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운동의 배경
3.1 운동의 배경으로써 우리는 흔히 월슨의 민족자결주의만을 떠올리지만 사실 3.1운동은 그 외의 외부적, 내부적 요소들이 결합되어 발생한 독립 운동이었습니다. 민족자결주의는 외부적 요소들 중 하나였구요.
외부적 요소 | 월슨의 민족자결주의 및 2.8 독립선언 등 |
내부적 요소 | 일제 통치 방식에 대한 불만의 누적 등 |
우선 '민족 자결'은 특정 주민의 국가 귀속과 독립을 강조하는 표현으로서 당시 일제의 식민지 하에 있었던 한국에 있어 많은 지지를 받았고 일본에서 일어난 2.8 독립 선언, 그리고 미주 내에서의 한인 활동에 있어 많은 영향을 미쳤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월슨의 민족자결주의가 한국인들 사이에서 지지를 받는 과정에 있어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이 발생하는데 바로 월슨 외에 레닌도 민족자결을 주장하였으나 결국 지지를 받은 것은 월슨의 민족자결주의였다는 점입니다.(이는 추후 따로 글을 써보도록 하겠습니다.)
아무튼 월슨의 민족자결주의는 국외의 움직임에 활기를 불어 넣어 주어 신한청년당이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한국민족대표로 파견하는 계기를 주었으며 이외에도 미주 내 한인들에게 있어 많은 자극을 주어 활발한 활동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또한 월슨의 민족자결주의는 당시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있던 한국인 유학생들에게도 큰 자극을 주어 일본의 한복판 동경에서 일어난 2.8 독립 선언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2.8 독립 선언은 비록 실패했지만 이 소식이 한국으로 전해져 이후 있는 3.1 운동의 도화선이 되는데 많은 기여를 합니다.
외부적으로 월슨의 민족자결주의가 해외에서의 활발한 움직임과 3.1 운동의 도화선이 된 2.8 독립선언의 계기가 되었다면 내부적으로는 그 동안의 일제 통치 방식에 대한 민중들의 불만이 3.1 운동의 배경으로서 크게 작용하였습니다.
당시 일제는 한일합방 이후 총독부의 설치와 함께 소위 '무단 통치'를 실시하고 있었으며 이와 함께 헌병 경찰과 일본 군대를 기반으로 한 공포 분위기 조성, 한국인만을 대상으로 한 '조선태형령'과 같은 한국인 차별, 법적 수속이나 재판 등을 거치지 않고 자의로 한국인에게 벌금이나 태형, 구류 등의 처벌을 가했던 헌병 경찰의 권리 박탈, 식민지 경제 구조로서의 조선 경제의 개편을 통한 경제적 압박, 산림령이나 어업령과 같은 각종 령과 세금 부과 등을 통해 많은 내제적 불만을 야기하고 있었던 상황이었습니다.
이러한 내제적 불만이 점차 고조되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갑작스러운 고종 황제의 서거와 독살을 의혹은 가뜩이나 일제의 억압으로 내제되어 있던 민중들의 항일감정을 더욱 격화시키는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결국 3.1 운동은 내부적으로는 일제 식민 정책에 대한 민중들의 불만 누적과 고종 황제의 갑작스러운 서거, 그리고 외부적으로 월슨의 민족자결주의에 따른 독립 운동가들의 분위기 고조, 2.8 독립선언의 자극 등이 서로 복합적으로 결부되면서 1919년 3월 1일, '대한독립 만세'라는 외침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2. 3.1 운동의 전개
3.1 운동이 가장 먼저 논의된 곳은 천도교 측에서였습니다. 천도교의 최린은 동경에서 있었던 2.8 독립 선언에 대한 소식을 듣고 당시 천도교의 지도자였던 손병희를 만나 운동에 대한 구체적 논의에 들어갑니다. 이 과정에서 운동이 원칙이 세워지는데 그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첫째, 대중화 |
둘째, 일원화 |
셋째, 비폭력 및 먼저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여 국민 여론을 환기하고 이후 일본 정부와 조선총독부 등에 국권반환 요구서를 발송, 미국 대통령과 파리 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할 것. |
여기서 이제 운동의 대중화를 위해서는 천도교 단독이 아닌 기독교와 불교 등 각종 종교단체는 물론 명망 있는 인사들을 모아 민족대표로써 함께 해야한다는 데에도 합의를 보아 이후 천도교는 기독교 측의 이승훈, 불교 측의 한용운을 만나 참여를 이끌어었으며 이와 함께 독자적으로 독립 선언서의 발표를 추진하고 있었던 학생조직까지도 합류하게 되면서 주도체의 집결은 물론 운동의 본격적인 준비 단계에 돌입하게 됩니다.
