옵션 |
|
오늘은 비정규직 노동자로 살아가고 있는 분의 질문과 스님의 답변을 소개합니다. 노동조합에 가입해 사회제도를 개선하는 일을 하고 있는데, 모든 괴로움은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수행문을 받아들이기가 어렵다며 답답한 마음을 토로했습니다.
“저는 비정규직 노동자로 살고 있는 50대 초반 여성입니다. 비정규직 문제가 커다란 사회 문제 중 하나로 관심을 모으고 있습니다. 저는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이 비정규직 문제가 반드시 해결돼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는데 일조하고자 노동조합에 가입해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노동조합 조합원으로 활동하다 보니 관리자와 불편하고 직장 동료들과도 불편할 때가 많습니다.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 등 사회제도가 가진 문제를 살피고 시시비비를 가려야 하는 분별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다보니 ‘모든 괴로움은 마음에서 비롯된다. 시비하지 말라. 분별심을 내지 말라’라는 수행문을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고민은 잘못된 사회제도에서 비롯된 것인데 왜 모든 것이 마음에서 비롯된다고 하는 것인지요?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나의 의지가 옳으며 이것을 굽히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내 것이 옳다고 고집하는 것 또한 잘못된 것인지요?”
스님은 질문 내용에 모두 동의한다고 수긍하면서도 부처님의 가르침은 무엇을 뜻하는지 자세한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질문한 내용에 저도 동의합니다. 그런데 부처님의 가르침은 ‘내가 이해되지 않고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 해서 상대를 틀렸다고 말하지 마라’ 이런 이야기지, ‘내가 이해되지 않아도 무조건 받아들여라’라는 건 아닙니다.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것은 본인에게 정당한 행동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걸 하면서 괴로워하지 말라는 거예요. 내가 이 문제를 가지고 직장 동료나 상사에게 이야기했을 때 상사가 내 의견에 반대하면서 나를 나쁘다고 해도 그걸 듣고 내가 괴로워하지 말아야 해요. 괴로움은 나로부터 비롯되는 겁니다. 비정규직 문제가 잘못됐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비정규직인 나의 입장이고, 회사 관리자 입장에서는 ‘현재 우리 사회에서 비정규직은 필요악이다. 필요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그의 생각이에요. 노동조합에 가입하지 않은 다른 동료의 경우 자기도 비정규직으로서 부당하게 대우받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다가 관리자에게 밉보여서 직장을 잃는 것은 원치 않는다면 그건 또 그 사람의 생각이에요. ‘좀 더 주면 좋긴 하겠지만 좀 더 달라고 싸우다가 이 직장을 잃어버리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에 좀 적어서 불만이더라도 지금 나한테는 이거라도 꼭 필요하니까 이거라도 가져야 하겠다’ 그 사람은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그건 나쁜 게 아니에요. 그것도 그 사람의 생각입니다. ‘이것은 부당하니까 개선해서 제대로 대우받아야 되겠다’ 하는 나의 생각이나 그 사람 생각이나, 나는 옳고 그 사람은 틀린 게 아닙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하지만 저 사람은 저렇게 생각하고, 관리자는 또 다르게 생각하는 거예요. 이 셋에 대해서 서로 이해를 하면 내가 괴롭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게 잘못됐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걸 개선하고자 하면 그렇게 해도 좋아요. 그런데 그러면 반드시 저항이 따릅니다. 불이익이 따르는 것을 감수해야 해요. 수행자라면 웃으면서 해야 하고 불이익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해요. 이것을 괴로워하면 손실을 보는 게 힘들어지니까 나중에 그만두게 됩니다. 나만 괜히 손해본다고 생각하게 되거든요.
