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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비잔티움 제국사(23) - 생존을 위한 몸부림
게시물ID : history_7935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리볼버오셀롯
추천 : 5
조회수 : 694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3/03/05 17:32:14

http://cafe.daum.net/shogun 의 푸른 장미님이 쓰신 글입니다.

 

유스티니아누스가 세상을 뜨고 몇 해 안 되어 침략자들에 의해 사방에서 국경이 뚫리기 시작했고 이후 한 세기 반 동안 비잔틴 제국은 생존을 위한 필사적인 몸부림을 쳐야 했다.

유스티니아누스의 뒤를 이어 그의 조카 유스티누스 2세가 황위에 올랐고 황후 소피아는 테오도라의 조카였다. 유스티누스 2세 재위 기간 중 동쪽에서는 페르시아군이, 북쪽에서는 발칸 반도로 이주한 중앙아시아 종족 아바르족이 침략해 왔다. 본래 정서가 불안했던 유스티누스 2세는 침략자들의 맹공격에 신경쇠약에 걸렸고 끝내 회복되지 못했다. 에페소스 출신의 연대기 작가 요하네스에 따르면 유스티누스는 마음이 안정되었을 때는 음악가의 세레나데를 들으며 장난감 수레를 타고 궁전 안을 돌아다니는 것이 유일한 오락거리였다. 그러다가 갑자기 분노가 폭발하여 수행원들을 물어뜯으려고 덤비고 궁전 창 밖으로 몸을 던지려고 해서 창문에 창살을 박아높아야 했다.

 

유스티누스 2세

 

사산조 페르시아의 군대

 

578년에 유스티누스 2세가 죽자 티베리우스 2세가 즉위했다. 그는 582년에 세상을 하직할 때까지 제국을 다스리다가 마우리케에게 황위를 물려주었는데 마우리케는 카파도키아(소아시아 중앙에 위치한 고원지대)인으로 소아시아에서 황실군을 지휘했던 인물이었다. 20년의 재위 기간 동안 마우리케는 페르시아군과 아바르군을 저지했다. 한편 라벤나와 카르타고에 총독을 두어 6세기 말까지 제국의 미래는 안전한 듯 했다.

 

티베리우스 2세

 

그러나 602년 초가을 백인대장 포카스가 이끄는 도나우 강의 황실군이 반란을 일으켰다. 포카스는 황위를 찬탈하고 마우리케와 그의 다섯 아들들을 참수시켰다. 연대기 작가 테오파네스는 이 사건으로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다. “포카스는 그들의 머리를 여러 날 동안 헤브도몬에 두게 했다. 그리하여 그곳 시민들이 머리에서 썩은 냄새가 진동할 때까지 나와서 구경했다.”

 

이후 6년간 코스로에스 2세가 거느린 페르시아군이 아르메니아, 메소포타미아, 시리아, 팔레스타인을 거쳐 소아시아, 칼케돈까지 침략해 오면서 지나는 곳마다 살육과 파괴를 일삼았다. 그 즈음 콘스탄티노플은 일련의 폭동과 반란들로 분열을 겪고 있었고 포카스는 그것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한편 아바르족은 발칸 반도에서 침략에 나섰는데 이제 모두들 제국의 몰락이 임박했음을 믿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절망적인 상황에서 제국을 구한 이는 카르타고의 총독 헤라클리우스였다. 그는 자신의 아들 헤라클리우스가 이끄는 함대를 콘스탄티노플로 보냈다. 함대는 610년 10월 3일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했고 아들 헤라클리우스는 반란을 일으켜 포카스를 황제 자리에서 몰아냈다. 포카스는 참수당하고 그의 시신은 공개적으로 불태워졌다. 그리고 바로 그날 아들 헤라클리우스는 황제로 등극했다.

