운명일까 열걸음 정도 앞에 두 손으로는 핸드폰을 부여잡고 은근히 긴장한 표정으로 친구들과 함께 서있는 그 아이를 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