제도가 개선되어 혜택을 보면 나만 혜택을 보는 게 아니라 노동조합에 가입 안 한 다른 사람까지 해택을 보게 되죠. 그런데 불이익을 당할 때는 나만 당해요. 이게 어려운 거예요. 불이익은 나만 당하고 혜택도 나만 본다면 손해도 이익도 혼자 감수하는 주식투자 하듯이 해볼 만하지만, 손해는 나만 보는데 이익은 다 똑같이 나누니까 얄미운 거예요. 그래서 보살이 필요한 거예요. ‘손해는 내가 기꺼이 안고 이익은 같이 나누는 게 좋다’ 이런 관점을 가지면 동료를 미워하거나 싫어하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관리자의 입장에서는 비정규직들의 항의를 막아야 자기가 자리를 지키고 월급을 받잖아요. 항의를 받아들이면 사장이 잘라버리잖아요. 그 사람이 속으로 이게 부당하다는 걸 이해한다고 해서 ‘알면 너도 행동해야지’ 이렇게 말하면 안 돼요. 그 사람도 이해가 걸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비정규직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학자나 사람들도 있어요. 그 사람들은 또 그런 견해가 있는 거예요. ‘그 사람을 이해하니까 안 해야 된다’가 아닙니다. 이해하게 되면 분노가 안 일어난다는 거예요. 괴로움이 일어나는 건 내 문제라는 겁니다.
그러나 이것이 시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시정하는 행동을 해야 합니다. 그걸 하고 안 하고는 자기 개인의 선택이에요. 그런데 개선을 해서 이익이 되면 그만한 노력의 대가가 와야 하는데 노력의 대가는 항상 이익만 오는 게 아니라 손해가 날 때도 있습니다. 주식투자가 반드시 이익만 보는 게 아니라 손해날 때도 있는 것과 같아요. 그 위험을 감수해야 합니다.
스님도 지금 이대로 내버려두면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날 위험도 있고 통일은 물 건너 갈 것처럼 보이니까 ‘이러면 안 된다’ 해서 바꾸려고 하잖아요. 바꾸려고 하는데 잘 안 바뀌어진다고 괴로워한다면 이건 제 문제예요, 제가 괴로워한다면 그건 남북한 지도자의 문제나 미국 문제나 중국 문제가 아니라 제 문제라는 이야기입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네.”
“북한은 북한대로 이유가 있고, 남한은 남한대로 이유가 있고, 미국은 미국대로 이유가 있고, 중국은 중국대로 이유가 있는 거예요. 내버려둘 거냐,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와 국민의 미래 이익을 위해서 행동할 거냐, 이것은 내 선택이에요.
이런 행동을 하면 지금은 칭찬보다 비난이 많아요. 불이익이 반드시 따른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불이익이 따를 수도 있어요. 예를 들어 지금 통일의병 운동이 굉장히 큰 힘을 모으게 되면 이것 때문에 손해 보거나 불이익을 받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저항을 하겠죠. 우선 댓글에 욕설이 많이 달리겠죠.(대중 웃음)
또 권력을 쥔 사람에게 불이익이다 싶으면 모함이 따르겠죠. 언론에서 조그마한 걸 꼬집어서 뻥튀기해 비난할 수도 있을 겁니다. 언론에 좋지 않은 기사를 내보내고 돈을 어떻게 했다면서 스캔들을 터뜨리면 세력이 확 꺾이거든요. 종교단체가 문제되는 건 두 가지밖에 없어요. 여자 문제나 돈 문제만 이야기되면 사람들이 다 싫어합니다. ‘아무리 조심해도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없다’는 말이 있듯이 털면 뭐든지 핑계거리가 있을 테고, 없어도 ‘아니면 말고’하고 넘어가면 이미 언론을 통해 타격은 입는 거예요. 이런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게 두려우면 못 하는 거예요.
우리가 어떤 일을 시작할 때는 그에 따르는 저항을 이미 감수를 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정토회를 아끼는 사람 중에는 스님이 인생상담만 하면 위험이 별로 안 따르는데 사회비판도 하니까 혹시 스님이 어떻게 될까 봐 걱정하는 사람도 있어요. 스님을 좋아해서 보호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이고, 스님, 그런 말은 제발 하지 마세요’라고 하고, 한편으로는 ‘스님이 왜 사회나 정치적 이슈에 발언을 하느냐’라고 화내는 사람도 있어요.