 

헤라클리우스

 

헤라클리우스 황제는 긴 재위 기간을 거의 끊임없이 이어진 페르시아군과 아바르군과의 전투로 보냈는데 처음에는 그의 고투에도 불구하고 적군이 계속 전진해 왔다. 페르시아군은 615년에 소아시아를 휩쓸고 다시 칼케돈까지 침입해 들어왔다. 이로 인해 헤라클리우스는 성녀 에우페미아의 시신을 콘스탄티노플로 옮겨 히포드롬 근처에 세운 순교자 기념 성당에 모셔야 했다. 아바르군도 617년 6월 콘스탄티노플 근교까지 공습을 감행해 왔으나 테오도시우스 성벽을 뚫지 못하고 트라키아에서 잡은 25만 명이나 되는 포로들을 데리고 철수했다.

 

가망 없는 상황에 이르자 헤라클리우스는 콘스탄티노플을 떠나 카르타고에 수도를 세울 것을 고려하게 되었다. 그러자 공포에 휩싸인 콘스탄티노플 주민들은 세르기우스 총대주교를 내세워 헤라클리우스에게 수도를 야만족의 손에 넘기지 않게다는 맹세를 하도록 요구했다.

 

헤라클리우스 황제는 페르시아군을 상대로 한두 번의 성공적인 원정에서 직접 군대를 이끌었는데 두 번째 원정에서 접전을 벌이던 중 부상을 당하고 말았다. 두 번째 원정이 시작되기 전에 아바르 족이 트라키아를 위협하자 그는 군대의 일부를 콘스탄티노플로 돌려보내 수도를 지키게 했다. 626년 아바르족의 왕은 불가르족, 슬라브족, 훈족, 스키타이족, 게피드족을 규합한 어마어마한 연합군을 거느리고 트라키아를 침공했다. 그와 동시에 대규모의 페르시아군이 소아시아를 거쳐 칼케돈에 진을 치고 아바르와 콘스탄티노플을 협공할 기회를 노렸다. 아바르군은 콘스탄티노플을 둘러싼 성벽의 가장 취약한 부분을 거의 뚫을 뻔하기도 했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에 성모 블라케르니오타사(성모 마리아의 기도하는 모습과 마리아의 가슴에 달린 메달 속에 아기 예수를 그려 넣은 모습)가 홀연히 나타나 야만족들을 쫓아냈다고 그곳을 지키던 그리스 병사들이 증언했다. 그러던 중 8월 중순에 메소포타미아에서 비잔틴군이 대승을 거두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페르시아군과 아바르군은 포위를 풀고 고국으로 향했다. 그렇게 하여 “하늘이 지켜주는” 도시 콘스탄티노플은 위기를 모면하였으며 주민들은 성모 교회로 찾아가 특별한 감사를 드렸다. 그때 부른 세르기우스 총대주교가 작곡한 찬송가 <아카티스토스>는 지금까지도 그리스정교의 대표적인 성가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블라케르니오타사

 

그 직후에 헤라클리우스 황제는 골든혼 근처의 육지 성벽의 북쪽 끝에 새 성벽을 세웠다. 헤라클리우스 성벽으로 알려진 이 성벽은 하마터면 아바르군에게 뚫릴 뻔했던 콘스탄티노플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 다음 헤라클리우스는 동쪽 국경에 모든 군사력을 집중시켰고 627년 12월12일 페르시아 왕 호스로 2세를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 호스로는 바로 죽임을 당했고 그의 아들 카바드 2세 셰로에가 왕위를 이었다. 페르시아의 새 왕이 평화협정을 제안하자 헤라클리우스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고 그 결과 분쟁 지역이 모두 제국의 영토로 귀속되었다.

 

호스로우 2세

 

카바드 2세

 

한편 훨씬 더 무시무시한 신흥 세력이 아라비아에서 부상했는데 622년 선지자 무함마드가 메카에서 도피하면서 이슬람 시대가 열린 것이다. 636년 황제의 동생 테오도루스가 이끄는 비잔틴군이 요르단의 야르무크 전투에서 아랍군에 의해 전멸당한 것으로 이슬람의 군사력은 입증되었다. 이 전투로 시리아와 요르단을 손에 넣은 아랍군은 638년 예루살렘을, 2년 후에는 카이사레아를 함락시켰으며 이집트까지 침략했다.

