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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비잔티움 제국사(22) - 유스티니아누스 시대
게시물ID : history_789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리볼버오셀롯
추천 : 2
조회수 : 870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3/03/01 14:38:23

http://cafe.daum.net/shogun의 푸른 장미님이 쓰신 글입니다.

유스티누스 황제는 527년 초 중병에 걸리자 유스티니아누스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527년 4월 4일 대궁전 안의 교회에서 3년 전에 결혼한 아내 테오도라와 함께 부황제 대관식을 치렀다. 그리고 유스티누스가 같은 해 8월 1일에 세상을 뜨자 유스티니아누스는 황제, 테오도라는 여제가 되었다.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와 신하들

유스티니아누스 재위기에 대한 자료는 주로 카이사레아 출신의 피로코피우스에게서 나온 것이다. 프로코피우스는 527년 유스티니아누스의 젊은 장군 벨리사리우스의 참모로 임명되면서 콘스탄티노플에서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페르시아전, 아프리카전, 이탈리아전에서 벨리사리우스를 수행했으며 542년 콘스탄티노플로 귀환했고 그로부터 20년 후 콘스탄티노플 총독으로 뽑혔다.

 

 

벨리사리우스

그러나 프로코피우스는 한편으로는 유스티니아누스와 테오도라에 대한 악의에 차고 야비하고 군데군데 도저히 믿기 어려운 공격을 담은 <숨겨진 역사(아네크도타)>라는 책을 은밀히 펴냈다. 이 책에서 그는 로마 제국의 모든 잘못된 점을 유스티니아누스와 테오도라의 탓으로 돌렸으며 다른 두 책에서 남발한 황제에 대한 찬양과 모순되는 내용이 많았다. 프로코피우스는 <숨겨진 역사>에서 벨리사리우스와 그의 악명 높은 아내 안토니나에 대해서도 썼다. <숨겨진 역사>에 따르면 테오도라와 안토니나는 둘 다 천한 태생이었다. 테오도라는 히포드롬의 곰 사육사의 딸이었고 안토니나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마부였다. 그리고 두 여자는 고급매춘부로 결혼 전까지 타락한 삶을 살았다. 테오도라는 결혼 후 새 사람이 되었지만 안토니나는 죽을 때까지 방탕하게 살았다.

 

테오도라와 신하들

 

제국의 동부 전선은 유스티누스 황제 재위 기간 내내 조용했지만 그가 죽던 해에 페르시아군이 아르메니아를 침공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황위와 함께 이 싸움에 대한 책임을 물려받았으며 이후 긴 재위 기간의 대부분을 동부와 서부 전선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전쟁들에 신경 써야 했다. 1차 페르시아 전쟁(527~532)에서 벨리사리우스 장군은 530년에 대승을 거두었지만 이듬해 참패하여 콘스탄티노플로 소환되고 말았다. 그가 아직 콘스탄티노플에 머무르고 있던 532년 초 유스티니아누스는 황제 자리에서 쫓겨날 절체절명의 위기에 봉착했다.

 

유스티니아누스 대제가 즉위하던 당시의 영토(주황색)와 이후 그의 제위기간 중에 확장된 비잔티움 제국의 영토(오렌지색). 특히 벨리사리우스의 공이 컸음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 위기는 532년 1월 10일 히포드롬에서의 폭동으로 시작되었다. 사흘 후 폭동의 불길은 더욱 거세져서 청색당과 녹색당 관중들이 히포드롬을 나서 대궁전으로 향했다. 그들은 승리를 뜻하는 “니카!”를 외쳤으며 이 구호는 폭동의 이름이 되었다. 1월 18일 일요일 폭도들은 히파티우스(아나스타시우스의 조카)를 히포드롬의 특별관람석 카티스마로 데려가 황금 목걸이를 걸어주고 황제로 추대했다.