이게 이 세상이에요. 저도 욕 안 얻어먹으려면 이렇게 인생상담만 해주고 조용히 있으면 좋겠죠. 아예 입 다물고 가만히 있으면 더 좋아요. 입 다물고 가만히 있으면 훌륭한 스님이 돼요. 우리 문화는 스님이 말을 하면 훌륭한 스님이 안 되고, 뭘 물어도 ‘모른다’ 하고는 입 다물고 가만히 있으면 고승이 됩니다.(대중 웃음)
비정규직은 임시직이잖아요. 임시직은 옛날에도 있었고 지금도 있고 미래에도 있을 거예요. 임시직이 없다는 건 불가능해요. 임시직은 있을 수 있고, 사회 시스템상 갈수록 임시직이 정규직보다 더 늘어날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임시직이 있기 때문에 잘못된 게 아니에요. 임시직과 정규직의 임금체계가 지금 왜곡되어 있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겁니다.
원래는 이래야 해요. 노동자가 하루에 5만원을 받는다고 합시다. 한 달을 매일 일한다고 생각하면 150만원을 받아야 하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이 사람이 매일 일한다고 받아들이면 월급을 120만원 줍니다. 이 사람의 입장에서는 하루에 4만원 꼴밖에 안 되는 거예요. 그래도 이 사람은 그 일을 합니다. 매일 일거리가 확보가 되니까요.
그런데 임시직은 원래 정규직보다 일당을 많이 쳐줍니다. 이 사람은 일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으니까요. 하루 일당을 정규직은 4만원 쳐준다면 임시직은 5만원 쳐줘야 합니다. 이 두 사람의 월급을 비교하면 그래도 정규직이 많습니다. 정규직은 4만원씩 매일 30일치를 받아서 한 달에 120만원을 벌지만, 임시직은 어떤 날은 일이 있고 어떤 날은 일이 없기 때문에 5만원씩 받는 대신에 실제로 일할 수 있는 날은 한 달에 20일밖에 안 돼서 100만원밖에 못 버는 셈이거든요. 그래서 정규직을 하는 사람은 이걸 계산해 보고 ‘일거리가 매일 확보되니까 일당으로 치면 4만원으로 좀 낮지만 내내 일하는 게 낫겠다’라고 선택한 거예요. 그리고 정규직에는 보너스나 추가 수당이 있고 임시직은 일당이 비싼 대신에 보너스 같은 게 없고 보장도 적잖아요. 이처럼 정규직은 월급이 적은 대신에 다른 부수적인 게 많기 때문에 사람들이 ‘일당은 적지만 여러 가지로 종합해보니 정규직이 낫겠다’ 해서 정규직을 하는 거예요. 이게 정상이에요.
그러면 회사는 ‘일감이 아무리 적을 때도 사람이 10명은 필요하다’ 하면 10명의 정규직을 확보합니다. 회사는 정규직을 최소한으로 확보하는 게 이익이거든요. 일감이 가끔 늘었다가 줄었다가 하는데 늘어날 때마다 정규직을 늘리면 일당으로 치면 적게 들지만 항상 월급을 줘야 되니까 손해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일감이 늘 때는 일당을 좀 많이 주더라도 임시직을 쓰는 게 나아요. 임시직은 필요한 일이 끝나면 더 이상 고용을 안 하면 되잖아요. 이게 정상적인 사회예요. 그러니 이때는 정규직이 좋다, 임시직이 좋다 말할 수가 없어요. 저 같은 사람은 이런 시스템일 때 임시직을 선택할 겁니다. 일이 있을 때는 일을 하고, 일이 없을 때는 수행하고 봉사하며 다른 할 일이 많으니까요.
