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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정토회 행자대학원 9기 졸업식이 있었습니다. 졸업생 행자님들은 3년 간의 수행 생활을 통해 공통의 과제로 느끼게 된 것을 스님에게 질문했습니다.
“마음대로 하려는 성질이 강하고, 바라는 것도 많아요. 남에게 잘 보이고 싶고, 인정받고자 하는 마음이 큽니다. 어떻게 해야 이런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스님은 이에 대해 대답하면서 왜 우리가 행복하지 못한지 그 이유를 짚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졸업 이후 어떻게 수행을 해야 지속가능한 행복에 이를 수 있는지 강조했습니다.
“왜 우리는 행복하지 못할까요? 첫째,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려는 게 강하기 때문입니다. 먹고 싶을 때 먹어야 하고, 자고 싶을 때 자야 하고, 하고 싶을 때 해야 해요. 이렇게 하고 싶다는 걸 못 버리고 움켜쥐고 있기 때문에 지속가능한 행복을 얻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우리 모두는 지금 그걸 움켜쥐고 그게 뜻대로 안 된다고 악을 쓴단 말이에요.
둘째, 바라는 게 많기 때문입니다. 높은 지위, 인기, 돈을 원해요. 이런 걸 원하는 것까지는 좋은데, 노력해서 얻으려고 하지 않고 공짜로 주어지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욕심을 부리니까 현실에서는 이루어지지 않으니 괴롭죠.
셋째, 남에게 잘 보이고 싶어 하고 칭찬받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칭찬을 안 해주고 잘 안 봐주니까 괴로워져요. 칭찬받고 싶다는 건 그 사람에게 노예가 된다는 거예요. 강아지가 주인에게 잘 보이려고 꼬리 흔드는 것과 같아요. 주인이 되지 못한다는 겁니다.
우리는 늘 이런 문제에 묶여 삽니다. ‘내 뜻대로 하고 싶다, 내가 원하는 대로 이루고 싶다, 잘나고 싶다, 잘 보이고 싶다’ 여기에 묶여서 인생을 살기 때문에 남이 볼 때는 좋아보일지 몰라도 이 세상 많은 사람들이 다 속박 받는 삶을 살면서 괴로워하는 거예요.
부처님은 이런 속박 받는 삶으로부터 벗어나서 자유로운 삶, 행복한 삶, 당당한 삶의 경지에 이르셨습니다. 그리고 본인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다 그렇게 될 수 있다고 하면서 그 길을 우리에게 제시하셨어요.
부처님 당시의 예를 하나 들어볼게요. 부잣집 젊은이 서른 명이 애인을 한 명씩 데리고 맛있는 음식을 잔뜩 마련해서 봄놀이를 갔어요. 공원에서 술 마시고 춤추고 노래하면서 파티를 즐겼습니다. 한참 놀다가 술에 취해서 애인끼리 껴안고 잠이 들었는데, 눈을 떠보니까 자기들의 귀한 보석이 모두 없어진 거예요. 팔찌며 목걸이며 돈 가방이며 모조리 없어졌어요. 어떻게 된 건지 알아보았더니 보석과 함께 여자 한 명이 없어졌어요. 여자를 데려왔던 친구에게 ‘네 애인이 없다. 어떻게 된 거냐?’ 하니까 다른 친구들은 다 진짜 자기 애인을 데려왔는데 이 친구는 애인이 없어서 유녀를 애인 삼아 데려왔던 거예요. 그 유녀가 다들 잠든 틈을 타서 보석을 모두 훔쳐서 도망가버린 겁니다.
서른 명의 젊은이들은 성질이 나서 다함께 그 여자를 잡으려고 막 쫓아갔어요. 가다보니까 아무도 없는 숲속에 한 수행자가 나무 밑에 떡 앉아 있는 거예요. 이 수행자가 부처님이었어요. 젊은이들은 저 사람이 뭘 봤겠지 싶어서 물었어요.
‘여보시오, 방금 어떤 여자가 이리로 도망가는 걸 못 봤소?’
‘왜 그러시오?’
‘그 여자가 우리들의 보석을 다 가지고 도망을 갔소. 그러니 어디로 갔는지 빨리 말해주시오.’
그러자 부처님이 그 젊은이들을 물끄러미 보더니 이렇게 물었어요.
