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후가 안으로는 무고하는 짓을 저지르고 밖으로는 역모에 응하였으니 어미의 도리가 이미 끊어졌고, 왕자가 적에게 추대되는 등 그 흉모가 여지없이 드러났으니 동기의 정도 자연히 끊어진 것입니다." 광해 5년(1613) 5월 22일 진사 이위경 등
시작은 이위경의 상소, 영창대군을 어찌할까 문제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흥미로운 건 같은 날 태학생 어몽렴의 상소가 있었는데 이위경은 그를 욕하면서 한 발 더 나아간 것이죠. 그 차이는 영창대군까지만 가느냐 인목왕후까지 가느냐였습니다. 어몽렴의 배후엔 박승종이 이위경의 배후엔 이이첨이 있었죠.
이걸 장령 정조, 윤인이 이어받습니다.
"태학생 이위경의 소 가운데 (위의 내용)는 내용이 있었고 보면 이는 종묘 사직에 죄를 지은 것으로서 모후의 도가 끊어진 것입니다. 전하에게 있어서는 모자 간의 정리가 지극하다 할지라도 종묘 사직에 있어서는 끊어야 할 악이 분명히 드러난 셈인데 오늘날 신하된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 장차 모후로 대접해야 하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천지 신인의 주인 되시는 몸이니 역모를 참여해 들었던 모후와 한 궁궐내에 함께 계실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5월 25일)
그러면서 사직을 청하죠. 광해군은 사직하지 말고 기다리라는 명을 내렸지만요. 이어 다음날 이런 명을 내립니다.
"태종조 방석의 변 때 신덕 왕후를 처치했던 절목을 태조조부터 태종조까지의 실록을 처음부터 끝까지 상고해서 모두 서계하라."
이후 옥사가 계속되고 광해군은 거의 매일마다 친국했으며, 영창대군의 유배는 확정돼 갔습니다. 그가 궁에서 나온 건 6월 23일, 인목왕후는 그를 붙잡고 울면서 보내지 않으려 했죠. 하지만 그녀 역시 좋은 형편은 아니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끌려가고 자기 주변의 궁녀들이 끌려가 고문당하는 상황이었으니까요.
뭐 그래도 그 이틀 전 반격이 나옵니다.
"그들이 꾸민 계획은 만세의 뒤에 전하로 하여금 어떠한 임금으로 보게 하겠습니까. 그렇다면 저 이위경·정조·윤인 등은 전하의 죄인이 될 뿐만 아니라 사실 선왕의 죄인이고, 선왕의 죄인일 뿐만 아니라 사실 만고에 강상의 죄인인 것입니다." 6월 21일 유생 조경기 등
어머니를 내쫓으라 한 건 강상(삼강오륜할 때 그거요)의 죄를 임금이 짓게 한다는 것이니 그걸 주장한 이들의 목을 베라는 거였죠. 그에 대한 반박도 나옵니다.
"우리 임금으로 하여금 위태롭고 두려운 곳에 계시지 않도록 하려는 자가 무슨 죄가 있길래 도리어 강상의 죄로 지목된단 말입니까. 이 함정이 한번 열리어 일에 따라 밀어넣을 경우에는 시비를 가릴 것 없이 살아 남은 자가 거의 없을 것이니, 어찌 한심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 헌납 유활
"이른바 강상이란 것은 무엇을 말한 것입니까? 임금을 위하여 역적을 엄히 토벌하는 자가 적입니까, 임금을 배반하고 역적을 두둔하는 자가 적입니까?" - 진사 정창언
서로가 뭐 같은 놈이니 하는 아름다운 갑론을박은 얼마 안 가 끝납니다. 계축옥사가 끝나가기도 했고, 광해군이 폐모는 없다고 못을 박았기에 그랬죠. 일단 말로는 폐모까지는 생각 안 한다고 합니다. 광해군 7년에 정인홍이 한양으로 오면서 자기 마음에도 없는데 폐모론이 나오고 있다는 식으로 상담하기도 했구요.
하지만 그 처리과정에서 정말 그럴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는 폐모론을 주장했던 정조, 윤인은 삭직했다가 바로 복귀시켰고, 폐모론을 반대한 이들은 유배 보냅니다. 이창록이라는 이는 7년 8월에 강경한 상소를 올렸다가 죽기도 했죠. 그 내용이 좀 과격하긴 했습니다.
