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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은 똑같은 강의도 매번 재미있게 하는 비결이 무엇인가요?”
게시물ID : lovestory_7972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medIUm
추천 : 3
조회수 : 872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6/09/18 09:2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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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대학에서 강의를 하면서 같은 내용으로 수업을 두 번이나 하다보니 두 번째 강의가 늘 재미가 없다고 말한 한 교수님의 질문과 스님의 답변을 소개합니다.  

 

유튜브에서 즉문즉설을 보면 스님은 똑같은 내용도 매번 재미있게 이야기하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스님이 삶을 살아가는 자세에 대해 진솔한 답변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대학에서 일하는데 같은 수업을 30분 간격으로 두 번합니다. 처음 할 때는 신났는데 두 번째는 김이 빠져서 재미가 없어집니다. 제가 재미없어 하니 학생들도 재미없어 합니다. 스님께서는 똑같은 말씀도 재미있게 하시던데, 그 비결이 무엇인지요?”

 

“저는 항상 처음 하듯이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바뀌었잖아요.”

 

“그러게요. 저는 다른 학생들인데도 똑같은 이야기를 하니까 재미가 없습니다.”

 

“똑같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질문자가 아는 것을 녹음테이프 틀어 놓듯이 얘기 하니까 그렇겠지요. 내용이 비슷할 뿐 똑같지 않습니다. 이 사람이 물었을 때는 이 사람하고 얘기 하는 거고, 저 사람이 물었을 때는 저 사람과 이야기하는 거잖아요. 

 


 

예를 들어, 이 사람이 ‘엄마가 아파서 고향에 가겠습니다’ 하면 그 사람의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어보고 ‘가지마라’ 하기도 하고, 저 사람도 똑같이 가겠다고 하지만 ‘빨리 가라’ 이렇게 얘기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어떤 때는 둘 다 가지마라 하지만 어떤 때는 한 사람은 가고 한 사람은 가지 말라고 얘기해요. 상황에 따라 다른 겁니다. 

 

‘배 아프다’ 이럴 때도 밥을 못 먹어서 배가 아프다면 밥을 먹으라고 하고, 너무 많이 먹어 배가 아프다면 그만 먹으라고 하는 거죠. 여러분이 들을 때 ‘아니, 한 사람이 물을 때는 먹으라고 하고, 다른  사람이 물을 때는 먹지마라 그러냐’ 라고 의구심이 생기는 것은 답을 정해놓고 살기 때문입니다. 인생에는 정답이 없습니다. 

 

그런데 지식적인 것, 답이 있는 걸 강의하면 똑같을 수 있어요. 제 경험을 말씀드리면 옛날에 학원 강의를 잠깐 한 적이 있었어요. 수학 단과반 수업을 하루에 두 시간씩 한 달 만에 끝내는데, 하루에 여섯 번 똑같은 걸 강의합니다. 또 매달 똑같이 하니까 일 년만 해도 똑같은 말을 72번 합니다. 그걸 5년 이상 하면 대부분의 강사들은 녹음테이프 틀어놓은 것 하고 똑같습니다. 농담 나오는 위치도 어디쯤 가면 농담이 자동으로 나옵니다. 숙달이 돼서 외워서 하는 거죠. 얼른 들으면 굉장히 잘 가르치는 것 같고 모르는 게  없는 것 같은데, 누군가 질문하면 대답을 못해요. 외워놓은 테이프가 돌아가는 거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아이들은 대부분 앉아서 졸고 있어요. 선생님이 아이들하고 눈 맞추고 이야기같이 하지 않고 자기 아는 것만 얘기 하고 있습니다. 그럼 녹음기 틀어놓고 영상 틀어놓고 하지 뭣 때문에 직접 강의를 하겠어요? 

 


 

그러나 저는 강의할 때 똑같은 내용을 열 번해도 다릅니다. 왜냐면 사람이 달라졌잖아요. 이 자리에서 그 문제를 물으니까 그렇게 이야기 하는 것이지 아까 그 이야기를 똑같이 하는 게 아닙니다. 듣는 사람은 ‘저 이야기는 유투브에서 한 이야기하고 똑같네’ 라고 하지만 저는 유투브에서 어떻게 이야기 했는지 몰라요. 어제 했던 질문과 똑같은 질문이라도 오늘은 다른 사람이 했기 때문에 어제와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이 사람이 물어보면 새로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래서 즉문즉답이 아니라 즉문즉설입니다. 답이라면 똑같은 얘기를 해야 하는데 우리 인생의 사례는 매 순간순간 바뀝니다. 공간, 시간, 사람이 바뀌잖아요. 똑같은 사람이라도 공간이 바뀌면 다른 사람이고, 똑같은 사람이라도 어제하고 오늘은 다른 사람입니다. 똑같은 시공간이라도 사람이 바뀌면 또 다른 상황 이예요. 한 시도 같은 건 없습니다. 늘 변해가는 거예요. 늘 똑같은 강물이 흐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물은 순간순간 전부 다른 물이예요. 같은 물은 한 번도 없습니다. 

