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녀에게 신이 내려져 있다.
나는 알 수 있었다.
‘아마도 신이 내리지 않았을까?’ 어렴풋 짐작은 했다만, 그녀와 처음 자게 된 날 확실히 느꼈다.
끈적한 어둠이 찰랑 고인 호텔 방안에서 그녀 까만 인광이 반짝 빛났다.
깜깜한 어둠 속에 검게 반짝이는 눈동자라니.
검게 반짝이는 그녀 눈동자가 무서웠다.
무섭기도 했지만,
인연은 서로간 업씻김 일지도.
어둠속 검게 반짝이는 인광을 마주 바라보며
그녀를 안았다.
2.
발리를 가자고 했다.
왜 하필 발리를? 묻자,
그녀는 ‘신들의 섬’ 이라는데 얼마나 아름다우면 신들조차 반하겠냐는 대답을 했다.
6시간이나 걸리는 비행 시간이 마뜩찮았지만 우리는 발리로 떠났다.
신들 조차 반한다잖아요.
그녀는 공항에서 내 팔짱을 낀 채 내내 조잘거렸다.
3.
현지 가이드는 자신을 ‘디안’ 이라고 소개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현지인이 가이드를 해야 한다고 했다.
디안은 자판기에서 덜컹 뽑아져 나온 미소를 짓고 있었다.
미소 뒤에 숨겨진 날선 표정도 같이.
기분 탓인가? 생각했지만,
분명 그는 공장에서 찍어낸 듯한 친절하고 상냥한 미소 뒤로 아주 퀴퀴하고 불쾌한 냉소를 뿜어냈다.
4.
예약한 풀 빌라 리조트는 생각보다 깊고 깊은 정글 속에 위치했다.
우리는 승합차에 실려 마치 대관령처럼 굽이진 길을 계속 달려 나갔다.
멍하게 있다 차창 밖을 바라보니 굽이진 이차선 열대 정글 속에 우리 차만 달리고 있었고, 길가에 개들이 쭉 늘어서 있었다.
길섶으로 늘어선 개들은 미동조차 앉은 채 우리를 바라 봤다.
도로 옆 정글 곳곳에 자그마한 신전이 놓여 있었고,
인적도 보이지 않는 이곳에 누가 와서 향을 피워 놨는지 신전마다 향 연기가 가득했다.
발리가 정말 아름다운 섬인가 봐요 신들의 섬이란 별칭이 붙은 걸 보면. 나는 디안에게 물었다.
내가 묻자 디안은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바라 봤다.
신들의 섬이라고 불리는 이유는요,
디안은 떠듬떠듬 말했다.
한국인 가이드를 오래 했다고 하지만, 여전히 풀 먹인 이불처럼 발음이 거칠다.
신들이 많아서 입니다.
그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아....네. 나는 고개를 끄떡였다.
이 곳은 신들이 아주 많아요. 조심하시는 게 좋을 겁니다.
그는 말했다.
무슨 소리야? 신들이 많은데 조심하라니.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무언가 더 물어 보기가 힘든 느낌이 들게 했다.
그 때,
내 팔짱을 끼고 있던 그녀가 어느 한 지점을 바라 봤다.
텅 빈 정글 속 한 부분을.
나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나 둘러 봤지만,
그녀가 바라보는 지점에 아무 것도 없었다.
왜 뭐가 있어? 라고 묻자
아니, 아무 것도.
그녀는 도리깨질 치며 대답했다.
그리고 그 때.
디안이 그 쪽을 향해 합장을 한 채 연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5.
우리가 예약한 풀 빌라 리조트는 고즈넉했다.
신혼 여행객들이 자주 찾는다던데, 비수기인가? 의아했지만.
뭐 어때요. 조용하면 우리는 좋지. 그녀는 대수롭지 않게 말을 받았다.
방을 배정 받고 짐을 풀었고.
그녀는 개별 풀 안으로 뛰어 들었다.
나는 가지고 온 책을 들고 정원내 정자에 누웠고, 각자의 망중한을 즐겼다.
저녁을 보내고 식사를 하고.
풀에서 시간을 보내던 그녀가 정자로 다가와 말했다.
그런데 오빠, 아까 그 정글 속에 있던 그 여자 좀 이상하지 않아요?
정글 어느 여자?
나는 의아했다.
우리 차가 정글을 지나오는 동안 마주친 사람은 없었기 때문에.
아니 그 왜 우리 차 지나갈 때 우리 보고 빙긋 웃었던 여자 있잖아요.
무슨 소리야, 나는 못 봤는데?
못 봤어요? 나는 오빠도 같이 쳐다 보기에 같이 본지 알았지. 디안은 그 여자한테 합장하고 인사도 하던데.
그래? 그럼 내가 못 봤나 보지.
그 때만 해도 내가 못 봤던 것이라 생각했다.
심각하게 생각지도 않았고, 못 봤을 수도.... 생각 했다.
6.
기묘한 꿈을 꿨다.
꿈속, 낮에 지나왔던 정글속 길을 가는데 도로 가득 개들 머리만 피투성이가 된 채 널려 있었다.
개들은 머리만 남은 채 눈을 빤히 뜨고 나를 쳐다보고 있었는데, 머리만으로 도로를 기어 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길 옆에 어떤 여자가 한 명 서 있었다.
155 정도의 작은 키지만 단아하고 아름다웠다.
긴 생머리를 한 채 나를 보고 웃고 있었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차 안에 나 혼자 타고 있었다.
꿈이었구나.
식은땀을 흘리며 벌떡 일어났다.
그런데,
옆자리 그녀가 없다.
시간은 두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잠들기 전 과음한 인도네시아 민속주 숙취가 지끈 올라 왔다.
방안을 둘러 봤지만 그녀가 보이지 않는다.
그녀는 리조트 정원에 혼자 서 있었다.
주섬 거리며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정원에서 멍한 표정으로 정글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을 반쯤 뜬 채.
정원에 켜진 조명을 받아 인광은 두드러지게 반짝였다.
그녀는 시커먼 배레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시커먼 속이 너무 깊고 깊어 아득해 보였다.
입으로 무언가 조물조물.
그것은 노래였다.
이 새벽에 혼자 정원에 서서 노래를 부르고 있다니.
여기서 혼자 뭐하는 거야.
몰려온 공포감을 감추며 짐짓 밝은 목소리로 물었다.
여전히 그녀는 입으로 무언가를 조물거리며.
뭐? 뭐라는 거야?
웅얼대는 소리를 듣기 위해 귀를 그녀 입에 바투 댔다.
노래는 처음 들어 보는 노래였다.
서정적이고 좋은 멜로디에.
그런데.
한국 노래가 아니다.
팝송도 아니고.
처음 들어 보는 익숙치 않은 언어였다.
7.
어딘가 코스를 향하는 내내 승합차 안에서 내내 졸았다.
새벽 내내 나는 그녀를 어르고 달랬다.
무표정한 그녀를 끌고 방으로 들어갔고.
그녀는 죽은 이처럼 무표정하게 노래를 계속 불렀다.
그러다 가끔 씩 웃었고, 간헐적으로 크게 소리 내 웃는 행동을 반복했다.
몇시간여 나를 소름이 오싹 돋게 만들고는 제 혼자 스르르 잠들었다.
나는 승합차 창가에 머리를 기대고,
이 곳에 오는 게 아니었는데,
중얼중얼 뇌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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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글 역사상 처음으로 브금 있습니다. 꺄울~~~
귀차니즘이 극에 달해 이런 짓 안 하는데.
이 글에 들어가야 할 음악이라서 끙차끙차 힘들게 꾸겨 넣어 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