그런데 지금의 비정규직이라는 건 이런 게 아니에요. 원래는 임시직의 일당이 더 많아야 하는데, 정규직은 하루에 10만원씩 쳐서 300만원을 주면서 임시직은 임시인데다가 복지며 보장도 없는데 일당마저 하루 5만원밖에 안 쳐주는 거예요. 똑같은 일을 하고 이 사람은 300만원을 받고 이 사람은 150만원을 받는 겁니다. 월급이 반밖에 안 돼요. 월급만 반인 게 아니라 한쪽에는 온갖 보장이 있는데 다른 쪽에는 아무런 보장도 없으니까 문제가 돼요.
왜 이런 문제가 발생할까요? 예를 들어 회사가 돈을 많이 벌었어요. 그래서 노동자들이 보기에 회사는 돈을 많이 버는데 우리 임금은 적으니까 ‘임금을 더 달라’고 해서 임금을 올렸어요. 회사하고 노동자만 보면 노동자 입장에서는 임금이 이만큼 올라야 하잖아요. 그런데 이 회사가 잘 되는 회사다 보니까 이 회사 노동자의 월급이 다른 회사의 노동자의 월급에 비하면 또 많은 거예요. 노동자는 ‘회사가 벌어들이는 이익에 비해 우리 월급이 작다’ 이런 관점에서 보고, 회사는 ‘다른 회사 노동자에 비해서 너희들 월급이 너무 많다’ 이런 관점에서 봐요. 이렇게 평가 기준이 서로 다르니까 이걸 갖고 죽기 살기로 싸우는 거예요. 그래서 회사 편을 드는 언론은 ‘너희들 임금이 일반 노동자의 두 배, 세 배니까 완전히 귀족노동자다’ 이렇게 막 비판하는 것이고요. 이건 바깥에 있는 보통 사람과 비교한 겁니다.
그런데 월급을 다른 회사에 비해 두 배 이상 받으면서도 파업을 하는 이유는 노동자들이 보기에는 회사에 이익이 났는데 노동자들한테 안 돌려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회사에 이익이 났다면 그 돈은 우리가 벌어준 것이니 그 중 일부라도 우리에게 줘야 하는데 안 주고 기업주가 다 먹는다’라고 하는 겁니다. 밖에서 구경하는 사람이 볼 때는 ‘저 노동자들이 너무 심하다’ 이러지만 노동자들 입장에서는 자기들 회사의 이익을 기준으로 삼기 때문에 파업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만약 회사가 적자가 나면 어떨까요? 회사는 적자가 나면 무조건 월급을 적게 주려고 하는데 노동자들 생각은 또 달라요. 옛날에 이익이 날 때는 노동자에게 이익을 조금밖에 안 주고 회사가 그 돈을 다 사내보유금으로 보유했잖아요. 지금도 사내보유금이 엄청나게 많이 있는 거예요. 그런데 적자났다고 해서 바로 노동자 월급부터 동결시키거나 깎으니까 노동자가 볼 때는 화가 나는 거예요. 엄청난 사내보유금이 있으면서도 그러니까요. ‘이익을 볼 때 그 이익을 우리한테 다 준 게 아니고, 회사 어려울 때를 생각해서 보유한다며 사내보유금을 엄청나게 마련해놓지 않았느냐. 그런데 회사가 어렵다고 바로 우리 월급을 동결시키거나 깎는 걸 보면 사내보유금은 자기들끼리 다 먹겠다는 게 아니냐’ 이렇게 해서 파업을 하는 거예요. 적자가 나서 노동자들을 해고하고 월급 동결하겠다는 걸 노동자가 반대하니까 밖에 있는 사람들은 ‘저 사람들은 회사가 적자 난다는데 왜 저렇게 싸우나’ 하는데 이것은 모르고 하는 소리예요.