 

여러분의 삶은 오늘의 이 순간, 이 조건에서는 한번 밖에 없습니다. 재연 할 수 없어요. 우리가 다시 내년에 이 자리에서 만났다 하더라도, 이미 시간이 다른 차원에서 만나는 거잖아요. 

 

4차원의 세계란 가로세로 높이가 똑같은 공간인데 시간이 바뀌는 것입니다. 수직선이라는 것은 x축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평면은 같은 x축 안에서도 y축에 따라서 위치가 다릅니다. 또, 같은 평면이라도 z축이라는 층에 따라서는 또 다른 공간이 있습니다. 그것처럼 같은 공간, 즉 x축, y축, z축이라도 시간 축에 따라서 또 달라요. 그래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래 위를 오르락내리락하며 다른 층을 보듯이, 시간 축을 타고 움직이며 다른 세계를 보는 것이 타임머신입니다. 

 


 

어제 저녁에 잠을 자던 남편과 오늘 아침에 만난 남편은 다른 남자예요. 같은 남자가 아니에요. 어제 본 아들과 오늘 아침에 본 아들은 다른 아들이에요. 매일매일 다른 사람을 만나고 다른 상황을 접하는 겁니다. 시공간이 다르기 때문에, 사람이 다르기 때문에, 우리가 똑같은 사람을 만나도 이야기가 달라질 수 있고, 다른 사람을 만나도 같아질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이 모두 불교에서 말하는 연기법입니다. 이 연기라는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시간적, 공간적인 연결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손가락 다섯 개의 부분만 보면 전체가 보이지 않으니까 다섯 개의 손가락이 별개처럼 보이지만 눈을 크게 뜨고 전체적으로 보면 다섯 개의 손가락이 하나의 손바닥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손의 입장에서 보면 같은 손이라고 말하고, 손가락의 입장에서 보면 다른 손가락이라고 말합니다. 그럼 이것이 같은 것이냐, 다른 것이냐고 물어보면 그것은 같은 것도 다른 것도 아닌 겁니다. 이것이 불일불이(不一不異) 입니다. 같다 해도 맞는 말이 아니고, 다르다고 해도 맞는 말이 아닌 것입니다. 

 

존재 자체가 같다, 다르다 하는 것은 관점의 차이입니다. 존재의 본질은 같다고도 다르다고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있다, 없다로 말하는데 ‘있다’도 존재의 본질이 아니고 ‘없다’도 존재의 본질이 아닙니다. 있다 없다는 우리가 인식이 되면 있다고 하고, 인식을 못하면 없다고 하는 인식상의 문제입니다. 존재의 문제가 아닙니다. 

 

예를 들면, 누구와 만났습니다. 그 사람과 어릴 때 추억이 있다하면 내 머릿속에는 추억의 영상을 틀어 놓고 있습니다. 사람은 이미 바뀌어 있는데 나는 늘 그 관점을 갖고 살고 있는 거지요. ‘저 사람은 어떻고, 이 사람은 어떻고, 그때 나한테 뭐라고 그랬지.’ 그런 생각을 갖고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현재에 깨어있지 못하고 늘 영화를 보고 살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지나간 옛날 영화 틀어놓고 살거나 아니면 미래 공상 영화 틀어놓고 ‘죽으면 어떡하지?’ 이러면서 살고 있는 겁니다.  

 


 

‘지금 여기 깨어있어라’ 이것이 수행의 핵심입니다. 지금 여기 깨어 있으면 울 일이 없습니다. 과거의 영화를 틀어 놓고 살면서 우울한 것, 그것이 괴로움이고, 미래의 영화를 틀어 놓고 근심 걱정 두려움을 가지는 것, 그것이 괴로움입니다. 그래서 지금 여기 깨어 있으라고 말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러분과 내가 이렇게 만나서 이야기 하는 이유는 붓다의 가르침, 그 지혜를 불교 용어라는 언어의 벽을 허물고, ‘불교’라는 종교의 벽을 허물고 일상 속에서 공유하기 위해서입니다. 기독교인도 그것을 공유해서 행복해질 권리가 있습니다. 기독교도라고 붓다 가르침의 혜택을 못 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왜 이 지혜를 승려들만 받아야 하겠습니까. 

