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사뿐히 걸어보소서 흩날리는 머릿결에도 내 마음엔 폭풍이 일고 나는 당신께 수몰되리니.
-
나비효과, 서덕준
네게는 찰나였을 뿐인데 나는 여생을 연신 콜록대며 너를 앓는 일이 잦았다.
-
환절기, 서덕준
어둠 속 행여 당신이 길을 잃을까 나의 꿈에 불을 질러 길을 밝혔다.
나는 당신을 위해서라면 눈부신 하늘을 쳐다보는 일쯤은 포기하기로 했다.
-
가로등, 서덕준
눈가에 시 몇 편이 더 흘러내려야 나는 너 하나 추방시킬 수 있을까.
-
추방, 서덕준
겨울이었어 네가 입김을 뱉으며 나와 결혼하자 했어 갑자기 함박눈이 거꾸로 올라가 순간 입김이 솜사탕인 줄만 알았어 엄지발가락부터 단내가 스며 나는 그 설탕으로 빚은 거미줄에 투신했어 네게 엉키기로 했어 감전되기로 했어 네가 내 손가락에 녹지 않는 눈송이를 끼워줬어 반지였던 거야
겨울이었어 네가 나와 결혼하자 했어.
-
오프닝 크레딧, 서덕준
너는 내 통증의 처음과 끝.
너는 비극의 동의어이며,
너와 나는 끝내 만날 리 없는
여름과 겨울.
내가 다 없어지면
그때 너는 예쁘게 피어.
-
상사화 꽃말, 서덕준
너는 나의 옷자락이고 머릿결이고 꿈결이고 나를 헤집던 사정없는 풍속이었다.
네가 나의 등을 떠민다면 나는 벼랑에라도 뛰어들 수 있었다.
-
된바람, 서덕준
누가 그렇게 하염없이 어여뻐도 된답니까.
-
능소화, 서덕준
밤이 너무도 어두워 잘 보이지 않았지만 옅은 별이 유독 비추는 곳 있어 바라보니
아, 당신이 있었습니다.
-
별 I, 서덕준
붉게 노을 진 마음에 머지않아 밝은 별 하나 높게 뜰 것입니다.
보나마나 당신이겠지요.
-
별 II, 서덕준
퀴퀴한 창고 구석에 녹슨 통기타 하나가 놓여 있었다. 세월은 겹겹이 쌓여 무덤을 만들고 그 위엔 턱수염같은 잔디가 자라있었다. 나는 먼지를 털고 나서 한참 후에야 알았다.
그것은 낡은 기타가 아닌 아빠의 옛 꿈이었음을.
-
옛 꿈, 서덕준
주제를 알면서 감히 꿈을 꿨다 남루하고 깨진 마음에 버겁게도 밀어 넣었다
내 마음에 절망이 스미고 결국 가라앉아 강바닥에 묻힌다 한들 기어코 담고 싶었다.
당신을 구겨 넣고 이 악물어 버텼건만 내가 다 산산이 깨어지고 강바닥에 무력히 스러져 눕고서야 알았다.
그대는 그저 흐르는 강물이었음을.
-
강물, 서덕준
내가 철없었어요.
어린 시절, 성냥불같이 단번에 타올랐던 내 사랑 이렇게 지금까지 그을린 자국이 남아있을 줄이야.
성장통이 끝난 나의 마음 한가운데 당신 얼굴로 그을려 있는
철없던 나의 사춘기.
-
사춘기, 서덕준
너를 그리며 새벽엔 글을 썼고 내 시의 팔 할은 모두 너를 가리켰다.
너를 붉게 사랑하며 했던 말들은 전부 잔잔한 노래였으며 너는 나에게 한 편의 아름다운 시였다.
-
너의 의미, 서덕준
네가 새벽을 좋아했던 까닭에 새벽이면 네가 생각나는 것일까.
아, 아니지. 네가 새벽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내가 너를 좋아해서였구나.
-
새벽, 서덕준
남들은 우습다 유치하다한들 나는 믿는다 영원한 영혼을, 죽음 너머 그 곳을.
그렇다고 믿자.
내가 늙고 어느덧 잔디를 덮어눕고 당신이 있는 그 곳에 가거든
한 번 심장이 터져라 껴안아라도 보게. 나 너무 힘들었다고 가슴팍에 파묻혀 울어라도 보게.
-
천국, 서덕준
마음이 사무치면 꽃이 핀다더니 너 때문에 내 마음엔 이미 발 디딜 틈 없는 너만의 꽃밭이 생겼더구나.
-
꽃밭, 서덕준
무지개가 검다고 말하여도
나는 당신의 말씀을 교리처럼 따를 테요
웃는 당신의 입꼬리에 내 목숨도 걸겠습니다.
-
당신은 나의 것, 서덕준
자식이라는 이름으로
가슴 곳곳에 대못질을 했다.
아빠는 내가 못을 박은 곳마다
나의 사진을 말없이 걸어놓곤 하셨다.
-
사진보관함, 서덕준
그 사람은 그저 잠시 스치는 소낙비라고 당신이 그랬지요.
허나 이유를 말해주세요. 빠르게 지나가는 저 비구름을 나는 왜 흠뻑 젖어가며 쫓고 있는지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