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교산울교회 : 이문식목사
깊고 단단한 신학과 그에 걸맞는 실천. 이것이 산울교회 이문식 목사님과의 인터뷰를 끝내고 나올 때 들었던 처음 느낌이었다. 큰 울림이 있었기에 더 이상 줄일 수 없어 작은 글씨로 길게 목사님의 신학과 실천, 그리고 앞으로의 계획을 소개한다.
1. 이미 세 번을 분립개척하셨고 네 번째는 목사님이 직접 분립개척해 나가신다고 들었습니다. 그렇게 결정한 이유가 있으신가요?
쉬운데요. 세 번 부목사님들을 내보냈는데, 세번째는 교인들이 잘 안나가요. 익숙해졌고 나가기보다는 머무르려는 마음이 많아진 거예요. 제가 오래 있으면서 구심점이 너무 강해져 원심력이 떨어지는 거예요. 모이는 교회로의 기능은 강해지고 흩어지는 교회의 기능이 갈수록 약해져서 이번엔 제가 나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균형을 잡아야 할 필요를 느꼈어요. 두번째는 우리 부목사님들이 초기 공동체와 함께 나가니까 성장하긴 하는데, 다 젊은 목사님들이라 인지도가 떨어지잖아요. 제가 지금은 인지도도 조금 생기고 나이도 좀 있고 축적된 활동도 있고 해서, 제가 개척하면 더 잘 될 거 같더라고요(하하). 전쟁이 나면 유리한 자가 가야죠. 그래서 이번엔 제가 가는 것이 교회를 세우는데 더 유리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분립개척을 하면 교회 성장에 몇 번 제동이 걸립니다. 오르막을 올라갈 때 탄력을 받아야 쭉 올라가는데 텅텅텅하면서 성장에는 도움이 안돼요. 그래도 해야죠. 이게 제 목회철학이니까요, 한 그루 큰 나무보다 아름다운 숲이 좋다는 것이.
2. 여러 번의 분립개척을 하면서 분립 단행의 기준으로 삼은 것이 있나요?
인원수가 분립의 결정적인 기준이 된 것은 아니었지만, 저는 3백명이 넘으면 분립을 고려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처럼, 교회공동체의 규모가 어느 선을 넘어가면 유지하는데만 돈과 인력낭비가 너무 심해요. 선교적 효율성이 완전히 떨어지죠. 분립의 적절한 선이 3백명에서 5백명 사이라고 생각해요. 사회를 섬기려면 교회에 잉여가 좀 있어야 되는데, 인적 잉여나 물질적 잉여가 3백명 넘어가면서 생깁디다. 시스템이나 조직이 들어오지 않고도 목사와 교인 사이에 인격적으로 소통이 가능한 것이 3백명 수준이고요. 이 정도 규모에서는 아날로그 소통이 되거든요. 하나님은 세상을 아날로그로 창조하셨고 예수 그리스도 공동체도 아날로그 공동체였거든요. 그 특성을 충분히 살리자는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산울교회의 분립은 기획개척입니다. 처음부터 우리는 분립개척을 꾸준히 한다는 철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개척시스템을 만들었어요. 첫째는 전교인이 매년 작정하는 겨자씨헌금이예요. 이건 교회개척헌금입니다. 6백명 정도가 3년을 헌금하면 2억이 돼요. 가정교회 방식으로 하지 않는 한 공적인 모임 장소가 필요한데, 그럴 때 이 기금을 가지고 교인들 30명 정도가 함께 하면 교회개척이 가능한 경제력이 됩니다. 그러니 특별히 따로 헌금을 할 필요가 없지요. 그래서 겨자씨헌금은 쌓아두고 계속 분립개척을 위한 기금으로 만듭니다. 그러나 이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예요. 부목사님을 목자로서 교인들의 신뢰와 존경을 받을 수 있는 인물로 키우는 것이죠. 도제적인 부분이 필요해요. 목사 만드는 데는. 신학교는 교육시스템으로 사람 만들지만요. 그렇지 않으면 돈이든 뭐든 아무리 지원해도 안됩니다. 설교기회나 티칭기회를 많이 주어서 그 목사님을 통해서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쫓는 양들이 생겨나게 해야 합니다.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쫓으니까요. 양이 따르기 시작하면 그 양은 그 목사님이 책임져야 할 양이예요. 그런 양이 있는 사람을 내보내야 돼요. 검증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주님께서 양을 맡기는 사람들이 있어요. 교회에서 그를 찾아낼 길을 열어놔야 해요. 담임목사를 따르는 양들로만 자기 교회를 세우려고 하지 말고요. 분립하려면 부목사로 동역하는 목사들에게 양들이 모이는 과정을 지켜봐야 하고, 또 열어놓고 만들어가야 돼요. 