이렇게 서로 싸우다가 둘이 서로 타협을 하게 됩니다. 회사는 이익을 보려 하고 노동자는 손해를 안 보려 하다 보니 이 둘이 담합을 해서 만든 게 비정규직이에요. 즉 회사에서 노동자가 필요해서 새로 뽑더라도 기존에 있던 노동자는 이익을 보장해주지만 새로 뽑는 노동자는 월급을 반으로 하겠다는 거예요. 그러면 기존의 노동자 입장에서도 자기 이익은 손해 안 나니까 반대하지 않아요. 또 새로 뽑는 사람을 정규직으로 뽑으면 노조에 가입을 하게 되니까 회사로서는 부담이 되잖아요. 그러니까 비정규직으로 타협을 해서 이 사람에게 일은 시키되 정식으로 고용은 하지 않는 거예요. 그러면 노동자도 자기 이익을 지키고, 회사도 자기 이익을 보존합니다.
그러면 이 손실이 누구한테 떨어질까요? 비정규직 노동자한테 떨어져요. 그래서 비정규직이 문제가 되는 겁니다. 똑같은 공장에서 똑같은 일을 하는데 정규직은 월급도 배로 받고 사내 보장제도의 혜택도 많은데, 비정규직은 언제 그만두게 될지도 모르고 월급도 적고 보장도 안 되는 문제가 발생하는 거예요. 이렇게 비정규직은 회사로부터만 차별받는 게 아니라 같은 노동자로부터도 차별받는 문제가 발생하니까 이건 잘못된 거예요. 그래서 이것은 개선이 돼야 합니다.
그러려면 회사도 양보를 해야 하지만 기존의 노동자들도 조금 양보를 해서 임금 인상을 멈춰줘야 하는데 그러기가 쉽지 않죠. 지금 공무원들도 똑같은 문제예요. 이렇게 되다 보니 하청만 자꾸 늘어나는 거예요. 이걸 회사로 모으면 회사가 다 책임져야 하는데 하청을 주면 책임지지 않아도 되거든요. 예컨대 어떤 일을 할 사람을 회사에서 고용하면 월급을 300만원 줘야 하는데 하청 업체에서 고용하면 150만원을 줄 수 있잖아요. 같은 사람이라 해도 대기업에 들어오면 300만원 받는데 중소기업에 들어오면 150만원 받잖아요. 그래서 하청 업체에 고용돼서 대기업에서 하는 것과 똑같은 일을 하청 업체의 이름으로 하는 거예요. 현장에 와서 똑같은 일을 하는데도 이 사람은 대기업이 아니라 하청업체에 소속되어 있어요. 예를 들면, 시청에 가서 청소를 하지만 나는 시청 공무원이 아니고 월급도 300만원이 아니에요. 청소를 전문으로 하는 하청회사에 취직을 해서 150만원을 받는 것인데 일은 시청에 가서 하는 겁니다. 시청의 모든 청소를 이 회사가 맡아서 하는 거예요. 이런 식으로 해서 공무원 수를 줄인 것처럼 눈속임하지만 실제로 일이 줄어든 것은 아니잖아요. 그래서 하청을 통해 업무를 밑으로 밑으로 떠넘기는 거예요. 이렇게 되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전부 하청업체의 비정규직으로 고용돼 있는 겁니다. 하청 업체는 작은 회사니까 사고가 나도 책임도 못 져줍니다. 싸워봤자 회사에 돈이 없잖아요. 이렇게 해서 가난한 자는 더 가난해지고, 기득권자는 더 많은 이익을 쌓는 겁니다.