이때쯤 헤라클리우스는 죽어가고 있었고 기를 쓰고 싸워 얻은 것을 모두 잃은 뒤라 사기가 완전히 꺾인 상태였다. 결국 그는 641년 2월 11일 숨을 거두어 성사도 교회에 묻혔다. 연대기 작가 니케포루스의 기록에 의하면 황제의 유언에 따라 매장 후 사흘 동안 관 뚜껑을 열어놓았다고 하는데 생매장되었다는 소문이 있는 제노 황제와 같은 처지가 될까 봐 두려워했던 듯하다.

헤라클리우스로 시작된 왕조는 그의 사후 70년 동안 명맥을 이어갔다. 그의 두 아들 콘스탄티누스 2세와 헤라클로나스가 641년 공동 황제가 되어 몇 개월간 제국을 다스렸다. 그해 5월 24일 콘스탄티누스는 결핵으로 세상을 떴고 9월 말에 헤라클로나스는 원로원에 의해 폐위되어 어머니 마르티나와 함께 유배되었다. 원로원은 그가 다시 권력을 잡지 못하도록 그의 코를 베고 마르티나의 혀를 잘랐는데 비잔틴 제국의 '리노트메티아(신체 절단)'의 첫 사례였다.

콘스탄티누스 2세

헤라클로나스

헤라클로나스의 뒤를 이어 콘스탄티누스 2세의 아들인 열한 살의 콘스탄티누스가 황위에 올랐다. 콘스탄티누스 3세의 재위기는 아랍군과의 싸움으로 점철되었는데 641년 처음으로 소아시아를 침공한 아랍군은 함대를 거느리고 동지중해 연안과 섬들을 약탈했다. 아랍군의 침략에 크게 낙담한 콘스탄티누스 3세는 660년 콘스탄티노플을 포기하고 서로마에 수도를 다시 세우기로 결심했다, 그는 결국 시칠리아로 향했고 663년에 시라쿠사(이탈리아 시칠리아 섬의 남동쪽에 위치한 도시)에 정착하여 그곳을 본부로 삼았다. 2년 후 그는 아내와 아들들을 데려가기 위해 사람을 보냈으나 콘스탄티노플 주민들은 자신들의 도시가 수도의 자격을 상실하고 야만족의 손에 넘어갈 것을 두려워하여 그들을 보내주지 않았다. 이것이 콘스탄티누스 3세의 운명을 결정지었으며 그는 668년 7월 15일 시라쿠사에서 암살당했다.

650년의 비잔티움 제국. 이 해에 제국은 카르타고 관구 외에 모든 남부 속주를 잃었다.

 

그의 맏아들이 황위를 계승했는데 역시 이름이 콘스탄티누스였고 나이는 16살이었다. 콘스탄티누스 4세도 재위기의 대부분을 칼리프 무아위야가 이끄는 아랍군의 침공을 막아내는 데 보냈다. 아랍군의 첫 침략은 668년 무아위야의 아들 야지드가 지휘하는 아랍군이 칼케돈에 이른 것이었다. 이듬해 봄 아랍군은 해협을 거너와 육지에서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했지만 결국 테오도시우스 성벽을 뚫지 못하고 철수했다.

콘스탄티누스 4세

다음 습격은 674년에 시작되었는데 아랍군이 시지쿠스를 점령한 뒤 무아위야의 함대가 그곳을 콘스탄티노플의 공격 기지로 삼은 것이다. 비잔틴 군은 가공할 위력을 지닌 '그리스의 불'을 호스로 뿌려 발사하여 아랍 전함들을 화염에 휩싸이게 만들었다. 아랍은 시지쿠스로 철수할 수밖에 없었고 이후 4년 동안 해마다 콘스탄티노플을 공략했지만 무시무시한 '그리스의 불' 때문에 번번히 패배했다. 결국 그들은 678년 여름 콘스탄티노플에 대한 다섯 번째 공격을 포기하고 지중해로 나갔으며 그곳에서 풍랑을 만나 난파했다. 그러자 무아위야는 콘스탄티누스 4세와 협약을 맺을 수밖에 없었고 30년 평화조약에 합의했다.