 

인류가 경험하여 쌓아온 지혜를 모든 사람이 공유해서 이익을 볼 권리가 있습니다. 저는 성경을 보고 기독교의 지혜를 받아 도움을 얻는데, 목사님들은 불경을 안 보면 본인들이 손해입니다.(청중웃음) 이제 우리들은 종교의 틀을 벗어나 삶을 지혜롭게 가꾸어가는 본질에 다가가야 합니다. 

 

저는 한국음식도 먹고 미국음식도 맛보는데, 미국사람들은 미국음식만 먹고 맛있는 한국음식 맛을 보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만약 토론을 한다면 양쪽을 다 아는 사람이 이기게 되겠지요.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잖아요. 그저 이것저것 잡다하게 알고 싶다는 지적 욕심을 내라는 것이 아닙니다. 열린 마음으로 벽을 허물고 더 다가가야 합니다. 그런 관점으로 공부 했으면 좋겠습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삶은 늘 새롭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새로 태어난 거예요. 아침에 눈을 뜨면서 ‘살았네!’라고 그냥 하라는 게 아닙니다. 늘 시작이고 처음이기 때문에 처음같이 해야 합니다. 저의 좌우명이라고 할 수 있고 불교에서는 명심문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지금 출발입니다.’

 

언제나, 지금 출발입니다. 어제까지 한 것은 연습이고 오늘이 실전입니다. 내일이면 오늘까지가 연습이 되는 것입니다. 연습할 때, 실전같이 하게 되니 늘 새로운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스님의 답변에 질문한 교수님은 환한 웃음을 보이며 자리에 앉았습니다. 청중들도 공감하며 큰 박수갈채를 보냈습니다. 삶을 어떤 자세로 살아갈 것인가에 대해 많은 것을 느낄 수 있는 답변이었습니다. 

 

이 외에도 스님은 7명의 질문에 대해 더 답변을 한 후 강연을 마쳤습니다. 강연을 마치면서는 앞서 대답한 질문에 대해 보충 설명을 덧붙이면서 고통을 두려워하지 말고 이치를 터득하는 경험으로 승화시킬 것을 당부했습니다. 

 

“하루하루가 새로운 인생입니다. 하루하루가 모여 내 인생을 이룹니다. 인생에 좋은 때가 있고 나쁜 때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하루하루가 각각 소중한 인생입니다. 

 


 

여러분들은 괴로우면 시간이 길다고 느끼고, 좋으면 짧다고 느끼지요. 기분이 좋으면 ‘십 년이 하루 같다’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인생이 힘들면 ‘일각이 여삼추 같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일각(15분)에 가을이 세 번 지났다, 즉 삼 년이 지났다는 말이니 고통을 받을 때는 시간이 엄청나게 느리게 느껴집니다. 우주선이 빛의 속도에 가까우면 시간의 흐름이 제로에 가깝다고 하는데 괴로움이 지옥에 가까울수록 시간이 무한대로 늘어납니다. 하루만 괴로움을 당하면 십 년의 경험을 할 수가 있어요. 

 

사람들이 저보고 ‘스님, 나이도 많지 않으신데 어떻게 그렇게 많이 아느냐’하고 묻습니다. 제 나이가 삼백  살이 넘었어요.(웃음) 이유는 젊을 때 고통을 많이 겪어서 시간이 늘어났답니다. 하루 고문을 당하면 삼 년 산 것 만큼 경험이 됩니다. 그 속에서 이치를 터득하게 된다는 말이지요. 그러니 괴로움을, 고통을 두려워하지 마세요. 오히려 고통을 통해서 단시간 내에 많은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옛말에도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라지 않습니까. 젊은이들이 돈 주고 고생을 사서 할 수는 없어도 공짜로 주어지는 고생을 왜 안 하려고 합니까. 저 같으면 돈 주고 사서 하겠어요. 

 


 

요즘은 잘 먹어서 신체적으로는 건강한데 편리한 것만 추구하니까 경험에 의해 배우는 게 적습니다. 공부하기 힘들다고 하지만, 나이 들면 밥 먹고 공부만 해도 되었던 때가 인생에 많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어서 그 때를 그리워합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회피하지 말고 긍정적으로 살아야 합니다.”

 

출처 http://www.jungto.org/buddhist/budd8.html?sm=v&b_no=75095&page=1&p_no=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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