‘여보게들, 잃어버린 자기 자신을 찾는 것이 중요한가? 잃어버린 보석을 찾는 것이 중요한가?’
‘그야 잃어버린 보석보다는 잃어버린 자기 자신을 찾는 것이 더 중요하지요.’
이 청년들이 그렇게 술 마시고 놀아도 지혜가 좀 있었는지 이렇게 대답을 했어요. 보석보다 자기가 중요하다는 걸 안 것만 해도 굉장하잖아요.
‘그렇다면 여기 앉아보게.’
이렇게 해서 부처님이 설법을 하셨어요. 그 설법을 듣고 이 사람들이 마치 악몽을 꾸다 깬 것처럼 눈이 떠진 거예요.
‘부처님, 저희도 출가하겠습니다. 제자로 받아들여 주소서’
청년들이 청하니까 부처님이 이렇게 한 마디로 받아들여 출가를 허락했습니다.
‘오라, 비구여.’
여러분들에게도 제가 지금 법문을 하면서 ‘오라, 비구여’라고 하는 겁니다.(모두 큰 웃음)
이렇게 해서 서른 명이 한꺼번에 스님이 된 이야기가 있어요. 이 청년들의 모습을 보면 오늘날 사회하고 비슷합니다. 요즘 한국 사회나 미국 사회나 유럽 사회의 젊은이들은 옛날로 치면 다 부잣집 젊은이에 속해요. 먹는 것, 입는 것, 자는 것에 아무런 구애 없이 자란 사람들이잖아요. 여러분들만 해도 부모가 부자든 가난하든 다들 집에 형제가 한 명 혹은 두 명 일거예요. 그러면 지금 한국 사회에서 엄마 아빠가 무슨 일을 하든 여러분들 하나 정도 키우는 데는 문제가 없어요. 분유도 좋은 거 사 먹이고, 기저귀도 좋은 거 채우고, 아프다고 하면 금방 병원에 데려가고, 옛날로 치면 왕자나 공주가 하나도 부럽지 않도록 여러분들을 다 애지중지하며 키웠어요. 초등학교 보내고, 중학교 보내고, 고등학교 보내고, 자기가 가기 싫어서 안 갔으면 몰라도 다 대학까지 보내줬어요. 옛날에 부잣집 아이들이 그러듯 여러분들은 하나도 힘 안 들이고 부모의 뒷받침을 받아서 자라고 학교도 갔습니다.
그런데 우리 세대는 그렇지 않았어요. 우리는 초등학교 졸업하면 중학교는 자기가 알아서 가야 했어요. 학비도 자기가 벌고 학교도 자기가 선택했어요. 누가 도와줘서 한 게 아니에요. 그렇게 보면 우리 세대는 가난한 집 아들딸에 속하고 여러분들은 다 부잣집 아들딸에 속합니다. 그러니 저는 출가할 일이 없지만 여러분들은 다 출가를 해야 하는 거예요.(모두 웃음)
어쨌든 옛날에 비하면 여러분들은 다 부잣집 아들딸인 셈입니다. 인도 천민 마을 아이들에게 여러분은 세상 부러울 게 없는 사람들이에요. 비행기표값을 백만 원씩 내어가면서 인도에 봉사하러 오는 사람들이니까요. 그 아이들에게는 그 돈이 10년은 살 돈이거든요. 심지어 돈 벌러 오는 것도 아니고 봉사하러 그 돈을 내고 비행기 타고 오는 사람들인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들은 부모의 보호처인 그 좋은 집을 두고 여기에 왜 왔어요?(모두 큰 웃음)
여러분들이 집을 나왔다는 것은 왕궁을 두고 나온 셈이에요. 왜 왕궁을 두고 나왔을까요? 인도 아이들이 여러분을 보면 ‘그런 집에서 괴로울 일이 뭐가 있나’ 하지만 여러분들은 다들 사는 게 힘들어서 여기 온 거잖아요. 그런데 왜 힘든지 생각해봤어요? 밥을 못 먹어서 힘들었어요? 옷을 못 입어서 힘들었어요? 잠을 못 자서 힘들었어요? 학교를 안 보내줘서 힘들었어요? 그런 것도 아닌데 힘들었잖아요. 그러니 무엇으로 이 병을 치유할 수 있겠어요?