 

콘스탄티누스 4세는 그리스도가 인성과 신성을 모두 갖고 있지만 의지는 하나라고 주장하는 단일의지론을 둘러싼 신학적 논쟁도 해결해야만 했다. 그는 이 논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680년 11월 7일부터 681년 9월 16일까지 콘스탄티노플에서 6차 공의회를 열었다. 그는 공의회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회의 결과 단일의지론은 이단 판정을 받고 그 지지자들은 파문당하였다.

 

공의회 진행 중에 단일의지론을 지지하는 폴리크로니우스라는 수도승이 회의장에 나타나 신앙고백으로 죽은 자를 살려낼 수 있노라고 말했다. 회의에 참석한 주교들은 폴리크로니우스가 대중 앞에서 자신의 힘을 증명할 수 있도록 조치해 주었다. 방금 숨을 거둔 남자 시체 한 구가 준비되었고 폴리크로니우스는 그 시체 앞에서 몇 시간 동안 신앙고백을 하였지만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콘스탄티누스 4세가 685년 7월 하순에 숨을 거두자 당시 16살이던 그의 아들 유스티니아누스가 황위에 올랐다. 2년 후 유스티니아누스 2세는 발칸 반도에 슬라비니아라는 나라를 세운 슬라브족을 상대로 한 원정을 승리로 이끌었다. 유스티니아누스 2세는 슬라브족을 소아시아로 이주시켰는데 이것은 선황이 시작한 정책을 더 큰 규모로 이어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유스티니아누스 2세

유스티니아누스 2세는 6년의 재위 기간 동안 5차와 6차 공의회의 법령들을 보충하기 위한 퀴니섹스트(숫자 5를 뜻하는 '퀸'과 6을 뜻하는 '섹스') 공의회를 주관했다. 102개의 카논(법령) 중에서 일부는 이교적인 축제들과 관습들을 금하는 내용이었는데 예를 들면 콘스탄티노플 주민들이 가면을 쓰고 거리로 쏟아져 나와 춤을 추던 '브루멜리아' 축전이 거기 속했다. 그러나 이 행사는 그리스 카니발에 포함되어 지금까지도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카논 21조는 마임과 판토마임, 야생동물과 관련된 쇼를 금했고, 카논 24조는 성직자들의 극장과 히포드롬 출입을 금지했으며, 카논 62조는 여자들이 대중 앞에서 춤을 추는 것과 남자가 여자옷을 입거나 여자가 남자옷을 입는 것, 포도 수확 철에 디오니소스의 이름을 연상시키는 행위, 청년들이 모닥불을 뛰어넘으며 하지를 축하하는 것을 금했다.

 

695년이 끝나갈 무렵 유스티니아누스 2세는 폐위되고 군사령관 레온티우스가 황제로 즉위했다. 레온티우스는 자신의 지지자들에게 유스티니아누스를 살려주자고 청했고 그 덕에 유스티니아누스는 목숨은 건졌지만 코와 혀를 잘렸다. 이후 '코 잘린 황제'라는 뜻의 리노트메투스로 불리게 된 유스티니아누스는 달마토 수도원에 유폐되었다. 그 다음엔 크림으로 추방되었으며 그후로 수도승 게오르기오스의 말을 빌자면 “사방이 평화로웠다.”