이렇게 해서 목자와 양이라는 교회의 기초공동체가 구성되면 거기에 돈과 시스템 등을 지원합니다. 우리 교회 규정에는 부목사가 전임으로 6년 목회하게 되어 있는데, 이 시간 동안 그 과정을 다 봅니다. 6년 끝나면 3개월이든 6개월이든 안식년을 줬어요. 좀 쉬고 돌아오면 곧바로 교회개척세미나를 열게 해요. 매주. 그래서 자기 목회비전을 교인들에게 알리고 교회개척을 위한 기도회를 그 목사님 주관으로 가지게 해요. 당회에서는 장로님 한 분과 함께 할 집사님 한 분을 부위원장으로 하는 개척위원회를 구성하고요. 필요한 것들을 어떻게 지원할 것인가, 예산 배정은 어떻게 할 것인가, 지역은 어디로 선택할 것인가, 그 교회의 비전이나 사역의 소명이 뭔가. 이런 것들을 다 정돈해내는 일을 6개월동안 해요. 그래서 6개월 정도 지난 다음에 목사님과 교인들을 다 파송합니다. 돈도 하나님의 공적자금이기 때문에 공동체에 줍니다. 교인대표와 목사님이 사인을 해요. 영수증 처리하고요. 그런데 돈을 받아가는 데는 조건이 있어요. 교회 문을 닫거나 이단시비가 붙거나 더 할 수 없을 때에는 우리 교회의 허락을 받고 환원해야 한다는. 공적자금이니까 회수해야 되잖아요. 이렇게 우리는 처음부터 기획 개척을 합니다. 일단 개척된 교회에는 최대한 독립성을 인정해주어서 개교회의 자유를 인정하는 개혁교회 전통을 지키려고 합니다. 개척되는 교회에 동참하려는 분들에게는 개척기금을 마련하는 일을 함께 하게 합니다. 헌금하거나 신용대출을 해준다든가 하는 식으로요. 처음부터 상당한 열정과 헌신을 하고 가는 거죠. 목사가 목사 개인돈으로 하게 되면 사교회가 되고, 나중에 세습하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철저한 하나님나라의 공공성을 가지고 시작해야 세습도 막아낼 수 있어요(하하).
3. 이제 산울교회에서 목사님의 사역이 곧 끝나게 되는데요. 어떤 분이 후임목사로 이어서 사역했으면 좋겠다 하는 것이 있으신가요?
저는 그런 것 제시하지 않습니다. 청빙위원회에 세 사람 추천하는 것으로 제 역할은 끝나요. 첫째는 우리 교회의 부목사 중 한 사람, 그 다음에 외부의 원로목사 추천을 받았는데 홍목사님 추천을 받았어요. 한 분은 합신 교수님들의 추천을 받았고요. 청빙위원회는 청년대표부터 여전도회, 노인들까지 전교인의 의견을 반영할 20명으로 구성했어요. 그들이 제가 추천한 3인을 검증하는 역할을 하고요. 이 3인은 우리 교인들 대상의 여론조사를 반영해서 추천합니다. 물론 여론조사에만 바탕을 두는 것은 아니예요. 목회자를 세울 때, 신자들의 Need에만 맞추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Need를 중요하게 봐야 하니까요. 그래서 신학적 검증과 조정을 통해서 여론조사 퍼센티지에 환산점수를 부여하였어요. 이렇게 해서 전교인들이 합의할 수 있는 목회자 청빙 기준이 나왔어요. 그걸 주보에 다 실었어요. 전교인이 공유하도록. 이런 기준이 이미 있으니까, 목소리 커서 낼 수도 없고 당회원들끼리 밀실에서 누구를 세워갈 수도 없고 공론화시키는 것입니다. 공적 기준을 마련했고 배점표까지 마련해서 공개해 버렸으니까요. 청빙위원회는 이 기준으로 검증해서 3인이 될 때까지 계속 추천과 검증의 과정을 반복합니다. 그렇게 최종 3인이 당회에 추천됩니다. 이것은 ‘세 명 중 누가 되도 우리는 담임목사로 모시겠습니다’라는 의미예요. 당회는 우리 교회에 대한 적합성, 우리 교회의 목회적 흐름과 DNA의 연속성을 토대로 두 분을 선택합니다. 선택된 두 명은 제직회로 넘어가요. 두 분을 모셔다가 설교도 듣고, 관훈토론회식으로 제직회원들과 인터뷰 시간을 두 시간, 질의응답 토론도 하고요. 이 분들에 대한 자료는 다 확보되어 있는 상태니까 재확인하는 것입니다. 말로. 그 다음에 제직회원들이 무기명투표하여 득표가 많은 한 분을 공동의회로 넘겨 3분의 2 이상이 되면 목사가 됩니다. 우리 교단은 독특해서 2년 동안 임시목사로 있어야 돼요. 위임이 안되요. 목회를 하고 나서 2년 후에 또다시 공동의회를 통해서 3분의 2 이상의 찬성이 나와야 2대 담임목사가 되는 거예요. 목회적 검증을 공동체적으로 철저히 거칩니다. 저는 추천 후에는 청빙위원회 안들어갑니다. 세 명 추천할 때는 셋 중에 누가 되어도 좋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편해요. 신경도 안쓰이고, 스트레스도 안받아요. 어떻게 진행될까 걱정도 안하고 근심도 없어요.(하하) 추천한 세 분 중 두 분은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예요. 한 분은 한 번 봤고, 한 분은 얼굴도 못봤어요. 전화로만.
