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가지는 많은 사람들, 병이 없기를 원하고, 장애가 없기를 바라고, 일이 쉽게 되기를 바라고, 남이 내 뜻에 잘 따라주기를 바라는 것들에 대해서 '보왕삼매론'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장애는 일어날 만한 인연이 있어서 일어나는 것이므로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 수없는 인연을 지어놓고 과보를 받지 않으려고 도망가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 정면으로 과보를 받아드릴 뿐만 아니라그 장애의 원인도 규명해서 본질을 꿰뚫어보아야 한다. "
보왕삼매론에서는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부딪히는 많은 어려움을 하나하나 들어서 그것을 부처님의 정법에 따라 수행으로 뛰어넘는 법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교훈 같은 말이기도 하지만 단순한 교훈이 아니라 제법이 공한 이치에 바탕을 두고 인생사를 해결하는 방법을 설명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1. '세상살이에 곤란 없기를 바라지 말라.'
『세상살이에 곤란 없기를 바라지 말라.
세상살이에 곤란이 없으면
업신여기는 마음과 사치한 마음이 생기게 되나니,
그래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되
근심과 곤란으로서 세상을 사라가라 하셨는니라.』
[원문]
『세상살에 곤란 없기를 바라지 말라.
세상살이에 곤란이 없으면 교만과 자랑하는 마음이 생겨나고
교만과 자랑하는 마음 일어나면 반드시 모두를 속이고 억압하게 되느니라.
고난의 경계를 잘 살펴 고난이 본래 허망한 것임을 알면 고난이 나를 어찌 상하게 하리.
그러므로 성인이 말씀하시되 근심과 고난으로서 해탈을 삼으라 하셨느니라. 』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다보면 고난을 겪을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정월 초하룻날부터 정초기도로 한 해를 시작하면서 올해 어려운 일이 없기를 바라고 또 영험 있다 하는 도량을 찾아다니며 무사하기를 기원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전하는 말씀은 곤란함이 없기를 바라지 말라고 했습니다. 곤란함이 없기를 바라기 때문에 명산 대첩을 찾아다니며 기도를 하는데, 곤란함이 없기를 바라지 않는다면 이럴 필요가 없지요. 그러면 왜 이렇게 말씀하셨을까.
지난 호에 말씀드린 것과 마찬가지로 육신을 가지고 있는 한, 병들지 않을 수 없는 것처럼 이 세상일은 우리 뜻대로 될 수가 없습니다. 바라는 바대로, 원하는 바대로 다 되는 일은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세상은 풍비박산이 되어버립니다. 세상 사람들이 원하는 바가 다 이루어진다고 하면 서로 원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에 상충됩니다. 예를 들어 '나'는 출가하여 부지런히 정진해서 성불하는 게 목표인데 '나의 부모님'이 나에 대해서 원하는 것은 그것과는 다르지요. 또 '나의 여자친구'도 나에 대해서 원하는 바가 다르겠지요. 이렇게 서로 원하는 바가 상충하는데, 원하는 것이 다 이루어지면 어떻게 될까요? 어떤 사람은 오늘 놀러가는 사람이 있고 또 어떤 사람은 내일 놀러가는 사람이 있는데 각각은 자신이 놀러가는 날의 날씨가 맑기를 원합니다. 그렇게 계속 맑게 되면 비가 오지 않아 물이 없어서 농사는 안 되고 먼지가 펄펄 날리니 금방 사막이 되어 버리겠지요. 우리가 원하는 대로 되면 자연은 사막이 되어 버리는 셈입니다. 그러니까 원하는 대로 다 되는 것이 좋은 게 아니지요. 그런데 사람들은 원하는 대로 되기를 바라니 결국 바꿔 말하면 원하는 대로 되기를 바란다는 것은 이 세상을 망치는 거예요. 그러니까 원하는 바대로 되기도 하고 안 되기도 하는 게 이 세상의 참모습입니다. 이것은 객관적인 사실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다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원하는 대로 안 되면 괴로워하면서 갖가지 곤란을 겪습니다.
여러 가지 곤란을 겪는 것을 바라보는 관점에는 두 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그런 일을 겪는 것은 그런 일을 겪을 만한 원인이 있어서 결과가 나오는 것이므로 당연히 과보를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과'입니다. 중생의 세계에서는 바로 이 인과의 법칙을 따릅니다. 그래서 원인을 지은 것으로 결과가 있는데 우리는 내가 지은 그 원인을 모르기 때문에 결과에 대해 받아들이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나타난 결과를 '재앙' 혹은 '곤란'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런 원인을 알게 되면 '재앙'이나 '곤란'이 아니라, 그러한 것이 '당연한 결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인과법을 알아 나에게 주어진 현실을 기꺼이 받아드림으로써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다른 한 가지는, 앞에서 말한 대로 세상 자체가 내가 원하는 대로 안되는 게 정상이니까 원하는 대로 안되는 게 괴로워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즉, 지금 나의 괴로움은 내가 원하는 대로 되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날씨가 맑든 날씨가 흐리든 그 자체는 우리들이 괴로워야할 아무런 이유가 아니지요. 날 괴롭히려고 비가 오거나, 날 괴롭히려고 해가 나는 게 아니라 그냥 일상적인 기후환경인데 내가 '오늘 날씨가 맑아야한다'거나 '비가 내려야하는데.'하고 바라는 대로 돼야한다고 할 때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원하는 대로 되어야하낟고 생각하기 때문에 곤란하지, 원하는 대로 되어야한다는 생각이 없으면 곤란한 일은 아니지요. 약간 불편한 일일 뿐입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원하는 대로 다 되지 않는 게 진리이므로 원하는 대로 안 된다고 해서 괴로울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내 뜻대로 될 수 없으므로 곤란은 시시때때로 나타나는 거예요. 그래서 곤란이 없어야 한다고 생가갛면 큰 고통을 겪습니다. 곤란이라는 것은 시시때때로 나타나는 것이고 그게 정상입니다.
