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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여왕 알고 보기
게시물ID : freeboard_36571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L.Terry
추천 : 7
조회수 : 590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09/09/15 10:37:04
●선덕여왕 (善德女王 ?∼647)

신라 제27대 왕(632∼647). 
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덕만(德曼). 
진평왕의 장녀로, 화백회의(和白會議)에서 왕으로 추대되었다. 

즉위년인 632년에 대신 을제(乙祭)로 하여금 국정을 총괄하게 하고, 전국에 관원을 파견하여 백성들을 진휼(賑血)하였으며, 633년에는 주군(州郡)의 조세를 1년간 면제해 주는 등 민심을 수습하였다. 

634년 분황사(芬皇寺)를, 635년에는 영묘사(靈廟寺)를 세웠다. 대외적으로는 634년에 인평(仁平)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함으로써 당(唐)나라에 대한 신라의 자주성을 견지하려고 하였다. 

642년부터 고구려와 백제의 본격적인 침공을 받자 김유신(金庾信)을 압량주(押梁州;지금의 慶山) 군주(軍主)에 임명하여 백제의 공격을 방어하는 한편 643년에는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구원을 요청하였다. 

이 무렵 당나라로부터 귀국한 자장(慈藏)의 건의에 따라 호국불교의 상징인 황룡사구층탑(皇龍寺九層塔)을 축조하기도 하였다. 

신라의 구원 요청에 대해 당 태종은 여왕이 통치하기 때문에 양국의 침범을 받게 되었다는 문제점을 지적하는 한편, 고구려에 대하여 외교적 견제를 가하였으나 연개소문(淵蓋蘇文)에 의해 거부되었다. 

647년 상대등 비담(毗曇)과 염종(廉宗) 등 진골귀족들은 당 태종이 지적하였던 여왕 통치의 문제점을 들어 반란을 일으켰으나, 김유신·김춘추(金春秋)에 의해 진압되었다. 시호는 선덕(善德).



●비담의 난!

647년(선덕여왕 16) 신라의 상대등 비담이 일으킨 반란. 
 
 645년 상대등에 취임한 비담은 647년 선덕여왕이 정치를 잘못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스스로 왕위에 오르려고 염종 등과 더불어 반란을 일으켰다. 

신라 최고의 관직인 상대등이 일으킨 반란이므로 그 규모가 컸고, 
사태도 매우 위급하게 전개되었다. 

반란의 와중에 선덕여왕이 죽고 진덕여왕이 즉위하는 등 왕실이 위기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김춘추(金春秋) ·김유신(金庾信) 등의 도움으로 반란을 진압하고 비담 등 주모자의 구족(九族)을 멸하였다. 

이 반란은 단순한 왕위쟁탈전이 아니라 신라 정치사에서 한 획을 긋는 사건이었다. 
신라는 중고기(中古期:법흥왕~진덕여왕)에 들어가면서 국가체제를 정비하고, 정치사회이념으로 불교를 받아들이면서 왕권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화정책을 강력히 추진하였다. 

특히 선덕여왕 이후는 귀족에 의해 폐위된 진지왕의 손자인 김춘추와, 가야 멸망 이후 신라의 새로운 김씨로 포섭된 가야왕실의 후손 김유신이 손을 잡고 이러한 정책을 더욱 강하게 밀고 나갔다. 

이에 자신들의 위치가 불안하게 된 귀족은 불만을 표출할 수밖에없었는데, 이것이 대대적으로 표출된 것이 바로 귀족의 대표인 상대등이 중심이 된 이 난이었다. 

그러나 승리는 결국 김춘추 ·김유신에게 돌아가, 이들이 중심이 되어 더욱 강력한 왕권강화와 중앙집권체제에 필요한 여러 시책들이 실시되었다. 

그러다가 결국 김춘추가 태종무열왕으로 즉위함으로써 귀족연합체제를 이루던 상대(上代)가 막을 내리고, 중대(中代)가 시작되면서 왕권 중심의 중앙집권체제가 이루어졌다. 

결국 이 난은 신라 상대 말기에 왕권을 견제하려던 귀족세력과 왕권강화를 통한 중앙집권체제를 수립하려던 왕실세력의 싸움이었고, 여기서 김춘추 ·김유신 등의 왕실세력이 승리함으로써 장차 신라 중대 왕실이 성립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역사서에는 전혀 언급이 없는 '비담'의 개인신상

앞으로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덕만·천명·유신 등과 더불어 이야기의 한 축을 구성하게 될 비담. 

그는 정말 5대 진지왕과 미실 사이에서 태어났을까? 역사 기록에서는 어떻게 말하고 있을까?

