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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을 다 쏟아내고 눈썹만 남은 내 사랑. (BGM)
게시물ID : lovestory_7880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글봇
추천 : 11
조회수 : 1094회
댓글수 : 4개
등록시간 : 2016/05/28 23:2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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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도한 입술이 흐리게 젖느다

섬망을 노래하는 어리석은 벌레들이

검고 푸르게 간격을 지우며 움직인다

시곗바늘 소리에 맞추어

사랑한다고 함께 죽자고

숨이 벅차다고 그늘이 휜다고.




/ 이준규, 흑백 1












이 밤

꽃의 남편이 되어

꽃의 품속에서 하룻밤

푹 자고 싶다.




/ 김충규, 꽃 냄새가 있는 밤 中











북극에 가면,

'희다'라는 뜻의 단어가

열일곱 개나 있다고 한다


눈과 얼음으로 뒤덮여

온통 흰 것뿐인 세상


그대와 나 사이엔

'사랑한다'라는 뜻의 단어가 몇 개나 있을까


북극에 가서 살면 좋겠다

날고기를 먹더라도

그대와 나, 둘만 살았으면 좋겠다

'희다'와 '사랑한다'만 있는

그런 꿈의 세상.




/ 이정하, 북극으로











내 마음 초롱한 입구 어귀로 잠잠히 새벽이 뒷걸음친다.

어서 와, 어서 와. 마음의 횃불 사이로 떨어지는 불꽃에

가만스레 얼굴을 씻는 그대야.


너의 잔잔한 파문에도

나는 사정없이 꽃이 되어버려.

이 내 꽃을 거둘 생각은 없니?


말린 꽃잎이 되어 네 달콤한 일기장에 갈피가 되마.


무참히도 고요한 너의 미소가 내 혈관 속을 헤엄쳐.

나의 체온은 곧 네 입술의 온도가 되고,

불현듯 네게 입을 맞추고 싶어진 것은 비밀로 하자.


그대야,


그대는 가만있었는데

왜 내게는 없던 바람도 불어와?

왜 나를 이렇게 송두리째 흔들어?




/ 서덕준, 태풍의 눈











내가 본 창경원 코끼리의 짓무른 눈꺼풀을 너도 봤다든가

네가 잡았던 205번 버스 손잡이를 내가 잡았다든가

2호선 전철에서 잃어버린 내 난쏘공을 네가 주워 읽었다든가

시청 앞 최루탄을 피해 넘어진 나를 일으켜준 손이 네 손이었다든가


네가 앉았던 삼청공원 벤치, 내가 건넜던 대학로의 건널목, 네가 탔던 동석 택시,

내가 사려다 만 파이롯트 만년필, 네가 잡았던 칼국수집 젓가락,

내가 세 들고 싶었던 아현동 그 집


열쇠 수리공은 왜 그때 열쇠를 잃어버렸을까

도박사는 왜 패를 잘못 읽었고 시계공은 왜 깜빡 졸았을까 하필 그때

한 여자가 한 남자에게 사과를 건넨 그때는 왜 하필 그때였을까


너 있으나 나 없고 너 없어 나도 없던

시작되지 않은 허구한 이야기들

허구에 찬 불구의 그 많은 엔딩들은

어느 생에서야 다 완성되는 걸까


네 졸업사진 배경에 찍힌 빨간 뺨의 아이가 나였다든가

내 어깨에 떨어진 송충이를 털어주고 갔던 남학생이 너였다든가

혼자 봤던 간디 영화를 나란히 앉아 봤다든가

한날한시 같은 별을 바라보았다든가

네가 쓴 문장을 내가 다시 썼다든가

어느 밤 문득 같은 꿈을 꾸다 깼다든가.




/ 정끝별, 끝없는 이야기











그리움의 문턱쯤에

고개를 내밀고서


뒤척이는 나를 보자

흠칫 놀라

돌아서네


눈물을 다 쏟아내고

눈썹만 남은

내 사랑.




/ 김강호, 초생달











애들아, 저 봄 봐라!

창문을 열었지요


그런데 아이들은

힐끔 보고 끝입니다


지들이

그냥 봄인데

보일 리가 있나요.




/ 고춘식, 봄, 교실에서











물결은 강어귀를 돌아서

더 깊은 곳으로 걷지

너도 지금 그렇게

내 이름의 바깥으로 걸어나가니


너무 어여쁜 것도 사람의 마음에

멍이 들게 하는지,

너는 나와의 인연을 스치고

내 가여운 어귀를 돌아

꽃으로 여울지었지


그대는 꽃여울이었지.




/ 서덕준, 꽃여울의 전설











어느 길 잃은 어린 여자아이가

한 손의 손가락에

꽃신발 한 짝만을 걸쳐서 들고

걸어서 맨발로 울고는 가고

나는 그 아이 뒤 곁에서

제자리걸음을 걸었습니다

전생 같은 수수년 저 오래 전에

서럽게 떠나버린 그녀일까고

그녀일까고.




/ 서정춘, 꽃신











이십 년을 넘게 산 아내가

빈 지갑을 펴 보이며

나 만 원만 주면 안 되느냐고 한다

낡은 금고 얼른 열어

파란 지폐 한 장 선뜻 내주고 일일 장부에

'꽃값 만 원'이라고 적었더니

꽃은 무슨 꽃,

아내의 귀밑에 감물이 든다.




/ 김광선, 만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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