그러니 오늘 우리들의 번뇌는 바로 부처님의 문제의식과 같은 거예요. 부처님이 왕궁에서 생활했다고 해도 따져보면 요즘 우리들 수준 정도였을 거예요. 주위에 굶어죽는 사람이 워낙 많은 사회이다 보니까 그런 생활이 더욱 굉장해 보였던 거죠. 그 시절에 아무리 비단옷을 입었다 하더라도 지금 우리가 입는 옷만큼 좋을까요? 그 시절에 아무리 왕궁을 아름답게 꾸몄다 해도 요즘 에어컨 있는 집보다 나을까요? 그때는 에어컨도 없고 아이스크림도 없었어요.(모두 웃음)
부처님의 문제의식은 어쩌면 오늘날 현대인들이 갖는 문제의식과 같기 때문에 부처님의 법이야말로 오늘날 우리들이 고뇌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해답이 되는 거예요. 부처님과 우리가 같은 상황에 처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졸업하게 되면, 집에 가는 걸 두려워할 필요도 없고, 집에 가기를 원할 필요도 없어요. 그런데 여러분들이 지금 집에 가면 어떻게 될까요? 다가오는 추석에 집에 가면 맛있는 음식도 해놓고, 결혼한 언니도 오고, 조카도 오고, 동생도 와서 다 어울려 놀겠죠. 다들 결혼생활 힘들다, 직장생활 힘들다 하는데 여러분들은 얼굴이 밝을까요?(모두 웃음)
다른 사람들은 술 마시고 밥 먹느라 정신이 없을 때 나는 조금만 먹고 일어나서 다른 사람들 먹으라고 음식도 해주고, 가족들 잘 수 있게 이부자리도 깔아주고, 방청소도 하고, 이렇게 될까요?
옛날에는 아침에 혼자서는 못 일어나고 밥을 다 해놔야 겨우 일어났었는데, 이제는 집에 가면 자기가 먼저 일어나서 아침밥 딱 차려놓고 ‘어머니, 식사하세요’ 이렇게 말하고 설거지도 딱 해놓는 겁니다. 언니가 결혼생활 못해서 힘들다 할 때 상담도 해주면, 말로는 ‘너가 아직도 정신을 못차렸구나’ 이러면서도 나중에는 ‘아이고, 쟤는 이제 걱정 안 해도 되겠다’ 하면서 걱정을 딱 그만둡니다. 그리고 자기들이 괴로우면 여러분에게 찾아오게 됩니다. 그게 가족 교화예요. 집에 가서 정토회가 어떻고 저떻고 이야기한다고 교화가 되는 게 아니에요. 음식을 걸신들린 듯이 먹고, 막 퍼져서 자다가 일어나서는 ‘우리 정토회가 어쩌고 저쩌고’ 해봐야 아무 도움도 안 된다는 이야기예요.(모두 웃음)
이제 3년 공부 했으니 이번 추석에 집에 보내서 테스트를 해봐야겠어요.(모두 웃음) 집에 갔다가 돌아올 때 언니가 따라오고 조카가 따라오는지 어디 한번 봅시다.(모두 박수)
이런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 우리는 먹는 것도 너희보다 못하고, 입는 것도 못하고, 자는 것도 못하고, 다 못하다. 그렇다 하더라도 자유와 행복에 있어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나보다도 더 행복하게 사는 사람 있으면 어디 한 번 나와 봐라’ 이렇게 당당하게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해요.
수행이라는 것은 내 인생을 누구한테 의지하는 게 아니라 내 인생을 내가 사는 거예요. 남이 칭찬한다고, 남이 무엇을 해준다고, 남이 어떻게 한다고 거기에 휘청거리는 게 아니라 내 인생은 내가 사는 거예요. 이제는 부모님한테 요구할 것도 없고, 하느님한테 요구할 것도 없고, 부처님한테 요구할 것도 없어요. 지난 3년 동안 내가 어떻게 마음을 가지면 좀 더 자유로워지고 행복해질 수 있는지 좀 알게 되었잖아요.