4. 목사님의 신학적 배경은 철저히 복음주의적이신데, 사역의 내용은 복음의 공공성을 중요시하는 사회참여적인 면이 강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희년선교회라든지, 남북나눔운동이라든지요. 우리나라에서 이것은 쉽지 않은 행보라고 여겨집니다만.
저는 학부는 총신대, 신대원은 합신에서 공부했으니까 아주 보수적인 교단 출신이죠. 그러다가 MA는 ACTS에서 선교학으로, Th.M은 김세윤교수님한테 했으니까 한마디로 복음주의죠. 근본주의하고는 좀 다른 개념으로 쓰고 있습니다.
신학이 좋았습니다. 제가 학부 때부터 캘빈주의를 공부했는데. 캘빈주의가 일반은총론이 강하잖아요. 거기에 공공성, 개혁주의적 전통이 있거든요. 그런 신학적 기초 위에 성서신학을 통해 하나님나라를 이해하게 되니까 자연스럽게 하나님나라의 특수성과 보편성, 종교성과 세속성 모두에 침투하는 하나님나라에 대해서, 통치에 대해서 균형이 잡혔어요. 그 다음에 ACTS에서 선교학을 공부할 때 해방신학, 민중신학, 성서해석학을 비판적으로 공부했어요. 예수그리스도를 사회적 메시야, 정치적 메시야로 보편화시킨 해석학에 대해서, 유럽의 정치신학에 근거해서 예수그리스도의 유일성을 보편화시키는 것에 대해 상당히 비판하는 논문을 썼어요. 구원론에 관한 문제점들을 썼는데, 논문을 쓰면서 내가 갖고 있는 해석학적 입장은 옳지만 실천에 관해서는 이 사람들이 옳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현장에서의 고민이 없는 신학은 공허한 관념론 신학의 한계를 갖고 있다고 생각했고, 신학은 연구하거나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doing’이 필요한 ‘doing theology’라는 입장을 갖게 되었어요. 어떻게 실천할까 고민하다가, 그 당시 로잔언약에서 나온 Urban Mission 개념을 받아들여서 대도시 빈민선교쪽으로 방향을 잡았어요. 청년대학생사역을 하는 연장선에서 저는 청년이 좋더라고요. 그래서 공단으로 간 거예요. 구로지역에 민중교회 연합이 있었어요. 13개 교회. 저도 그 중에 한 명으로 들어갔는데 복음주의에서는 저 혼자뿐이었어요. 그 때 6월 항쟁이 발생했는데, 그 후로는 군사정부시절에 하듯이 노동자들이 교회에 숨어서 사역을 할 필요가 없어졌잖아요. 교회의 보호가 필요없어졌어요, 이제. 그래서 다 나가다보니까 구로교회 민중교회연합에 공동화가 일어났어요. 복음재생산 능력이나 신앙에 아이덴티티가 없이 사회적 보편화, 공공성만을 추구했을 때 교회가 어떻게 공동화되는가를 봤거든요. 이것은 내가 극복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교회의 신앙고백, 신앙의 아이덴티티를 재생산하는 작업, 제자훈련을 그대로 하면서도 어떻게 사회적 공공성을 지켜내고 선교적 과제를 달성해내느냐 할 때, 저에게는 외국인 노동자가 처음 눈에 띄었어요. 그 때 제가 노동문제는 한국사회 내부문제, 한국자본주의의 내부문제가 아니라 동아시아 자본주의 문제라고 보았죠. 동아시아의 가난한 사람들이 와서 자본시장만 국제화되는 것이 아니라 노동시장도 국제화되어가고, 더 가난한 나라 사람들이 덜 가난한 나라의 노동시장으로 유입되어 국제적 모순이 더욱 깊어지는 것을 보면서 이 사람들을 대상으로 사역해보자 해서 희년선교회를 시작한 거죠. 로잔정신, 복음주의신학, 로잔선교, Urban Mission, 그리고 당시 노동문제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통합되면서 그 일을 하게 되었어요.