 

한편 궁전의 유스티니아누스와 신하들은 절망적인 분위기에서 회의를 하고 있었다. 신하들은 일단 프로폰티스(소아시아의 북서부)의 헤라클레아로 도피하여 그곳에서 힘을 규합하여 도시를 되찾을 것을 권유했지만 테오도라가 감동적인 연설로 이곳에 남아 옥좌를 지켜야 한다고 설득했다. 벨리사리우스가 야만인들로 구성된 군대를 이끌고 출격하여 폭도들을 히포드롬에 몰아넣었는데 프로코피우스에 의하면 그곳에서 3만 명이 사살되었다고 한다. 히파티우스와 그의 동생 폼페이우스는 처형당해 바다에 시체가 던져졌으며 폭도들의 시신은 히포드롬의 공동묘지에 묻힌 것으로 보인다.

 

니카 폭동으로 첫 번째 언덕의 궁전 지구 대부분이 폐허로 변했으며 하기아 소피아와 하기아 이레네도 완전히 파괴되었다. 폭동 진압 40일 후인 532년 2월 23일 대대적인 복구 작업이 시작되었고 테오도시우스 교회의 폐허 위에 새로 하기아 소피아를 세우기 시작했다. 프로코피우스에 따르면 “황제는 비용 문제는 개의치 않고 전 세계의 장인들을 불러 모아 축조 작업을 강력히 추진했다.” 유스티니아누스의 수석 건축가는 트랄레스 출신의 안테미우스로 당대 최고의 수리물리학자였으며 아테네에서 플라톤 학파의 수장을 지낸 저명한 수학자인 밀레투스(소아시아 서안에 위치한 고대 그리스의 도시) 출신의 이시도루스가 그를 도왔다. 교회는 6년 만에 완공되었고 537년 12월 26일 메나스 총대주교가 교회를 다시 성 ‘지혜(소피아)’에 바쳤다. 테오도라도 유스티니아누스와 함께 교회 설립에 참여했으며 본당과 회랑들의 기둥들에 그녀의 이름도 새겨져 있다.

 

532년에서 537년까지 유스티니아누스는 니카 폭동으로 파괴된 구교회 자리에 하기아 이레네(성 평화)에 바칠 새 교회도 지었다. 프로코피우스에 따르면 “하기아 이레네는 하기아 소피아와 나란히 위치해 있다가 함께 불타 없어졌으며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더 크게 새로 지어 하기아 소피아를 제외하면 비잔티움의 어느 교회와 견주어도 규모에 있어서 뒤지지 않았다.”

프로코피우스는 542년에 시작되어 먼저 이집트를 강타하고 이듬해 콘스탄티노플에까지 퍼진 끔찍한 선(腺) 페스트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현대의 한 역사가는 이 질병으로 콘스탄티노플에서 30만 명 정도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했는데 당시 콘스탄티노플의 인구가 50만 명 정도였다.

 

프로코피우스는 2차 페르시아 전쟁에 대한 설명을 마치고 계속해서 북아프리카와 이탈리아의 재정복에 대해 기술했다. 533년 여름 벨리사리우스 장군은 반달족에게서 아프리카를 재탈환하기 위해 원정군을 이끌고 콘스탄티노플을 떠났다. 늘 그랬듯이 그의 아내 안토니나가 동행했으며 그녀는 젊은 연인 테오도시우스를 데려갔다. 벨리사리우스는 카르타고에서 16킬로미터쯤 벗어난 지점에서 반달족 왕 겔리메르를 무찌르고 533년 9월 15일 카르타고를 손에 넣었다. 이듬해 유스티니아누스의 소환을 받은 그는 겔리메르를 포함한 3,000명의 반달족 포로를 이끌고 콘스탄티노플로 돌아갔다. 그는 히포드롬에서 겔리메르를 비롯한 포로들을 거느리고 행진을 하며 승전 기념식을 가졌다.