이제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야 합니다. 이 세상사람 대부분이 자기 인생도 제대로 못 살아서 도와달라며 아우성이니까 좀 도와주라는 거예요. 이렇게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도와주는 사람이 보살이에요. 물론 나는 내 인생을 책임지고요. 이 세상 사람 대부분이 자기 인생을 자기가 책임 못 지고 남보고 도와달라고 하는 중생인데, 그 중생의 요구에 수순해서 좀 도와주라는 겁니다.
도와주는 방법에는 크게 두 가지의 길이 있어요. 하나는 자기 인생을 자기가 주인 돼서 살도록 이 좋은 법을 전하는 ‘전법’입니다. 또 하나는 당장 밥 달라면 밥을 주고, 의지처가 되어 달라면 의지처가 되어주는 방법이에요. 인도의 천민 마을에는 당장 밥이 없으니까 밥을 주고, 학교가 없으니 학교를 지어주고, 병원이 없으니 병원을 지어주고 도와주는 거예요. 그런데 한국은 그런 정도는 아니에요. 말로는 ‘밥 달라, 옷 달라’ 하지만 그게 옷 주고 밥 준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에요. 이미 옷도 있고 밥도 있는데도 괴롭다며 난리니까요. 그래서 이 좋은 법을 전하고 깨우쳐줘서 그도 나처럼 행복하게 살도록 하자는 겁니다.
이제는 우리가 세상에 좀 보탬이 되는, 남에게 보탬이 되는 인생을 살아봅시다. 남에게 보탬이 되는 인생을 살면 심리적으로 보람이라는 게 생깁니다. ‘아, 참 보람 있는 일을 했다. 그거 참 잘했다.’ 이런 뿌듯한 마음이 생겨요.
반대로 남한테서 뭘 얻을 때 그 순간은 기분이 좋지요. 이건 욕구에 따른 거니까요. 그런데 그걸 계속 얻어보면 마냥 좋은 게 아니에요. 여러분들이 어떤 사람에게서 매달 백만 원씩 얻는다고 생각해보세요. 처음에는 기분이 좋지만, 그 사람에게 매달 돈을 얻는 걸 10년 쯤 계속하다 보면 그 사람한테 심리적으로 위축이 되고 그 사람 눈치를 보게 돼요. 자기도 모르게 그 사람한테 종이 되는 거예요.
자기 인생을 자기가 책임지는 것, 이게 수행이에요. 그리고 남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인생을 사는 것, 이게 보살이에요. 그래서 대승 수행자는 자기 인생을 자기가 책임지는 ‘상구보리’를 하고, 남의 인생에 조금이라도 도움 되는 ‘하화중생’을 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전쟁이 없도록 만들면 전쟁으로 인한 엄청난 피해와 난민들 행렬 같은 것을 막을 수 있어요. 빈부 격차를 좀 줄여주면 열등의식 속에 사는 많은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을 조금 더 아름다운 세상으로, 정의로운 세상으로 만드는 일을 우리가 함께 해야 합니다.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가 중요합니다. 내 인생도 제대로 살고 남의 인생에도 도움이 되는 삶을 사는 게 좋아요? 아니면 자기 인생도 하나 못 살아가지고 맨날 이 사람 원망하고 저 사람 원망하면서 ‘이것 도와달라, 저것 도와달라’ 구걸하며 사는 게 좋아요?
저는 이렇게 생각해요. ‘나 같으면 쌀밥 먹고 거지 되느니 보리밥 먹고 주인 되는 게 낫겠다. 나 같으면 비단옷 입고 거지 하는 것보다는 무명옷 입고 주인 되는 게 낫겠다. 나 같으면 기와집에 살면서 종 노릇 하느니 초가집에 살면서 주인 노릇 하는 게 낫겠다. 나 같으면 남의 머슴살이 하면서 주인집 논 백 마지기 경작하느니 내 논 열 마지기 자작농 하는 게 낫겠다.’
이게 어떤 인생을 살 거냐는 거예요. 대기업에 취직해서 고개도 못 들고 시키면 시키는 대로 종노릇 하면서 300만원 받는 게 낫겠어요? 장애인들 도와주는 일 하면서 150만원 받는 게 낫겠어요? 저라면 150만원 받고 남 도와주면서 내가 인사 듣는 쪽을 선택하겠어요. 이게 인생관이에요. 여러분들이 이제 어떤 인생을 살 거냐, 어떤 사람이 되고자 하는가, 이게 중요합니다.