이후 민족대표 33의 결정과 시행 날짜까지 순조롭게 결정되고(초기에는 3월 3일이 계획이었으나 고종의 국장일이었기에 예의가 아니며 2일은 일요일에어서 기독교 측에서 피하려 했기 때문에 최종적으로 1일로 결정되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독립 선언서의 경우도 최남선이 작성하고 이에 한용운이 공약 3장을 추가하여 완성 됨으로써 이제 남은 것은 독립 선언서의 인쇄와 운동의 실행만이 남게 됩니다.
천도교 측 인물 (15) | 손병희, 권동진, 오세창, 최린, 이종일, 권병덕, 양한묵, 김완규, 홍기조, 홍병기, 나용환, 박준승, 나인협, 임예환, 이종훈 |
기독교 측 인물 (16) | 이승훈, 양전백, 이명룡, 유여대, 김병조, 길선주, 신홍식, 박희도, 오화영, 정춘수, 이갑성, 최성모, 이필주, 김창준, 박동완, 신석구 |
불교 측 인물 (2) | 한용운, 백용성 |
3월 1일. 운동의 시작은 태화관에 모여 있던 민족대표 29인(4명은 당시 지방에 있어 참석을 못함)은 독립 선언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사전 신고를 받은 일본 경찰에 의해 민족대표들은 후송 조치되어 민족대표의 부재라는 상황이 발생하게 됩니다만은 당시 파고다 공원에 모여있었던 군중들 중 경신학교 졸업생 정재용의 독립선언서 낭독과 학생들의 적극적인 주도로 운동은 계속해서 이어질 수 있었습니다. 그 날 서울에서의 만세는 적극적인 서울 시민들의 호응과 고종 황제의 국장을 위해 지방에서 올라 온 지방민들의 호응 속에 하루 종일 지속되었으며 이에 당황한 일제는 진압을 위해 경찰과 헌병 외에도 용산에 주둔하고 있었던 군대까지도 동원하여 시위를 진압하고자 하였으나 당일 서울 외에도 평양과 같은 몇몇 대도시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일어난 탓에 결국 완전한 진압에는 실패하였으며 만세 시위는 전국적으로 퍼져나가게 됩니다. 그리고 3월 중순에 이르러서는 전국 13도로 퍼져 나가면서 만세 운동은 전국적인 성향을 띄게 됩니다.
3. 운동의 결과
전국적으로 퍼져 나갔던 운동은 결국 일제의 강압적 진압에 의해 다수의 희생자와 함께 통치법 위반 행위라는 명목으로 다수가 체포 및 기소되면서 막을 내리게 됩니다. 그러나 운동의 파급력은 이후 많은 변화를 이끌어 내었는데 이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일제의 통치 방법의 변화.
운동 과정에서 크게 당황했던 일제는 기존의 통치 방식에 대한 수정이 시급함을 체감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에 따라 탄생하게 된 것이 '문화 통치'로 조선 총독 임명 자격을 무관에서 문관으로 전환, 태형 제도의 폐지, 보통경찰제도의 시행, 신문 간행 허가, 검열 제한 완화, 한국인 관리 수 확대, 참여관제 시행 등의 대규모의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사실상 민족 분열과 친일파 양성을 노린 기만책이었습니다)
둘째, 상해 임시정부의 수립.
3.1 운동은 운동을 지도 및 확산에 노력했어야 했던 민족대표가 자진해서 경찰에 호송되어 가면서 지도자의 공백 속에서 이루어지게 된 운동이었는데 이는 결국 지방으로의 확산 과정에서 초기 의도하였던 비폭력적 운동의 성향이 무너지게 되고 무질서적인 성향으로 나아가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운동 기간 동안 체감한 지도자의 부재에 따른 반성은 운동의 정신 계승과 구심점이 필요하다는 논의로 이어져 이후 임시정수 수립의 활발한 논의의 계기가 됩니다.
셋째, 침체되어 있던 항일 운동에 자극.
3.1 운동 이후 일제의 적극적인 탄압 정책 속에서 정체되어 있던 국내 항일 운동은 다시 활기를 얻었으며 이와 더불어 미주의 한인들, 만주와 연해주 독립군 무장 투쟁에 있어서도 활기를 불어 넣어 주었습니다. 또한 이후 독립 운동 참여 계층의 확대와 방법론의 다양화에 있어서도 계기가 되었습니다.
넷째, 세계 여론의 환기와 인도와 중국으로의 영향.
진압 과정에서 보여준 일제의 폭력성이 알려지면서 세계 여론이 한국이 주목되었고 더불어 동정과 일제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가 커지게 되었습니다. 또한 인도의 네루가 딸에게 보내는 편지나 북경대학생 3천여 명이 일본의 강압적인 제국주의적 21개 조항이 베르사이유에서 승인된 것에 대해 분노하며 천안문 앞에서 데모를 일으켰을 때 최초의 선언문에서 3.1 운동을 계승하자는 뜻의 내용이 실렸다는 점에서 직접적으로까지는 아니더라도 간접적으로나마 영향을 미쳤음을 알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