 

북아프리카 수복 기념주화

 

2년 후 유스티니아누스는 동고트족에게 함락된 이탈리아를 되찾기 위해 벨리사리우스를 파견했고 이번에도 안토니나는 남편을 따라갔다. 그러나 벨리사리우스는 결국 자신의 군대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을 만큼 강하지 못함을 깨달았다. 좌절한 그는 548년 봄 안토니나를 콘스탄티노플로 보내 테오도라에게 사정을 호소하게 했다. 그러나 그녀의 긴 여행은 허사가 되었다. 이탈리아 전쟁에 대해 설명하면서 프로코피우스가 쓴 그대로 인용하면 “이 시기쯤 벨리사리우스의 아내 안토니나는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비잔티움으로 떠났다. 그러나 테오도라는 이미 병에 걸려 황후의 자리에 오른 지 21년하고도 석 달만에 세상을 하직한 뒤였다.” 그리하여 안토니나는 상중(喪中)인 도시로 돌아오게 된 것이었고 유스티니아누스는 아내를 잃은 슬픔에 그녀를 맞이할 경황이 없었다. 그러나 안토니나는 벨리사리우스가 콘스탄티노플로 소환되도록 손을 썼는데 어차피 이탈리아 원정은 실패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고 그녀는 남편이 실패의 책임을 지는 걸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동고트 왕국

 

유스티니아누스는 종교적 통합을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제국 내에 남아있는 이교의 흔적을 완전히 없애고자 했다. 이와 관련된 가장 주목할만한 조치는 529년에 이교 철학의 마지막 본거지였던 아테네의 플라톤 아카데미를 폐쇄한 것이었다. 아카데미의 폐쇄에도 불구하고 유스티니아누스 재위기에 고전 문화의 마지막 르네상스가 찾아왔는데 아테네를 비롯한 고대 그리스 문화의 중심지들이 야만인에게 짓밟힌 뒤라 그 장소는 콘스탄티노플이 되었다. 그것은 이교적이기보다는 기독교적인 색채를 띠긴 했지만 그리스의 부흥이라고 할 수 있었고 사실 콘스탄티노플에서 라틴어는 거의 행정과 법 용어로밖에 사용되지 않게 되었다. 유스티니아누스 재위기의 위인으로는 역사가 프로코피우스, 법률가 트리보니아누스, 과학자 트랄레스 출신의 안테미우스와 밀레투스 출신의 이시도루스, 시인 아가티아스 스콜라스티쿠스와 파울루스 실렌티아리우스가 있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테오도라가 죽은 후 딴사람이 되어 측근들로부터 멀어지고 국사를 소홀히 했으며 결정들을 미루고 신학의 심오한 문제들에만 매달렸다. 그의 황제로서의 원대한 꿈은 이미 실현된 상태로 그의 제국은 이제 페르시아 국경에서부터 소아시아, 발칸 반도, 이탈리아까지 뻗어 나갔으며 스페인의 남서 해안뿐 아니라 북아프리카의 해안을 따라서도 이집트, 팔레스타인, 시리아, 메소포타미아로 넓혀졌다. 프로코피우스는 <건축물들>에서 유스티니아누스가 광대한 영토의 변경을 방어하기 위해 세운 수백 개의 요새들을 열거하면서 황제가 콘스탄티노플을 비롯한 제국의 도시들에 지은 교회들과 건축물들에 들어간 어마어마한 비용은 말할 것도 없고 그가 로마의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기 위해 끊임없이 치른 전쟁들의 천문학적인 비용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그 결과 유스티니아누스 재위 말기에 이르자 제국은 사실상 파산 상태에 이르렀고 국고가 텅 비어 아나스타시우스 장성(長城)의 보수 작업조차 계속할 수가 없었다. 이 틈을 노려 자베르간 장군이 이끄는 코트리구르 훈족이 트라키아를 침공하였으며 559년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했다. 황실 군대가 모두 변방에 배치된 형편이라 유스티니아누스는 애매한 은퇴 상태에 있던 벨리사리우스 장군을 다시 부르는 도리밖에 없었다. 벨리사리우스는 콘스탄티노플 주민 중에서 병력을 최대한 모으고 300명의 이탈리아전 참전 용사들로 하여금 그들에게 군사 훈련을 시키게 한 뒤 그들을 이끌고 전투에 나섰다. 그의 작지만 강한 군대는 결국 수적으로 우세한 야만인들을 물리쳤다. 코트리구르 훈족은 도망쳤고 이후 다시는 콘스탄티노플을 위협하지 않았다.