"형을 죽이고 아우를 죽였으니 이 일을 어떻게 차마 하였는고. 내 어찌 착하지 못한 이를 임금으로 여기랴?"
실록에서는 그 내용을 그대로 전하지 않고 야사에서는 그가 평소에 이런 말을 하고 다녔다고 적고 있죠. 다만 앞부분 형과 아우를 죽였다는 건 실록에서도 나옵니다. 다만 야사에서는 정인홍이 이를 고발했다 하는데 정작 정인홍은 광해군과 만났을 때 이걸로 그 고을까지 벌 준 걸 좀 까는 뉘앙스의 말을 하고 있네요.
이 전인 7년 2월에는 오리정승 이원익도 글을 올립니다.
"지금 항간에 떠도는 말을 들으니, 머리를 맞대고 흉흉하게 하는 말이 ‘이로 인해 장차 대비에게까지 미칠 것이다.’고 합니다. 신은 그만 놀라서 간담이 철렁 내려앉아 자신도 모르게 혼비백산하였습니다. 어미가 비록 사랑하지 않더라도 자식은 효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모자간이란 그 명분이 지극히 크고 그 윤기가 지극히 중합니다. 성인은 인륜의 극치인데, 성명의 시대에 어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만일 조정에 과연 이 논의가 없었다면 신이 경솔히 항간의 말을 믿고 사전에 시끄럽게 한 것이니 그 죄를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바라건대 신이 함부로 말한 죄를 다스려 사람들의 의혹을 풀어주소서. 그러면 이보다 더 다행스러운 일이 없겠습니다."
광해군은 이 말을 듣고 어디서 들었냐고 따졌고, 이원익은 그냥 걱정돼서 한 거라면서 남에게 들은 게 아니라고 합니다. 이 일은 이원익이 유배가는 걸로 마무리됐죠.
폐모 지지 쪽의 움직임은 그다지 없었습니다. 오히려 이를 걱정하는 쪽의 상소가 간간이 나오는 식이었죠. 뭐 영창대군까지 죽고 인목왕후까지 혐의를 받은 상태였으니 무리는 아닙니다. 그런 반대 때문인지 폐모론이 더 움츠러들기도 했겠죠. 아무튼 이렇게 죽어가던 폐모론이 광해군 9년 1617년에 재점화됐고, 그 어느 때보다 뜨겁게 타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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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발단으로 두 가지 사건이 나옵니다. 첫째는 신경희의 옥사였습니다. 신경희는 친했던 소명국을 간통죄로 고발, 옥에 갇힌 소명국은 뜬금없이 신경희가 역모를 꾸몄다고 고발합니다. 둘의 대질에서 소명국의 말에 신경희는 우물쭈물했다고 하고 광해군은 이에 분노해 신경희를 엄하게 신문할 것을 명령합니다.
문제는 이 신경희가 바로 이이첨의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박승종은 이 말을 듣고 "과연 역적이 가까이에 있었다"고 외쳤다고 하죠. 이이첨까지 옭아매려는 생각이었던 것 같습니다만 아쉽게도(?) 신경희가 제대로 말을 꺼내기 전에 옥사해 버립니다. 이걸로 이번 사건은 흐지부지 됩니다.
+) 여기서 광해군이 더 크게 안 나간 것이 옥사에 염증을 이 때부터 느껴서인지, 이이첨까지 연결되면 안 된다고 여겼는지는 알 수 없겠습니다만. 아무튼 여기서도 대비를 구한다는 말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이게 묘한 나비효과를 만듭니다. 이 때 소명국이 왕으로 추대하기로 한 것이 정원군(인빈 김씨의 셋째)의 셋째 아들 능창군이었습니다. 능창군은 죽음은 면하고 유배간 후 자살, 아버지 정원군은 그 충격으로 죽습니다. 이에 분노한 장남이 있었으니 바로 능양군, 훗날의 인조입니다. 또한 반정의 주역인 신경진은 신경희의 사촌동생이었죠.
아무튼 이 사건으로 이이첨에게 본격적인 견제가 시작된다는 걸 알 수 있죠.
다른 하나는 광해 8년 12월 21일에 있었던 윤선도의 상소입니다.