5. 1세대 복음주의주의자들이 그 부분에 취약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는 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취약했던 것이 아니라 시대적 한계였죠. 그 당시에는 대학생 선교, 지성사회의 복음화가 중심과제였으니까요. 그걸 잘하신 분들이고, 그분들 중심으로 중산층, 오피니언 리더, 한국사회 초기 중산층 복음화가 성공한 겁니다. 강남기독교가 그렇게 형성되어 주류기독교가 된 거죠. 우리 시대에는 다음 질문이 온 것이고요. 소외된 계층과 주변부 기독교에 어떻게 선교를 감당하고 주류기독교인과 그것을 통합해 내느냐, 그들이 이것을 어떻게 인식하게 하고 헌신하게 할 것이냐 하는 것이 우리 세대의 과제였어요. 1세대들과 협력해서 이 문제를 풀어가는 역할을 한 거죠. 우리는 1세대들을 비교적 잘 섬긴 편이죠. 1세대에 그런 열린 사고를 가진 분들이 계셨고, 그 분들에게 한계가 있었지만 본인들의 한계를 우리들에게 위임해 주셨거든요. 그래서 그 분들과 함께 『복음과상황』이라는 잡지를 만들어서 다음세대 젊은이들에게 컨텍스트를 어떻게 이해하고, 복음과 컨텍스트를 어떻게 통합할 것인가에 대한 과제를 끊임없이 던졌습니다. 희년선교회나 공단지역 복음화라는 문제로 실천을 했고, 나중에는 통일문제로 끌려가서 그것을 섬기면서 분단구조 속에서 기독교의 역할과 의미를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한계이면서도 동시에 우리들에게 주어진 영역이었다는 생각을 하죠.
6. 희년선교회 사역이나 남북나눔운동이 큰 범주로는 모두 교회활동이지만 그것들이 산울교회 사역과 특별한 관련성을 가질까요?
산울교회는 하나님나라 운동의 지역화작업이예요. 지역에 기반한 공동체를 만드는데, 지역공동체 안에서도 지역시민단체와 연대를 하지 않으면 그건 게토 공동체가 되거든요. 그래서 이 지역에서의 공공성과 복음적 특수성, 선교적 특수성을 어떻게 통합하느냐가 과제였어요. 제가 여기 내려와서 군포경실련을 창립했어요. 준비위원회의 준비위원장을 제가 맡았고, 창립되고 나서는 공동대표도 했는데, 지역 토호세력들의 모임으로 바뀌는 것을 보고 공동대표를 놨죠. 그리고 기독여민회를 지원하고 환경운동도 같이 하면서 지역단체들은 연대하게 되었습니다. 교회라는 아이덴티티가 중요한데, 아이덴티티는 크리스천펠로우십이거든요. 공동체가 크리스천 펠로우십으로 아이덴티티가 매우 강화되는데, 그것만 하고 있으면 사회와의 연대성이 사라져요. 그래서 디아코니아를 해야 해요. 그런데 디아코니아는 지역시민단체와 연대하는 것이 좋아요. 전문성이 있거든요. 그래서 디아코니아를 시혜적 차원의 사랑실천만이 아니라 지역사회 문제를 공유하고 연대성을 가져야 지역사회에서의 하나님나라 공동체가 세워진다는 생각을 갖고 처음부터 시작했죠. 교회를 개척한 것은, 이런 도전과 실험이 더 용이하고, 묘목으로 시작하기 때문에 한국교회 개혁을 위해서도 더 큰 보람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예요.
7. 산울교회 개척 후 15년을 사역하시면서 아쉬운 점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이런 반성이 상당히 많이 되고 있어요. 지역의 NGO단체 리더들은 다 우리교회 출신들이예요. 굉장히 좋은데, 위탁을 많이 했어요. NGO단체에 물질과 사람을 보내서 위탁은 했지만 우리가 직접 한 프로젝트가 없어요. 그것이 조금 아쉬워요. 하나쯤은 택해서 했어야 했는데. 차상위계층 어린이들 대안학교나 방과후학교 같은 것은 더 잘 할 수 있었는데, 그 부분을 안키웠어요. 기존에 있는 대안학교 지원해주고 공부방 운동하는 사람들을 지원해주는 것으로 그쳤어요. 맨파워, 머니파워가 있는 우리가 해서 그들의 사역을 약화시키면 안되겠다고 생각해서 이미 잘하고 있는 사람들 돕자 한거였는데, 우리 교회가 직접 참여해서 우리 교인들이 직접 몸과 발로 뛰게 하지 못한 것이 아쉽더라고요. 그랬으면 우리 교인들이 좀 더 깊이 개입해서 열심히 할 수 있었겠죠. 뭔가 하나는 만들어 했어야 했는데 아쉬워요.