 

하지만 승리를 거둔 뒤에도 벨리사리우스는 쉴 수가 없었고 보상조차 제대로 받지 못했다. 그로부터 3년 후 황제 암살 음모에 가담했다는 억울한 누명을 쓰게 되었던 것이다. 결국 그는 563년 7월 유스티니아누스가 주위의 권고로 무죄 방면할 때까지 가택연금 상태에서 살아야 했다. 벨리사리우스는 유스티니아누스보다 겨우 몇 개월 앞서 565년 3월 콘스탄티노플에서 세상을 하직했다. 그의 아내 안토니나는 그보다 몇 년을 더 살았는데 벨리사리우스가 죽자 국가에서 그의 재산을 몰수하는 바람에 빈털터리가 되어 수도원에서 여생을 보내야 했다. 벨리사리우스의 비참한 종말을 거짓 전설을 낳았고 그 전설은 후세에 유럽 전역에 퍼져 나갔는데 내용인즉 그가 말년을 콘스탄티노플의 거리에서 장님 거지로 살았으며 그에게 동전을 던져준 행인들은 그가 과거에 세 대륙에서 승승장구했고 히포드롬에서 개선 행진까지 벌였던 위대한 장군이었음을 알아채지 못했다는 것이다.

 

구걸하는 벨리사리우스를 묘사한 그림

 

유스티니아누스 시대는 암운이 짙게 드리워진 상태에서 막을 내리고 있었고 553년에서 557년 사이에 콘스탄티노플을 강타한 일련의 지진들이 임박한 종말의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이 지진들로 구조가 약해진 하기아 소피아는 뒤이은 558년 5월 7일 다시 지진이 일어나자 중앙 돔의 동쪽 부분이 붕괴하는 심각한 손상을 입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즉각 보수 작업에 나서 밀레투스 출신의 이시도루스의 조카 이시도루스에게 지휘를 맡겼다. 복원된 교회는 563년 크리스마스이브에 다시 봉헌되었는데 유스티니아누스는 에우티키우스 총대주교오 함께 마차를 타고 행렬의 맨 앞에 서서 하기아 소피아로 향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졸증 아니면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는데 최후의 날인 565년 11월 14일까지 황제로서의 의무를 수행했다. 이틀 후 그는 자신이 성사도 교회 안에 새로 만든 거대한 묘지로 옮겨져 테오도라와 나란히 반암으로 만든 관에 안장되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83살을 일기로 38년이 넘게 제국을 다스린 뒤 서거했는데 그의 통치기는 비잔틴 제국의 역사에서 가장 빛나는 시기였다. 그러나 연대기 작가 에바그리우스는 유스티니아누스 재위기에 대한 설명을 마무리하며 이렇게 썼다. “이 군주는 온 세상을 잡음과 혼란으로 가득 채우고 그렇게 죽었다. 삶이 끝난 후 자신의 비행에 대한 응보를 받아야 하기에 지옥의 재판관에게 심판을 받으로 갔다.” 반면 현대 역사가들은 유스티니아누스를 높이 평가하며 하기아 소피아의 축조와 잃어버린 로마 제국의 영토를 되찾겠다는 그의 야심을 높이 사서 그의 재위기를 비잔틴 역사의 황금기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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