"대각(사헌부와 사간헌)의 계사에 대해서 전하께서는 반드시 대각에서 나온 것이라고 여기시지만 사실은 이이첨에게서 나온 것이며, 옥당(홍문관)의 차자를 전하께서는 반드시 옥당에서 나온 것이라고 여기시지만 사실은 이이첨에게서 나온 것이며, 전조(이조, 병조)의 주의를 전하께서는 반드시 전조에서 나온 것이라고 여기시지만 사실은 이이첨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관학 유생에 이르러서도 그의 파당이 아닌 자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관학의 소장이 또한 겉으로는 곧고 격렬하지만 속은 실제로 아첨하며 빌붙는 내용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조정이 이이첨의 사람으로 가득차 있다는 내용, 이런 과격한 내용에도 그는 목숨을 부지합니다. 그리고 이 직후부터 폐비 논의가 불이 붙다 못해 크게 타오릅니다. 이이첨이 폐모론을 통해 활로를 모색했다는 것이 통설입니다..
+) 아무튼 저 깡은 참 -_-a 이후 송시열과의 맞짱에서 더 제대로 나옵니다만.
광해 9년(1617) 1월 20일, 경운궁에 화살로 격문이 쏘아집니다. 누구누구가 삼청동에 모여서 대비를 구하고 왕을 욕하며 역모를 꾸몄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정확한 내용은 알려지지 않습니다) 광해군부터 해서 아주 왈칵 뒤집어졌습니다만 사건은 의외로 허무하게 끝납니다. -_-; 누가 꾸민 짓이었다는 거였죠.
그걸 꾸민 장본인이 바로 허균으로 드러납니다.
그 이유로 나오는 것이 폐모를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라는 거였죠. 흉서를 꾸민 것이니만큼 큰 일이었음에도 허균에 대한 처벌은 없었습니다. 이러면 일이 묻힐 수가 없죠. 오히려 더 커질수밖에요.
+) 그리고 그가 보낸 흉서에서 역모의 주역은 김류, 역시 인조반정의 주역입니다.
이 해 말 11월과 12월, 실록은 폐비 논의로 가득차 있습니다. 그것도 폐비 지지 쪽으로 말이죠. 반대의견이 없진 않았습니다. 눈여겨볼 것은 오성 부원군 이항복입니다.
"신은 8월 9일에 중풍이 재발하여 몸은 죽지 않았으나 정신은 이미 탈진된 상태입니다. (죽기 직전이긴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잠자코 있을 수 있겠습니까) 전하를 위하여 이 계획을 한 자가 누구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임금께 요순의 도리가 아니면 진술하지 않는 것이 바로 옛날에 있었던 명훈(明訓)입니다. 진실로 아비가 설사 사랑하지 않더라도 자식은 효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춘추의 의리에는 자식이 어미를 원수로 대한다는 뜻이 없습니다. 자식된 도리는 능히 화평함으로 효도를 다하여 노여움을 돌려 사랑하도록 만든 우순의 덕을 몸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어리석은 신이 소망하는 것입니다."
그 외에 이덕형 후 영의정이 된 기자헌의 말 역시 있습니다.
"계축년간에 여러 대신이 글을 올릴 때 신도 거기에 참여하여 ‘아비가 비록 사랑하지 않더라도···.’라는 말을 하였으니, 그때와 지금의 논의를 다르게 할 수 없습니다. (중략) 신덕 왕후의 사실과 같은 것은 죽은 뒤에 빈말로 단죄한 것으로 지금은 해마다 한식날에 제사를 지내고 있으니, 이것도 오늘의 일에 견줄 만한 문제가 아닙니다."
이항복보다는 완곡했지만 역시 폐모론을 반대하는 것이었죠. 거기다 그는 북인이었기도 했구요.
+) 이 때 대북도 영창대군만 죽이자는 골북, 인목왕후도 죽이자는 육북, 둘 다 반대하는 중북으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대북 사이에서도 이에 대한 태도가 갈렸다는 걸 알 수 있고, 이렇게 갈릴 정도로 북인의 세가 컸다는 것 역시 알 수 있죠.
+) 이원익은 이 전에 이미 귀양 갔고 이덕형은 영창대군이 유배가는 광해 5년 말에 죽습니다. 이 때 기록을 보면 영의정이라서 국문에 참가할 수밖에 없는 입장인데 병으로 사직하려고 했고 광해군은 아파도 계속 참가하라는 쪽으로 밀었죠. 대북 쪽에서는 이걸로 이덕형을 깠고, 결국 사직 후 병으로 그 해를 넘기지 못 하고 죽습니다. 이항복이 가서 슬퍼한 것은 당연하구요.