8. 새로 시작되는 교회의 위치를 광교로 정하신 데는 중요한 이유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좀 말씀해주세요.
몇 가지 이유가 있어요. 광교에 합신대학원이 있는데, 거기 우리 교단 교회가 없어요. 그래서 학교를 돕는 교회를 하고 싶다는 것이 첫째고요. 둘째는 먼저 가서 하면 개척교회 목사님들한테 피해를 줄일 수 있기 때문이예요. 나중에 와서 교회가 커버리면 주변 개척교회들이 피해를 입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제가 먼저 자리잡아서 하는 것이 중요하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나중에는 경쟁할지 모르지만. 거기서 교회를 정하지 못해 유리방황하는 사람들을 힐링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영적 소비자들을 하나님나라의 생산자, 복음 전도하고 선교하는 능동적인 생산자로 전환시키려고 합니다. 내가 가진 노선을 분명히 문서화해서 맞는 사람과 함께 조율해가면서 아이덴티티를 분명히 하는 목회를 하려고 합니다. 아이덴티티가 정확해야 선교적 다양성을 만들어갈 수 있거든요. 아이덴티티가 약하면 variation하다가 서로 갈라진단 말이죠. 그건 하지 않으려고요. 하나님나라의 아이덴티티를 분명히 가지고 있는 한 사람이 와서 다양한 세포분열을 하게 하는 모드로 할 것입니다. 거기서도 분립교회 모델을 계속 해나가겠다 하는 거고요.
내가 광교로 정하게 된 가슴뭉클한 일이 하나 있었어요. 삼성전자 여직원이 백혈병 걸려서 그 부모가 투쟁하는 다큐멘터리를 보다가, ‘내가 젊었을 때 하다 만 사역인데 저게. 저런 사람들을 돕는 목회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삼성이라는 기업이 갖고 있는 가치관이 우리 국가가 갖고 있는 가치관 이상으로 영향을 미쳐요. 삼성공화국이죠, 대한민국이. 이 가치관에 동의하지 못하는 부분이 상당히 많이 있고요. 또 삼성적 가치관에 사람들이 그냥 흡입되게 놔두는 것보다는 대안을 좀 제시하는 것이 삼성을 위해서도 좋을 거라고 봐요. 그런 측면에서 삼성적 가치관에 가장 크게 희생된 자들을 돕는 목회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노동자 딸의 아버지가 법률적 투쟁을 하는데 삼성에서 돈을 많이 제시하면서 계속 화해해달라는데 거절하더라고요. 그 이유를 묻는 기자한테 그러더라고요. “내 딸하고 똑같은 딸들이 똑같은 병에 걸려 죽어가는데 내가 어떻게 타협하느냐? 나는 못한다. 끝까지 가겠다, 대법원까지.” 제 아내나 제 자식이나 돈만 생각하면 저 고독하고 외로운 싸움을 삼성을 상대로 혼자 못하는데 아버지 마음으로 하거든요. 그게 사랑이 아녜요? 사회적 아버지가 되어 있더라고요. 사회적 부성을 취득했더라고요. 그게 하나님의 아버지되심,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아버지되심인데. 자기 혈연적 아버지를 넘어섰더라고요. 연대적 사랑이 나타난 걸 보면서 저런 사람들을 돕는 교회가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삼성의 도시, 수원으로 가자 이런 생각을 했어요.(하하) 이 말은 하고 싶지 않아요. 사실 언론에 알려지기도 원하지 않고. 괜히 가봤자 하지도 못하면서 욕먹을 수도 있고, 삼성이 괜히 신경쓸 수도 있고. 삼성에 적대적인 사람들만 모이는 공동체가 되기를 원하지 않고요. 오히려 삼성에 속한 사람들도 와서 두 시민권의 통치의 본질에 대해서 갈등하고 고뇌하는 공동체, 이런 건강한 공동체를 만들고 싶어요. 이런 혼합된 공동체의 갈등이 내재된 공동체로 넘어가고 극복해나가는 모델이 되는 그런 공동체를 하고 싶어요. 진정한 내부로부터의 변화, 반성이 있는 개혁, 온유하고 사랑이 있는 정의 이런 것을 위해서는 전투적 공동체를 만들면 안돼요. 외국인 노동자 사역까지 했는데, 우리 노동문제의 현실에 대해선 개입하지 못했고 여러 가지 한계가 있었는데 이제는 내가 좀 할 수 있는 때가 됐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남은 목회는 좀 더 깊이, 하나님 나라의 주변부성을 조금 더, 예루살렘 예수보다는 갈릴리 예수, 다윗 예수보다는 인자되신 예수, 이 쪽에 좀 더 하나님의 거룩한 편파성을 담보해야겠다고 생각해요. 이것이 삼성에도 도움이 될거라고 생각하고요. 삼성 자체를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삼성적 가치관, 삼성적 세계관이 너무 많이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하기 때문에 그 그늘이 가장 짙게 드리운 곳에 가야되거든요. 스불론, 납달리 어두움의 해변에 앉은. 그리로 가야지, 그리로 가자 했어요.