그러니 이걸 개혁해야 해요. 그러나 여러분들이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만 주장하면 이게 개선되기가 어려워요. 현실적으로 모든 사람을 정규직화할 수는 없으니까요. 비정규직을 없애는 게 아니라 비정규직의 차별을 없애야 합니다. ‘동일 노동에 동일 임금’이라는 원칙이 있잖아요. 차별을 없애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사회제도를 바꿔야 해요. 이게 바뀌려면 이것을 개혁할 정부가 들어서야 합니다. 아무리 밑에서 싸워봐야 안 돼요. 제가 보기에는 밑에서의 싸움도 중요하지만 이것보다는 이런 것을 개혁할 정부를 세우는 데 힘을 쏟아야 해요. 위에서부터 바뀌어야 아래에 혜택이 주어지지, 위에서 이렇게 시스템을 만들어놨는데 아래에서 아무리 악을 써봐야 희생만 당해요. 그렇다고 그런 운동을 안 해도 된다는 건 아니에요. 아래에서도 고함을 쳐줘야 해요. 그러나 쉽게 될 거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이건 이미 시스템으로 딱 굳어져 있기 때문에 밑에서 수백만이 아우성을 쳐도 위에서는 해결을 안 해줘요.
그러니 이러한 저항이 투표로 연결돼야 합니다. 정규직보다 비정규직 수가 더 많으니 투표를 해서 개혁을 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우리나라 정당은 전체의 1퍼센트인 기업주의 이익을 대변하거나 전체의 10퍼센트인 정규직 대기업 노동자의 이익을 대변하는 두 당밖에 없어요. 아래 90퍼센트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당이 지금 없습니다. 말만 전 국민을 대변한다고 하지, 민주당도 새누리당도 심지어 진보정당마저도 일반 국민, 다시 말해 전체의 90퍼센트를 대변하는 정당이 아니에요. 자기들끼리 싸우고 자기들끼리 리그전을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정권이 바뀌어도 특별히 바뀌는 게 없는 겁니다.
질문자는 지금 하는 활동을 계속하셔도 좋습니다. 개인이 바뀌어야 한다는 게 수행이고 우리가 사는 사회를 바꿔야 한다는 게 정토예요. 우리가 ‘정토회’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사회를 바꾸자는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개인만 바꾸자는 뜻이었으면 ‘정토회’가 아니라 ‘성불회’라고 했겠죠. ‘정토회’라고 이름붙인 것은 이런 모순된 세상을 변화시켜야 한다는 목표가 강력하게 들어있다는 뜻입니다.(대중 웃음)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화내고 폭력적으로 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그건 상대에 대한 이해가 없기 때문이에요. 우리는 상대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해요. 가진 사람은 가진 사람대로 세금에 불만이 있어요. 돈을 많이 벌어서 세금을 많이 내는 사람은 세금 내는 게 좀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없는 사람이 볼 때는 ‘너는 세금을 내도 돈이 엄청나게 많지 않느냐’고 하죠. 기준이 그래요. ‘천만 원 벌어서 이백만 원을 세금으로 내도 너는 팔백만 원이나 수입이 있지 않느냐’ 이렇게 생각하는데, 가진 사람은 ‘내가 번 천만원 중에 이백만원이나 세금으로 내야 하나’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기준이 서로 다른 거예요. 그래서 이 세상에 충돌이 일어나는 것이니까 우리가 화내고 괴로워할 일은 아닙니다.
이것을 변화시키기 위해서 행동을 하게 되면 반드시 반대 저항이 일어납니다. 그러면 불이익을 받아야 해요. 직장을 그만두게 될 수도 있고 비난을 받을 수도 있고 여러 가지가 있겠죠. 그걸 감수해야 하는데, 이걸 생각하지 않고 ‘내가 정당하니까 당연히 그렇게 돼야 한다’ 이렇게 생각하면 이제 괴로워지는 거예요. 애써도 잘 안 되니까요 괴롭고, 불이익을 당하면 억울하고 분하거든요.
그러니까 사회 변화를 위해 노력하면서 동시에 수행을 해야 합니다. 보디사트바는 꾸준히 수행하면서 동시에 세상의 변화를 위해서 하는 노력도 행복하게 해야 해요. 행복해야 꾸준히 할 수 있고 꾸준히 해야 변화가 일어나요.