폐모론을 미는 쪽에서는 당연히 이들 역시 죄인으로 밀어붙입니다. 폐모론에 대한 논의가 계속됐고 반대는 못 해도 병을 핑계로 논의에 참가 안 한 이들 역시 많았습니다. 그리고 대북은 이들 역시 죄인으로 밉니다. 이항복과 기자헌은 유배됐구요.
이 때 반전을 준 것이 기자헌의 아들 기준격이었습니다. 이를 밀어붙였던 기자헌은 허균과 (불교를 좋아해서) 친한 사이였고, 정치적으로도 비슷한 입장을 보였습니다. 그 아들 기준격을 허균의 제자로 공부하게 하기도 했구요. 하지만 여기서 갈라졌고, 허균은 여론을 주도해 기자헌을 유배보냅니다. 그에 대한 복수였죠.
여기서 지금까지 알려진 허균의 이미지가 만들어집니다. 그가 역모에 관련된 발언을 많이 했다는 것이죠.
"허균은 역적의 주모자입니다. 대개 허균은 선왕을 해치려고 음모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중략) 계축년 뒤로 허균은 말하기를 ‘나는 복이 있다. 남쪽 지방으로 내려갔을 때 심우영에게 준 시를 모두 가지고 와서 나의 문집 속에다 넣으려 하였는데 때마침 일이 터져서 나만 화를 면하였다.’ 하였습니다. 심우영과 서양갑은 모두 허균이 친히 기른 자들입니다. 허균이 서양갑의 자를 석선이라고 지어 주었으니 (중략) 허균은 매번 하는 말이 ‘오늘날 영웅은 내가 본 바로는 서석선뿐이다.’ 하였는데, 허균이 법망에서 빠져나가게 된 것이 어찌 괴이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광해 9년(1617) 12월 24일)
계축옥사의 시작이 된 칠서의 옥(박응서, 서양갑 등 서자 일곱 명)과도 연관됐다는 말, 하지만 광해군은 이럼에도 허균을 벌 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폐모론이 가속화 될 뿐이었죠. 폐모를 반대한 자, 대비와 관계된 자까지 벌하라는 말이 나오고 폐모는 물론 죽이라는 말도 계속 나왔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 광해군은 결론을 내립니다.
"그런데 생각지 않게 경들이 나의 뜻을 살피지 못하여 백관들을 이끌고 얼어붙은 대궐 뜰에 모두 모여 직무도 폐기한 채 따를 수 없는 일을 억지로 청하고 있다. 돌아보건대 내가 무슨 마음으로 이 변고를 처리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경들이 일단 종묘 사직과 관계되는 일이라고 말하고 있는 이상 내가 줄곧 거절할 수만은 없는 처지이다. 지금 이후로는 단지 서궁이라고만 칭하고 대비의 호칭은 없애도록 하라. 그리고 다시는 폐라는 글자를 거론하지 말아 사은(사사로운 은혜)과 의리 모두가 온전하게 되도록 하라." (광해 10년 1월 28일)
이렇게 인목왕후는 대비로서의 지위를 잃고 서궁에 갇히게 됩니다. 그리고 허균에 대한 태도도 이 때부터 달라지죠.
"허균은 천지 사이의 한 괴물입니다. 경운궁(서궁)에 격서를 던지는 등 온갖 방법을 동원해 역모를 꾸민 정상이 이미 (중략) 동궁(세자)을 해치려 꾀한 사실이 또 기준격의 소에서 나왔습니다. 허균이 진 죄명이야말로 오늘날 신자(신하)된 입장에서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는 것이었는데, (중략) 이런 죄명을 진 사람은 수레에 매달아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고 그 고기를 씹어 먹어도 분이 풀리지 않을 것인데, 그가 감히 수레를 타고 (중략) 아무 일도 없는 재상처럼 행동하고 있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모두 통분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광해 10년 윤 4월 29일)
허균이 역모를 꾸몄다는 것, 이이첨을 견제하던 박승종은 물론 이이첨 자신도 허균의 역모를 말하는 수준까지 이르게 됩니다. 허균은 변명하기도 하고 기준격과 대질하기도 했죠. 여기서 크게 얻은 것이 없었고, 이전에 묻어둔 것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부하들이 승려들을 모으고 밤에 산에서 이상한 소문을 퍼뜨린 것, 북쪽부터 남쪽의 류큐가 조선을 친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린 것을 토해냅니다. 이러면서 허균의 역모가 확실시됐죠.