9. 지난 11월 15일에 한국복음주의교회연합 발기인대회가 있었는데, 공동대표로 선출되신 것을 보았습니다. 한기총이 해체되고 있는 국면이라 많은 관심을 받게 되었는데요. 취지가 있으신가요?
지금 한국교회 대표성이 무참하게 무너졌어요. 기존인물들로는 대표성 재건이 어려워요. 다음 세대에서 대표성을 재건하려는 건강한 목사 후배들이 있어요. 후배들을 위해서라도 방파제를 하나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있어서 상당히 의식을 갖고 고민하면서 시작했어요. 제가 좌장이 됐죠. 성서한국운동에 관여된 목사들이나 교회들을 불러모아서 한국교회를 위한 담론을 했어요. 그래서 내린 것이 한기총과 한교협 말고, 한목협 같은 명망있는 인사들의 연합체 말고 다음 세대의 젊은 사람들끼리 방향을 잡아가는 담론 공동체의 필요성을 느꼈어요. 이 담론을 일상적인 목회에 적용하는 공동체가 필요하다 해서 시작했는데, 아이덴티티를 분명히 해야 기장 측이나 다른 단체와도 연대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한국복음주의라는 말을 썼어요. 에큐메니칼 진영과 연대할 수 있지만, 우리 아이덴티티는 복음주의라고 밝힌 것입니다. 한국복음주의교회연합은 사람 중심의 연합입니다, 목사들. 그 다음에 교회가 공동체적으로 참여할 수 있습니다. 교단이나 연대기구의 상층부 조직이 아니라 개교회의 연합입니다. 사람중심의 연합이고 이슈중심의 담론이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한국복음주의가 지금 갖고 있는 선교적 위기와 과제를 토론하고 방향을 잡고 그쪽으로 힘을 모아가자고 했습니다. 이슈 중심의 담론에서는 선교적 디아코니아가 강조되고, 이 안의 복음적 아이덴티티를 위해서는 코이노니아를 강조하고. 코이노니아와 디아코니아를 통해 선교적 과제를 우리가 해결해가자는 것입니다. 한국기독교의 대표성을 몇몇 단체가 갖는 것은 굉장히 불행한 일이고, 그것에 대해서 “아니다”라는 말을 하는 공동체 하나는 필요하다 해서 만든 거죠. 그리고 다음세대를 담아내자는 의도도 있었습니다. 우리가 일할 때에는 홍정길, 김진홍, 이만열, 손봉호 이런 분들이 서주셨거든요. 우리가 80년대 사역할 때. 지금은 저나, 정현구 목사님이나 강경민 목사님 이런 사람들이 다음세대를 위한 울타리 역할을 하자는 말을 합니다. 다음 세대 김영헌 목사님, 김형국 목사님이 활발한데, 이런 분들이 일할 수 있도록 방파제역할을 하고, 앞세대 건강한 분들과의 가교역할을 해야 된다는 얘기를 합니다. 후배들이 건강하게 할 수 있는 담론구조와 선교적인 코이노니아와 디아코니아 구조를 하나 만든다는 것이 첫째 목적이고요. 우리 윗세대 어른들이 원로 아닙니까? ‘원로’를 원칙없는 노인들이라고 젊은 사람들이 그런단 말이예요. 그 분들이 원칙있는 노인들이 될 수 있도록 돕자는 것이 둘째 목적입니다. 이 젊은 사람들의 의견을 위에 계속 소통을 시켜줘야 어른들이 치우친 판단을 안할테니까, 중심부의 오류를 주변부로부터의 소통으로 극복하게 하자 이런 생각으로 가교역할을 하겠다 한거죠. 의외로 반응이 좋아서 우리도 깜짝 놀랐어요. 요구가 있었던 것 같아요. 이대로 같이 공멸할 수 없죠. 한국교회가 침몰하고 있는데, 아직은 이대로 침몰하기에는 아까운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보트 준비하는 거예요. 대안을 준비하는 거죠. 다음 세대를 위한 씨앗을 남기자, 종자를 남기자고.