우리 사회의 지금 가장 큰 문제는 두 가지예요. 하나는 앞서 말씀드린 현상 때문에 빈부격차가 급속도로 벌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90대 10이 아니라 99대 1, 심지어는 99.9 대 0.1이라고 할 정도로 빈부격차가 빠르게 벌어지고 있습니다. 먹고 살만한 데도 빈부격차가 너무 심하니까 삶이 불안정하고 이렇게 힘든 거예요. 그래서 동남아 사람들이 우리나라 사람들을 보면 이해가 안 된다고 해요. ‘한국 사람들은 다 살만한데 왜 저렇게 힘들어하는지 모르겠다’ 이렇게 말하지만 정작 이 속에 사는 사람은 또 그렇지가 않죠. 그래서 우리가 이런 걸 좀 변화시켜서 빈부격차를 완전히 없앨 수는 없더라도 벌어진 격차를 조금 좁혀줘야 합니다. 중산층이 있다는 건 빈부격차가 적다는 뜻이에요. 그런데 중산층이 몰락한다는 것은 빈부격차가 극심한 양극화 현상이 일어난다는 뜻이니까 이건 개선해야 해요. 그리고 남북의 분단을 극복해야 해요. 빈부격차가 해소 안 되는 것은 남북 분단과도 관계가 있습니다. 빈부격차를 해소하자고 주장하면 ‘빨갱이’로 몰리거든요.
그래서 이 두 가지 문제를 같이 극복해야 하는 것이 현재 대한민국의 과제예요. 저도 질문자를 지지하지만 괴롭게 살지는 마세요. 생글생글 웃으면서 하세요.” (대중 웃음)
스님의 답변에 대중들은 웃음을 터뜨리며 큰 박수를 보냈습니다.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이 생겨나기 시작한 이유와 빈부 격차 문제, 한국 사회에서 다양한 갈등이 생겨나는 원인이 무엇인지 일목요연하게 이해가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사회 변화 또한 생글생글 웃으면서 해야 한다는 말씀이 마음을 가볍게 해주었습니다.
졸음에서 깨어난 대중들은 다시 스님의 이야기에 집중하기 시작했습니다. 법문을 시작한 지 3시간이 경과하자 스님은 “질문 하나만 더 답변할 수 있을 것 같다” 며 마지막 질문을 읽었습니다. 마지막 질문은 환경 운동을 잘 실천하지 못해 죄책감이 든다는 질문이었는데, 스님은 마지막으로 ‘도란 무엇인가’ 에 대해 아주 재미있는 얘기를 들려주며 법문을 마쳤습니다.
“약간의 불편을 감수하는 것이 환경운동입니다. 산에 가서 오줌 누고 똥 누는 게 무조건 잘못됐다고 생각하면 안 돼요. 산에 사는 수많은 짐승들은 오줌이며 똥을 다 산에 눕니다. 다만 한 군데에만 너무 누면 좀 냄새가 나죠. 오줌을 작은 풀잎에 눠버리면 말라죽어버리지만 큰 나무 밑에 누면 거름이 됩니다. 다른 게 도(道)가 아니에요. 오줌 줄기를 작은 새싹으로 향하던 것을 큰 나무줄기로 향하는 이게 도예요. 이게 환경운동입니다. (대중 웃음)
어릴 때 제 친구들을 보면 똥을 눌 때 대부분 냇가에 눠요. 냇가에 누면 떠내려가 버리니 안보이잖아요. 그러나 이건 환경오염을 시키는 일이에요. 반면에 똥을 땅에 누고 위에다가 낙엽이나 돌로 눌러놓으면 거름이 되기 때문에 이건 환경운동이에요.
도라는 것을 너무 멀리 생각하면 안 돼요. 일상 속에서 내가 하는 행위가 항상 나도 이롭고 남도 이롭도록 하는 게 도예요. 부처님을 향해 열심히 삼천 배를 하고 난 뒤 똥을 물에다가 누면 그건 도가 아니란 말이에요.(대중 웃음) 도가 멀리 있다고 생각하면 안 돼요.”
출처 | http://www.jungto.org/buddhist/budd8.html?sm=v&b_no=74019&page=1&p_no=7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