이상한 것은 정작 그의 죽음입니다. 광해 10년 8월 24일 그는 참형을 당하는데 그는 이런 상황을 이해하지 못 합니다. 이이첨은 허균의 딸이 후궁으로 곧 들어갈 것이니 안심하라고 그를 설득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감옥에서 나온 그에게 닥친 건 빠른 죽음이었습니다. 광해군 역시 여기에 당황하지만 이이첨은 이렇게 답 합니다. 광해군은 허균을 부르기 전에 일당이 답을 했다 해도 허균에게 물어봐야 된다고 명령한 뒤였습니다.
"일당들이 모두 승복했으니 달리 물어볼 만한 것이 없습니다. 죄인을 이에 잡아내어 도성의 백성들이 기뻐 날뛰고 있으니, 즉시 정형을 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오늘도 지연시키면 뭇사람들의 마음이 답답하게 여길 것입니다. 무슨 다시 물어볼 만한 일이 있겠습니까"
허균은 그제야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외칩니다. 하지만 모두가 무시했고 광해군 역시 더 따지지 못 합니다. 저잣거리로 끌려온 허균, 그는 자기의 죄를 인정한다는 문서에 서명을 거부했고, 억지로 서명한 후 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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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균, 현대에는 주로 조선사회를 깨뜨리는 역모를 꿈꿨고 그게 발각돼 죽은 걸로 알려져 있습니다. 홍길동전의 저자로 알려져 있기에 더 그렇죠. 서양갑과 친했고, 그를 중심으로 한 서인의 무리가 역모를 꿈꿨다면 뭔가 그럴듯하긴 합니다. 이들이 홍길동의 모티프로 보기도 하구요.
하지만 실록에서 보이는 그의 모습은 전혀 다릅니다. 일단 서양갑과는 다르다고 했고, 행동도 다르죠. 서양갑이 대비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광해군에 대한 역모를 꾸미려 한 반면 허균은 폐모론의 선봉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한 행동 역시 폐모를 위한 밑밥으로 보기 어렵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의 역모를 말할 때도 폐모가 목적이 아니라 왕까지 갈아엎는 게 목적이었다고 했죠.
무엇보다 이이첨이 그를 버린 것이 더 이상합니다. 광해군이나 이이첨이나 폐모는 물론 인목왕후를 죽이는 게 목적이었다면 허균을 더 밀어야 되는 상황이었거든요. 하지만 이이첨은 그를 버립니다. 흥미롭게도 인목왕후가 대비의 지위를 잃고 서궁에 갇힌 직후부터 벌어진 일이었죠.
정말 허균이 폐모론을 넘은 역모를 꾸민 것일까요? 그렇게 보기엔 그의 마지막 말이 또 걸립니다. 어차피 그의 부하들이 다 실토한 상황이고 허균도 고문만 좀 해주면 그 말이 나올수밖에 없는데 말이죠. 역모가 아니라고 본다면 참 전형적인 토사구팽이구요.
+) 여기서 좀 더 나아가서, 허균이 애초에 이이첨의 사람이었다면 서양갑의 옥사부터 재구성이 가능합니다. 애초에 허균이 서양갑과 친했고 서양갑은 인목왕후부터 영창대군을 역모에 끌어들였다는 것이요. 허균이 여기 개입돼 있다면? 좀 섬뜩하죠. 뭐 이보다는 허균이 서양갑과 친했다는 걸 만회하려고 이이첨 밑으로 갔다는 게 대세입니다 - -a
어찌됐든 그의 능력, 그의 이상(이라고 알려진 것들)에 비한다면 참 의외의 행동이고 의외의 죽음입니다. 조선이라는 사회를 갈아엎을 이상을 꿈꿨다는 것에 비해 당시의 대세에 합류해 선봉으로 활약했으니까요.
이렇게 폐모론 논의는 일단락 됩니다. 그리고 광해군과 이이첨의 관계 역시 그 이전과는 확실히 달라지게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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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편으로 끝을 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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