10. 지금까지 기독교운동을 많이 해오셨는데, 꼭 필요하지만 아직 움직임이 없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뭐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생태부분이예요. 생태운동에 대해 한국교회가 빨리 대답을 준비해야 돼요. 이 문제는 나중에 좌우이데올로기 다 넘어갑니다. 우스갯소리로 정당창당을 하려면 녹색정당을 창당하라고 해요. 기독교인이 미리 선점하라는 거죠. 녹색부분에서 기독교적인 신학과 철학을 반영해야 합니다. 다음 세대에는 녹색문제가 정치 이슈가 될 것인데, 잡지도 이제는 녹색문제를 가지고 신학화하고 철학화하는 작업을 하고 내재화시키는 작업을 한국교회가 해야 해요. 전지구의 위기문제거든요, 지금 생태문제는. 그래서 이 문제에 대해 한국교회의 집중성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로잔 1,2,3. 캐피탈 서약까지 나왔는데 공의회 의제 생태문제가 굉장히 약해요. 빈부격차나 양극화 신자유주의 체제에 관한 것 뿐만 아니라 결국은 자원과 생물학적 종의 위기, 생태변화의 위기 이 부분에 대해서 사회적 일반인식은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는데, 신학적 대응이나 교회적 실천은 너무 떨어져요. 너무 단편적이고 개교회적이거나 개인적이거나 개단체적이예요. NGO도 기독교 환경 NGO가 없어요. 이 NGO는 국가이기주의를 넘어서야 되거든요. 탄소배출권 문제가 국가이기주의 때문에 안되잖아요. 국가가 환경문제 앞에서 자민족 이기주의에 빠지면 생태문제 해결을 못합니다. 그러면 자민족 이기주의를 넘어갈 수 있는 공동체가 누구냐는 거예요. 유엔, NGO? 이미 2천년 존재했던 기독교가 가능해요. 기독교야말로 국가주의, 인종주의, 민족주의를 넘어갈 수 있는 우주적인 기초를 갖고 있으니까요. 기독교야말로 이 우주적인 지구적 위기에 대한 역할을 할 수 있거든요. 이 부분에서 한국교회가 아직 너무 준비가 안되어 있어요. 재벌, 산업체, 국가와 싸울 준비를 해야 해요. 소비자들을 설득하여 소비자들의 오피니언 리더십을 확보하고 생태적 소비자연대를 만들고, 자본과 거대기업에 대한 저항권을 형성하고, 이를 백업하는 가진 자들의 국가법률이나 체제를 변화시켜내는 정치세력이 나오고, 이런 문제를 단순한 국가나 민족이 아니라 국제적인 연대를 통해 압력을 가하고. 이렇게 문제를 극복하려는 시야를 갖고 있는 단체가 준비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죠.
11. 목사님의 말씀을 듣고 있노라니 새로 시작할 목회의 방향성이 연상되는데요. 어떻게 관련될 수 있을까요?
이런 면에서 저는 새로 시작할 목회의 방향성을 생태목회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성장, 성공, 번영에 대한 반대급부죠. 그걸 경제논리가 아니라 생명논리로 풀어야 돼요. 갈수록 생명에 대한 외경, 하나님나라의 생명이라는 것에 대해서 굉장한 경외심을 가지게 됩니다. 거듭남, 회복, 재활, 신앙재활, 공동체, 그다음에 리크리에이션. 성장이데올로기가 결국은 지구생태계의 위기로 와버렸기 때문에 근원적 반성을 해야 합니다. 16세기 캘빈의 모델은 근대화 패러다임, 포스트 모던시대에는 새로운 캘빈이 나와야 돼요, 우리 시대에 적합한. 그건 실험적 공동체가 없이는 안나와요. 그런 측면에서 생태적 문제를 화두로 삼는 그리스도의 공동체를 실험적으로 꾸준히 해나가야 하는데, 그렇다고 전원으로, 산으로 가자는 것이 아닙니다. 생태문제는 도시문제예요. 오히려 생태위기가 극한 원인인 도시 안에서 생태공동체를 꿈꿉니다. 계시록 21장은 에덴동산의 회복이거든요. 생명수. 그 개천 양쪽으로 많은 사람이 왕래하는 길이 있어요. 도시 안에 에덴이 회복되는 것, 도시와 에덴의 통합이예요. 문명, 성장, 성공, 번영 온갖 공해의 근원인 도시가, 거기서부터 생태복원력을 회복하기 위한 꿈을 꿔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도시만의 그런 공동체를 해야 하지 않느냐 생각합니다. 자그마한 것에서. 그래서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교회 안의 셀처치입니다. 이것이 생태적 공동체가 되어야 몸이 그렇게 변합니다. 본질 변화는 제도가 아니라 셀의 변화예요. 소그룹 공동체. 이 셀을 생태적 공동체로 만들어야 해요. 그래서 나는 텃밭공동체를 만들려고요. 친환경적 생태적 삶을 살아야 되거든요. 우리 교회 목장공동체가 다 텃밭공동체로 간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도시민들도 주말마다 텃밭을 할 수 있다, 차 몰고 나가면. 그래서 한 가정당 텃밭하나씩 운영하고 한 목장이 공동텃밭을 운영하면서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텃밭분양을 해주어 그것으로 교제하게 하고. 분양이 덜된 텃밭의 푸성귀는 아파트에 사는 안믿는 가정들에게 매주 나눠주는 거죠. 생태적인 삶을 통해서 친교도 하고 전도도 할 수 있는, 그렇게 해서 의식이나 교육이 아니라 바닥에서 시작한다 이거예요. 도심에 미션센터가 있지만 바로 도심 바깥에 텃밭을 크게 임대하려고 합니다. 교육위기, 생태위기 두 가지를 가지고 도심으로 들어간다는 거죠.