레온티우스

그러나 역사상 가장 혼란스러운 시대들 중 하나로 들어선 비잔티움에 평화가 자리할 여지는 없었다. 레온티우스는 3년 만에 폐위되고 압시마르 제독이 티베리우스 3세라는 이름으로 황제가 되었다. 레온티우스는 코를 잘린 채 달마토 수도원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티베리우스 3세

 

한편 유스티니아누스는 새 인생을 시작하고 있었다. 그는 704년 크림에서 도망쳐 하자르족의 왕을 찾아갔다. 하자르 왕은 그를 극진히 대접했으며 자신의 누이와 결혼시켰다. 유스티니아누스의 아내가 된 하자르 왕의 누이는 테오도라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결혼 후 유스티니아누스는 불가르족의 왕 테르발을 찾아갔고 테르발은 그가 황위를 찾을 수 있도록 군대를 지원해주기로 약속했다. 불가르 동맹군을 거느린 유스티니아누스는 콘스탄티노플을 향해 진군했고 705년 봄 별로 피를 흘리지 않고 목적을 이루었다. 티베리우스는 목숨을 구하기 위해 도망쳤다. 유스티니아누스는 10년 전에 잃은 황제 자리를 되찾았다. 잘린 코는 그에게 장애가 되지 않았는데 연대기 작가 아그넬루스에 의하면 ‘순금’으로 만든 가짜 코를 붙였다고 한다.

하자르 왕국

 

유스티니아누스의 부하들이 티베리우스를 잡아 콘스탄티노플로 압송했고 706년 2월 15일 티베리우스와 레온티우스는 히포드롬에서 유스티니아누스와 대면하게 되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포박된 두 폐위 황제들을 앞에 앉혀놓고 발로 그들의 목을 짓밟으며 경주를 지켜보는 달콤한 복수를 맛보았다. 경주가 끝난 뒤 그는 레온티우스와 티베리우스의 목을 베고 시체를 바다에 던졌다.

 

유스티니아누스 2세의 재집권은 711년까지 이어졌으나 아르메니아 장군 바르다네스(필립피쿠스)가 일으킨 반란으로 그는 황제 자리에서 쫓겨나고 목숨까지 잃었다. 필립피쿠스는 즉위하자마자 유스티니아누스의 어린 아들 테베리우스를 처형하도록 했는데 연대기 작가의 기록에 의하면 “양처럼 도살했다.”고 한다. 그렇게 하여 헤라클리우스 왕조는 여섯 대째에 막을 내리게 되었으며 헤라클리우스가 황위에 오른 지 101년 만이었다.

 

필립피쿠스는 이후 6년 동안 제국을 다스린 단명한 세 황제 중 첫 번째 황제로 아나스타시우스 2세와 테오도시우스 3세가 차례로 그의 뒤를 이어 황위에 올랐으나 얼마 못 가서 폐위되고 수도원에 유폐되었다. 테오도시우스 3세는 황제가 되기 전에 징세관 노릇을 하던 인물이었다. 715년 여름의 어느 날 그는 자신의 사무실에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아나스타시우스 2세를 축출하기 위해 콘스탄티노플로 향하던 반란군이 지나가게 되었다. 반란군 지휘자 하나가 그의 이름을 물었고 그가 ‘테오도시우스’라고 대답하자 그것으로 황제 자격이 충분하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테오도시우스는 거세게 저항했지만 반란군은 그를 콘스탄티노플로 데려가 아나스타시우스 2세를 폐위시킨 후 그를 황제 자리에 앉혔다. 테오도시우스는 겨우 2년을 버틴 후 자신보다 훨씬 더 황제 자격을 갖춘 새 후보자 레오 3세에게 밀려났다. 그는 에페소스에 있는 수도원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평화롭고 거룩한 여생을 보냈다. 에페소스에 있는 그의 무덤은 곧 성소가 되었으며 그에게 치유의 기적을 행하는 힘이 있었다는 믿음이 퍼져 결국 그는 성인으로 추대되었다. 그는 비잔틴 역사가들에게 ‘마지못해 황제가 된 테오도시우스’로 알려져 있다.

 

새로운 왕조가 시작된 콘스탄티노플에 암흑시대의 기나긴 밤이 도래하고 있었으니 로마와 아테네에서의 전철을 밟아 이곳에서도 그리스, 로마 고전 문명의 빛이 꺼져갈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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