비담은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3차례 등장하는 인물이다. 

<삼국사기> 권5 '선덕여왕 본기' 및 '진덕여왕 본기', 권41 '김유신 열전'에 비담이라는 이름이 나온다. 
그리고 위작 논란이 있는 필사본 <화랑세기> 제24세 풍월주 천광공 편에도 그의 이름이 1차례 나온다. <삼국사기>와 <화랑세기>를 합하면, 그의 이름은 도합 4차례 나온다. 

그런데 위 4개의 기록은 모두 다 선덕여왕 16년(647)에 벌어진 비담의 쿠데타와 관련된 것들이다. 

이들 자료에는 비담이 여왕 말년에 쿠데타를 일으켰다가 김유신 등에 의해 진압됐다는 내용만 나올 뿐, 그의 개인 신상에 관한 기록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 

따라서 비담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누구였는지에 관한 역사기록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그가 진지왕과 미실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설정은 역사기록에는 전혀 나오지 않는 이야기다. 또 진지왕과 미실 사이에서 비담 외의 자식이 태어났다는 기록도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이처럼 진지왕과 미실이 비담을 낳았다거나 혹은 진지왕과 미실이 자식을 낳았음을 보여주는 직접적 자료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방법으로 사실을 확인할 수밖에 없다. 

그 다른 방법이란, 진지왕과 미실이 자식을 낳았을 '가능성'이 있는가를 추적하는 것이다. 



●재위 3년 동안 미실에 대한 사랑이 식어버린 진지왕

2개의 왕비혈통 중 하나인 대원신통의 계승자인 미실은, <화랑세기> 제11세 풍월주 하종 편에 따르면, 제24대 진흥왕 재위기(534~576년) 때 진흥왕을 포함한 3대의 제왕을 모실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이에 따라 미실은 진흥왕·진지왕·진평왕 3대의 후궁이 될 수 있었다. 

거기다가 <화랑세기> 제6세 풍월주 세종 편에 따르면, 진흥왕 사후에 미실은 왕후가 되는 조건으로 진지왕의 등극을 도와준 것을 계기로 사도태후(진흥왕의 부인)와 함께 국정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진흥왕 생전에도 진지왕과 미실이 육체적 관계를 가진 적은 있지만, 두 사람이 육체적·정치적으로 가장 근접 거리에 있었던 시기는 진지왕 즉위부터 폐위까지의 3년간이었다.  

그럼 그 3년 동안에 두 사람 사이에서 자식이 태어났을 가능성이 있을까? 이에 관한 명확한 기록은 없지만, 그것을 판단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자료는 있다.  

위의 <화랑세기> 세종 편에 따르면, 재위 3년 동안 미실에 대한 진지왕의 애정은 이미 식어버린 상태였다. 

왜냐하면, 진지왕의 관심을 사로잡은 또 다른 여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세종 편에서는 진지왕이 그 여자에게 깊이 빠져 있었다고 알려주고 있다. 

왕후로 만들어주겠다는 약속을 진지왕이 이행하지 않는 데다가 그나마 다른 여자에게 푹 빠져버린 데에 분노해서 미실이 사도태후와 함께 진지왕 폐위에 나서게 되었다는 것이 <화랑세기>의 이야기다. 그렇게 해서 제26대 진평왕이 등극하게 되었다는 것이 역시 <화랑세기>의 설명이다. 


●자식이 있었다면, 미실이 진지왕을 폐위했을까

진지왕과 미실이 자식을 낳았을 가능성이 있는가를 판단하기 위해, 위의 3년 동안에 진지왕과 미실의 관계가 어떠했는지를 곰곰이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약속을 지키지 않는 데다가 다른 여자에게 푹 빠져버린 진지왕을 미실이 파멸시킬 수 있었던 것은 기본적으로 둘 사이에 아무런 '미련'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게 자연스러울 것이다. 
그 사이에 자식이라도 있었다면, 미실이 진지왕을 죽음으로까지 내모는 극단적인 상황은 쉽게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왕실의 막후 실력자인 사도태후의 지원을 받는 미실의 몸에서 왕자가 태어났다면, 그 왕자는 진지왕의 부인인 지도왕후 쪽 소생들(김용수·김용춘)을 제치고 진지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를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다. 

그런데 진지왕이 죄인의 신분으로 추락하면 그 왕자의 처지 역시 불안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미실이 진지왕과의 사이에서 왕자를 낳았다면, 자기 아들의 불행을 의미하는 진지왕 폐위를 적극적으로 주도했을 리가 없다고 보는 게 상식에 부합할 것이다. 

진지왕과의 사이에서 왕자가 있었다면, 미실은 자신의 왕후 책봉보다는 아들의 왕위 등극에 보다 더 주안점을 두었을 것이다. 