그런데 세상살이가 다 내 뜻대로 되는 것처럼 느끼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도 가끔 있지요. 그러면 사람이 교만해집니다. 인기 가수, 탤런트, 스포츠맨 등이 그런 경우입니다. 그처럼 세상살이에 곤란이 없으면 세상살이에 조심하는 마음이 없어서 교만하고 거만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수행자들에게 걸식을 하라고 하셨습니다. 남의 집에 와서 밥 얻어먹는 주제에 큰 소리 칠 수 있습니까. 날마다 남의 집에 가서 밥을 얻어먹으료면 문간에서 고개를 숙여야 합니다. 주면 좋고 안 줘도 좋고 많이 줘도 좋고 적게 줘도 좋고 이것 줘도 좋고 저것 줘도 좋습니다. 걸식과 구걸의 차이는 걸식은 수행의 한 방편이고 구걸은 욕심을 채우려는 것입니다. 걸식을 할 때는 욕심을 버리고 걸식을 하고, 구걸을 할 때는 욕심으로 전전긍긍합니다. 걸식을 할 때는 주는 사람에게 맡기면서 자기를 내려놓는 것이고, 구걸을 할 때는 주는 사람에게 강요하는 것입니다. 폭력이든 애걸복걸하든 어쨌든 강요를 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걸식을 하는 자는 겸손해야합니다. 그래서 걸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꼐서는 "나의 제자들은 교만해서는 안 된다, 겸손해라, 나의 제자들은 비굴해서는 안 된다, 당당해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겸손과 비굴을 같이 봅니다. 욕구가 있으면 비굴해집니다. 그런데 욕구가 없으면 당당해집니다. 욕구가 있으면 교만합니다. 욕구가 없으면 겸손합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당당하면서 겸손하고 겸손하면서 당당합니다. 천하에 아무 거리낌이 없으면서도 천하 사람에게 고개를 숙입니다. 중생은 천하 사람에게 움츠려 비굴하고 또 천하 사람에게 잘났다고 큰소리를 칩니다. 여러분들이 돈에 집착하면 자기보다 돈 많은 사람을 만나면 비굴해지고 자기보다 돈 적은 사람을 만나면 교만해집니다. 또 권력에 집착하는 사람은 자기보다 지위가 높은 사람에게는 비굴하고 자기보다 지위가 낮은 사람에게는 거만해집니다. 얼굴 모양에 집착하게 되면 자기보다 잘생긴 사람에게는 기를 못 펴고 자기보다 지식이 못한 사람에게는 큰소리 뻥뻥 칩니다. 실제로 우리들에게 일어나는 심리지요. 그런데 '나'라고 하는 이것을 내려놓게 되면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비굴할 아무런 이유도 없고, 거만할 아무런 이유도 없어집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수행자는 가난한 자에게 밥을 빌게 해서 가난한 사람에게 겸손하도록 가르치고, 궁성에 가서는 그 어떤 것도 빌지 못하게 해서 왕에에 고개를 숙이지 않도록 가르쳤습니다. 대부분은 왕에게 고개를 숙이고 대중 앞에 가서는 고개를 쳐들게 됩니다. 그러나 수행자는 붓다의 가르침은 왕에게 고개를 숙이고 대중 앞에 가서는 고개를 쳐들게 됩니다. 그러나 수행자는 붓다의 가르침은 왕에게는 고개를 숙이지 말고 대중 팡게 가서는 고개를 숙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제일 높은 자는 수행자의 발아래 내려놓고, 이 세상에서 제일 낮은 자는 수행자의 머리 위에 얹어놓으니 하니 결국은 세상을 평등하게 보는 것입니다. 왕은 천시하고 중생은 높이라는 뜻이 아니라 이 세상 사람들을 똑같이 평등하게 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교만하지 말고 겸손하라. 비굴하지 말고 당당하라고 하였습니다. 근데 이 세상이 자기 뜻대로 되면 교만하게 됩니다. 이건 주위의 사람을 봐도 그렇고 자기 자신을 가만히 지켜봐도 알 수 있습니다. 뭐든지 뜻대로 잘 되면 사람은 교만해지고 자랑하는 마음이 생기게 됩니다. 이렇게 교만한 마음이 생기고 자랑하는 마음이 일어나면 반드시 다른 사람을 억압하게 됩니다.
다음으로 원문에 '고난의 경계를 잘 살펴 고난이 본래 허망한 것임을 알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본질적인 문제입니다. 고난이라는 것은 본래 없는 것이지요. 내가 원하는 대로 되어야한다고 바라는 데서 고난이 되지 본래는 고난이란 없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공(空)'이지요. 고난이 어찌 나를 상하게 하랴. 우리가 고난이라 말하는 일이 일어나더라도 본래 고난이 없는 것을 알아버리면 그 고난이 나를 어지럽히지 못합니다.
그러니 여기 고난의 경계를 잘 살펴보면 실체가 없음을 알 수 있고, 그것을 알면 어느 고난도 아무런 장애가 안 되지요.
※ 보왕삼매론은 중국 원나라 말, 명나라 초기의 혼란기에 생존한 묘협 스님의 '보왕삼매염불직지' 안에 있는 스물 두 편의 글 중 제17편,'십대애행'에 해당하는 글입니다. 원문은 지금 우리들이 읽고 있는 것보다 긴 문장인데 많은 사람들이 읽고 새기기에 편하도록 간결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