그런 데서 이번에 행자대학원을 졸업한 여러분들이 자신을 가만히 돌아보길 바랍니다. 전에는 유수 스님이 3년만 지나면 환골탈태할 수 있다며 유혹했던 말에 빠져서 지금까지 살았다고 할 수 있어요. ‘3년 되면 뭐가 바뀌겠지’ 했는데, 3년이 지난 지금 ‘속았나’ 싶은데 오늘 또 유수 스님이 3년 더 지나야 뭐가 변한다고 하죠?(모두 큰 웃음)
그 낚싯밥을 또 물 것이냐, ‘에이’ 하고 도망갈 것이냐 하는 문제가 아니에요. 이제는 내가 내 인생을 어떻게 살거냐 하는 문제가 되어야 합니다. 법륜 스님도 생각하지 말고, 유수 스님도 생각하지 말고, 이제는 ‘내 인생을 내가 어떻게 살 거냐?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자 하는가?’를 생각해야 해요.
세상 사람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느냐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사실 산다는 게 별 거 아니에요. 길가에 핀 한 포기 풀과 같아요. 칭찬해본들 풀이 좋아하지 않아요. 밟아 봐도 싫어하지 않아요. ‘너야 밟든지 칭찬하든지 너 알아서 해라. 밟으면 지나간 뒤 일어서면 되지’ 이런 식으로 대지에 뿌리를 박고 당당하게 살아가잖아요. 야생화가 사람들이 봐주면 피고, 안 봐준다고 안 피나요? 야생화가 자신의 아름다움을 스스로 즐기듯이 우리 인생이 별 거 아니라고 알면 이제는 옛날처럼 구걸 안 하고 살 수가 있어요. 결과적으로 그게 당당한 인생이에요.
그래서 부처님이 늘 뭐라고 했어요? ‘나의 제자 수행자들아, 교만하지 말고 겸손해라. 비굴하지 말고 당당해라.’ 수행자는 교만해서는 안 돼요, 겸손해야 합니다. 비굴해서는 안 돼요, 당당해야 합니다.”
스님의 감로와 같은 법문에 9기 졸업생들과 대중들은 큰 박수로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특히 9기 졸업생 중 한 분은 명예졸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행자대학원 과정 중에 병환이 찾아와서 항암 치료를 받느라 학기를 모두 이수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오늘 졸업식만큼은 함께 자리해서 명예 졸업장을 수여하기로 한 것입니다. 스님은 투병 중인 행자님을 위해 특별히 격려 말씀을 더 해주었습니다.
“병을 낫게 하겠다 이런 생각을 하지 마세요. ‘하루를 살아도 좋고, 이틀을 살아도 좋다. 수행자가 뭐 그런 데 집착하느냐?’ 이렇게 태평하게 살아야 행복하게 살아요. ‘언제 병이 낫지?’ 이러면 늘 조마조마하다가 죽어요. 오래 사는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이차돈은 22살에 죽었는데 행자님은 22살 넘었죠?(모두 웃음)
예수님은 33살에 죽었는데 33살은 넘었어요? 예수님보다 많이 살았으니 괜찮아요. 걱정할 것 없어요. 마음을 수행자답게 턱 놓고 살아야지, 세상 사람들처럼 병에 전전긍긍하면 안 돼요.
항암 치료를 받고 있으니까 통증은 좀 힘들긴 하겠지만 그런 것에 연연하면 초라해 보이잖아요. 의사가 놀랄 정도로 행복하게 사세요. 내일 죽는다고 해도 ‘아이고, 내일요? 그러면 아직 하루나 남았네요! 초로 계산하면 이게 얼마야’ 하면서 태평하게 지내세요. 그래야 나는 죽지만 그 의사는 나를 보고 불법에 귀의하게 되는 거예요.(모두 웃음)
그런 당당함이 있어야 합니다. 특별히 병을 안고도 졸업식에 참석한 행자님을 위해서 박수 한 번 부탁드립니다.”(모두 큰 박수)
병환을 앓고 있는 행자님의 어머니도 함께 졸업식에 참석했는데, 스님의 격려 말씀에 어머님은 흐느껴 우시며 감동의 눈물을 보였습니다.
출처 | http://www.jungto.org/buddhist/budd8.html?sm=v&b_no=749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