둘 사이에 자식이라는 고리가 있었다면, 자신이 왕후가 되지 못하고 진지왕이 바람을 핀다는 이유만으로 미실이 진지왕을 폐위하는 극단적 사태는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위와 같은 정황들을 놓고 볼 때, 진지왕과 미실 사이에서 자녀가 출생했을 가능성은 사실상 거의 없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굳이 이런 정황증거들을 고려하지 않더라도, 두 사람 사이에서 자식이 태어났다는 기록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만 갖고도 사실 여부를 충분히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비담이라는 인물이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났을 가능성은 사실상 전무하다고 보아도 괜찮을 것이다. 


●'선덕여왕 대 미실' 구도에서 나온 허구의 설정

이처럼 비담이 진지왕과 미실의 자식일 가능성이 거의 전무한데도,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그를 두 사람의 아들로 설정한 근거는 무엇일까? 

그 근거는, 드라마의 기본 구도 속에서 짐작될 수 있다. 

이 드라마의 구도는 기본적으로 선덕여왕과 미실의 갈등·대립이다. 
그래서 이 드라마에서는 선덕여왕에게 대항한 인물들은 모두 다 미실 쪽으로 몰아넣고 있다. 

대표적인 예로 칠숙을 들 수 있다. 
칠숙이 미실의 부하로 설정된 것은 그가 선덕여왕 측에 맞서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점에 근거한 것이다. 실제로 그가 미실의 부하였는지에 관계없이 '선덕여왕의 적은 미실의 동지'라는 이분법적 사고 하에 그런 설정이 나온 것이다. 

<선덕여왕>의 비밀병기인 비담이 미실의 아들로 나타난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다. 
비담이 미실의 아들로 설정된 것은 그가 선덕여왕 말년에 쿠데타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그가 선덕여왕의 적이었기 때문에 분명히 미실 편에 가담하지 않았겠느냐는 가정에 근거한 것이다. 

비담이 선덕여왕에 맞서 쿠데타라는 극단적 선택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몸속에 여왕의 적인 미실의 피가 철철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겠느냐는 가정이 '비담은 미실의 아들'이라는 허구의 설정을 낳게 된 것이다. 



●알천공

알천공(閼川公 : 577년 진지왕2년~686년 신문왕6년)은 진주소씨 시조다.

 드라마에서는 김유신(金臾信)공과 비슷한 동년배로 말을 뜨고 있는데 이는 사실과 다릅니다. 

김유신공 보다는 18살이 연상이고 훗날 태종무열왕이 되는 김춘추(金春秋)공 보다는 27살이 연상입니다. 

소경(蘇慶)공과 소알천(蘇閼川)공은 동일인으로 577년 5월 6일에 태어나 686년 10월 12일109세에 작고하였고,  적제(赤帝) 축융(祝融)인 복해(復解)공으로부터 157세손이며, 득성시조 소풍(蘇豊=蘇昆吾)공으로부터 97세손, 후진한을 세운 소백손(蘇伯孫)공의 29세손, 박혁거세를 양육하여 신라를 건국하여 초대왕으로 세운 소벌(蘇伐)공(소벌도리공)의 25세손이 되는 것입니다. 

선덕여왕시대와 진덕여왕시대에 대장군과  이찬,  각간 상대등과 화백회의 의장 등으로 왕성한 활동을 하였습니다. 

특히 진덕여왕 승하시 화백회의에서 왕으로 추대되었으나 사양하고 김춘추(태종무열왕)를 왕으로 추대한 분으로 진주소씨(晉州蘇氏)의 시조(始祖)가 됩니다.

이에 태종무열왕은 알천공(경공)이 자신을 왕위에 추대한 공로로 알천공의 24대조인 소벌공을 문열왕(文烈王)으로 추봉하였습니다.

진주소씨 족보인 대동보에 그 증빙문헌이 기록되었고,  알천(閼川)이란 이름은 경(慶)공의 처음 이름입니다.

알천공의 아들인 노흔(老欣)공이 나이가 들도록 자식을 낳지 못하고 있어  걱정이었는데, 알천공의 나이 84세가 되던 해인 661년 알천공의 손자 소복서(蘇福瑞)가 태어나므로 후손이 끊길 뻔했다가 문중의 대를 잇게 되는 경사를 맞으므로써 경사로울 경(慶)자를 써서 소알천(蘇閼川)에서 소경(蘇慶)으로  이름을 바꾼 것입니다.



