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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진성여왕에 대해 알아봅시다.
게시물ID : history_1571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leejungjin
추천 : 3/5
조회수 : 3591회
댓글수 : 6개
등록시간 : 2014/05/11 17:49:07
신라의 제51대 왕(재위 887∼897)으로 정강왕이 후사 없이 죽자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문란한 행실과 실정으로 국가재정을 위태롭게 하고 민심을 동요시켰으며 이로 인해 전국적인 농민반란이 일어났다. 헌강왕의 서자 요(嶢)를 태자로 책립하였으며 실정에 대한 책임을 지고 태자에게 왕권을 양위하였다.
출생-사망
? ~ 897
재위기간
887년∼897년
별칭
휘(諱) 만(曼) ·원(垣)
활동분야
정치
성 김(金). 휘(諱) 만(曼)·원(垣). 경문왕(景文王)의 딸로 헌강왕(憲康王)·정강왕(定康王)의 누이동생이다. 정강왕이 후사(後嗣) 없이 죽자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888년(진성여왕 2) 각간(角干) 위홍(魏弘)과 대구화상(大矩和尙)에게 명하여 향가집(鄕歌集) 《삼대목(三代目)》을 편찬하게 하였으나 지금 전하지는 않는다. 여왕은 위홍과 사통하고 궁중에 미소년을 끌어들여 음행을 일삼았으며, 뇌물을 받는 등 궁중의 풍기를 문란하게 하였다.
진성여왕의 실정으로 인한 정치적 혼란과 더불어 흉년까지 겹쳐 백성들의 생활은 극도로 어려워졌다. 부역과 과도한 조세 부담에 시달리던 농민들은 유민이 되어 도적이 되거나 세력있는 귀족의 노비가 되었다. 한편 국가에서는 세금을 독촉하였는데 이는 전국적인 농민반란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 889년(진성여왕 3) 사벌주(沙伐州)에서 일어난 원종과 애노의 난을 시작으로 전국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또한 이 시기에 병제(兵制)가 법대로 시행되지 않아, 지방 각지에서 군웅이 할거하였다. 북원(北原)에서 양길(梁吉)과 궁예(弓裔)가 봉기하자, 이를 토평(討平)하려다가 도리어 실패하였고, 892년에 완산(完山:全州)에서 견훤(甄萱)이 일어나 세력을 확보함으로써, 신라는 삼국이 정립하는 형세에 이르렀다. 여왕은 895년 헌강왕의 서자 요(嶢)를 태자로 책립하였다가, 897년 6월 실정에 대한 책임을 지고 태자에게 양위한 뒤 그 해에 죽었다. 능은 경주(慶州) 사자사(獅子寺) 북쪽에 있다.  


평가
ㅡ실제 신라가 국운이 기우는 것에 가장 큰 일조를 하였던 왕이죠.삼촌이었던 정부 위홍과 함께 매일밤 향락을 벌이며 강간을 일삼고 유모를 높은 자리에 등용하여 부정부패가 극으로 치달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원종 애노 견훤 양길 이런 사람들이 들고 일어나 지방 각지에 호족들이 난립하여 중앙정부는 지방에 영향력을 잃게 되었구요.
섹스파트너였던 삼촌 위홍이 죽자 미소년들을 기용하여 나랏일을 맡겼는데 국고가 비자 백성들의 식량을 강제로 탈취하여 원성이 자자했다고 합니다. 결국 조카에게 왕위를 물려주고(실제론 반란으로 찬탈)  쓸쓸하게 죽게 되는데 자업자득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참고로 당시 남자인 삼촌이 조카를 취하는 제도는 중앙아시아쪽 기마민족들이 가진 특유의 제도라고 합니다.

어쨌든 진성여왕도 있긴한데 노래집인 유명한 삼대목!!!!  이건 시험에 나오니 꼭꼭 외우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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