폼페이우스
안토니우스
옥타비아누스
이제 남은 문제는 카이사르가 16아스를 1데나리우스로 계산하면서 분기별 지급액인 75데나리우스를 2배로 인상하였는가, 아니면 단순히 일당만을 두배 인상하였는가의 문제인데, 폴리비우스 시기 군인들의 봉급은 일당으로 계산하였고 기원후 14년 반란을 일으킨 로마군 군단병들이 요구한것 역시 일당의 인상이었다.
즉 아우구스투스 시기까지 봉급 계산과 지급은 일당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대大 플리니우스의 글에서 군인 봉급의 가치 보전이 우선시 되었던 것을 볼때 카이사르를 10아스 = 1데나리우스의 공식을 그대로 보전해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사회에서 동화의 가치하락으로 16아스가 1데나리우스일 때 군단병의 일당은 5와 1/3아스가 되는데 카이사르는 이를 약 두 배 가량 즉 10아스로 인상하여 총 225데나리우스의 연봉을 지급하였고 군인들은 4개월마다 한 번씩, 즉 1월, 5월, 9월에 75데나리우스씩 봉급을 받았던 것이다.
이렇게 카이사르가 봉급을 인상하였다고 해도 사실 군인들의 연봉 225데나리우스는 로마인이 생활하는데 그렇게 많은 금액이 아니었다.
당시 로마시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일당은 보통 12아스였다. 군인 처럼 360일을 기준으로 연봉을 계산할 경우 270데나리우스(12×360÷16)가 된다. 거기에 더하여 노동자와 군인이 지출하는 내용은 서로 다르다.
가령 로마시 거주자들은 다른 이탈리아 지역 보다 높은 임대료를 내야하고, 군인들은 무기를 구입해야 한다. 하지만 단순히 액수만을 놓고 비교할때 즉 온갖 지출을 공제한 차액에서 군인의 연봉은 제대 후를 위하여 많은 돈을 저축할 수 있을 정도는 결코 아니었던 것 같다.
따라서 내란기에는 군인들의 충성심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특정 장군을 따르는 군인들에게 상여금이 지급되었고, 그 액수는 아주 컸다.
예를 들자면 루쿨루스가 자신의 군단병들에게 지급한 금액은 일인당 950 데나리우스였고, 폼페이우스는 기원전 62년 일인당 1,500 데나리우스를 지급하였다.
이는 카이사르 휘하의 군인들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 기원전 44년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의 예를 따라 휘하의 병사들에게 500데나리우스를 지급하였고, 승리할 경우 자그마치 5,000데나리우스를 더 지급할 것을 약속하였다.
기원전 43년 옥타비아누스는 2,500데나리우스를 지급하였다. 이는 11년치 연봉에 해당하는 거금이다. 이러한 상여금은 봉급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금액이었기 때문에 군인들의 경제력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물론 충성심이나 전투력 향상에 미친 영향 역시 지대하기는 마찬가지 일것이다.)
게다가 권력을 가진 장군의 휘하에서 복무한 경우, 운이 좋으면 무려 토지도 받을 수 있었다.
수년간의 봉급에 해당되는 상여금과 토지를 받았을 때는 아무리 공제를 한다 할지라도 제대 후의 안정적인 삶을 거의 반드시 보장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징집병들 외에도 지원병들이 상당수 복무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상여금과 토지의 혜택은 그 규모로 보아 군복무의 자극제 역할을 하였음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