12. 목사님께 받는 인상은, 기득권을 누리지 않는 리더십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것이 뿌리깊이 배어있다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지금을 살고 있는 목회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영성적 측면은 어떤 것이라고 보시나요?
누리고 싶은 마음이야 본능적으로 항상 있지요. 그러나 그러면 예수님을 믿는 것이 너무 초라한 것 같아요. 이게 기독교라면 예수님이 너무 초라하다는 생각을 해요. 스님들만도 못하니까. 누가 그러더라고요. 기독교가 왜 이렇게 기득권 구조에 집착하는 기독교가 됐을까? 사역이나 미션이나 이런 것은 참 열심히 하는데 자기 수행이 부족해서 그렇다고요. 자기부정에 대한 내면화 작업이 약할 때, 힘이 생기고 돈이 생기면 무너지죠. 없으면 열등감에 시달리지만, 열등감은 바깥으로 잘 안드러나니까. 그런데 자기부정의 영성이 약한 상태에서 돈 생기고 사람 생기면 승리주의 기독교, 확장주의 기독교로 발전하고 그게 사람들에게는 오만한 기독교로 보여요. 그것을 통제하지 못하는 거죠. 그러니깐 애써도 오만해요. 겸손하려고 애쓰는데도 오만하거든. 너무 자신감이 충만한 거예요. ‘하면 된다’는 ‘아이 캔 두 스피릿.’ 어떻게 기독교가 항상 승리주의 기독굡니까? 승리가 있어요. 그러나 종말론적인 것이 더 근원적이고 현실 속에서 안 그런 경우가 훨씬 많아요. 기독교 2천년에 기독교가 사회의 다수가 되고, 순교를 안당하면서도 떵떵거리고 살던 때가 몇 번 있었습니까? 몇 번 없었거든요. 우리가 딱 2,30년 겪고 있는데 2천년 기독교가 그런 걸로 착각하는 거 같아요. 지금 한국교회가 자가당착, 자폐적 영광에 사로잡혀 있다고 봐요.
GDP가 2만불이 넘는 현실에서는 청빈의 영성 실천하기 어렵습니다. 그건 수도승만 가능해요. 성프란시스코만 가능해요. 불교도 가능해요. 가톨릭도 가능해요. 그런데 개신교는 안돼요. 개신교는 생활 속의 영성이거든요. 광야의 영성이 아니라고요. 일상성의 영성에서는 청빈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저는 절제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한발자국만 내려놓자는 거죠. 직장생활하는 사람이 어떻게 청빈하게 수도승처럼 살아요? 절제만 하면 돼요. 절제를 가르치는 기독교. 지속가능한 영성을 하자는 것이고, 극단주의로는 가지 말자는 것입니다. 청지기 정신 좋고요. 거기 기초한 절제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초대교회나 중세수도원전통에서 나오는 기독교 분명히 한 세력입니다. 공동체주의, 은둔자주의 혹은 청빈주의. 이건 극단적인 거예요. 그리고 세속주의, 성장주의, 현세적 권력을 추구하는 기독교도 또 극단이죠. 둘 다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잠시 수련을 위해서는 청빈공동체로 가서 광야의 영성을 배워야지요. 그러나 일상으로 돌아와서는 절제해야죠. 빛과 소금의 독특성을 유지해야 하는데 그걸 절제라고 봐요. 생태운동도 다 버리고 자연으로 돌아가자? 아니예요. 도시 안에서 절제합시다. 절제의 영성을 가지고 살아야 되는 시대이지요, 모두. 절제하지 않으면 모두 죽으니까요.(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