●선덕여왕의 위기를 구한 알천랑

* 신라시대에는 대체로 젊은 귀족자재나 화랑에게는 이름뒤에 랑이라는 호칭을 쓰고, 
 결혼을 하고 높은 벼슬에 오르거나 큰 업적을 쌓은 사람들에게는 공이란 존칭을 씁니다.

 최근 드라마의 인기에 힘입어 관심이 모아지고 있는 알천은, 진주 소씨의  시조가 되시는 분이어서, 

생몰년도에 대해서도 진주소씨 족보에 자세히 전해지고 있다. 
 진주 소씨 족보에 의하면 박혁거세를 추대하였던 돌산 고허촌장 소벌공의 후손으로, 서기 577년 신라 진지왕 2년 5월6일 출생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그는 남다른 담력과 뛰어난 인품을 두루갖춘 인물로 보이며, 김유신과는  한편으로 라이벌관계를 이루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신라 최대의 국난을 극복해 나갔다.

알천랑이 본격적으로 이름을 떨치기 시작한것은 선덕여왕때  부터였다. 

당시 고구려 백제 신라는 최후의 승자가 되기 위하여 한치의 양보도 없는 전쟁을 하고 있었으며, 특히 선덕여왕이 즉위하자 고구려와 백제는 신라를 가벼이 보고 집중공격을 하였다.

 심지어 635년 선덕여왕 4년 백제는 신라영토 후방 깊숙한 곳인 여근곡에 1800여 명이나 되는 병력을 침투시켰다. 그런데 선덕여왕은 겨울철임에도 영묘사에 개구리가 우는것은 여근곡에 병사가 침투했다는 암시라며, 알천에게 출정을 명하였다.

백제군의 침투사실은 물론  정확한 작전지점까지 안 것으로 보아, 백제군의 침투 정보를 사전에 입수한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실추된 왕권을 추수리기 위해서는 선덕여왕을 신격화 시킬만한 업적이 필요하였고, 여근곡 인근의 독살성에 잠입한 백제군은 선덕여왕의 예지력을 선전하기에 좋은 사건이었을 것이다.

이에 알천은 1천명의 병력을 이끌고  필탄등과 함께 독살성을 습격하던 백제군 오백명을 전멸시키고 백제장수 우소를 남산령아래에서 사살시켰다.  

그리고 별동대 오백명에 이어 오던 주력 1300명 까지 모두 전멸시킴으로써, 밑바닥까지 실추되었던 선덕여왕의 권위를 세워주었다. 그러나 아직 위기는 끝나지 않았다. 

2년 후엔 백제보다 더욱 강한 적인 고구려가 신라 북방에 있던 칠중성을 공략해 들어왔다. 

이때 칠중성 인근 백성들 대부분이 산속으로 도망가는 등, 상황이 매우 심각하였다. 그러자 선덕여왕은 알천을 대장군으로 임명하여 칠중성 탈환을 명 하였다. 

고구려군이라면 당시 신라군으로서는 매우 벅찬 상대였지만, 알천은 이미 거점을 확보하고 있던 고구려군을 상대로 맹공격을 가하여 대승을 얻고 칠중성도 탈환하였다. 

이렇게 고구려와 백제군 모두에게 승리를 거둔 알천은 김유신보다 앞서나가기 시작하였으며, 647년 진덕여왕 즉위원년에는 상대등의 자리에 올라 비담의 반란으로 어수선한 전국을 수습하여 나갔다.



●김유신과 라이벌이었던 알천랑

알천공에 대한 자료는 그리 많지 않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김유신과 라이벌 관계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삼국유사에는 알천공의 담력은 물론 김유신과의 관계를 살펴 볼 수 있는 이야기가 짧게나마 소개되어 있다.

 진덕여왕당시 알천공은 화백회의의 수장을 맡아보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술종(述宗)·임종(林宗)·호림(虎林)·염장(廉長)·김유신(金庾信) 등과 함께 나라일을 논의하기 위해 경주 남산 우지암이란 곳에서 회의를 연일이 있다.

그리고 그때 갑자기 호랑이가 자석으로 달려들어, 참석하였던  사람들은 모두 놀라 피하였지만, 알천은 그자리에 태연하게 앉아있었다. 심지어 그는 호랑이 꼬리를 잡아 땅바닥에 던져 죽였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가 전해지는 것을 보아도, 알천공의 담력은 당대 신라최강을  자랑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권자라는 것은 뛰어난 담력만으로는 차지할 수 없는 것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제신들은 김유신의 위엄에 모두 복종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김유신이 군사력을 장악하고 있었음을 뜻하며, 결국 진덕여왕 사후 왕권계승 문제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화랑으로서의 길  

서기654년  진덕여왕이  재위 8년만에 사망하자, 화백회의에서는 알천을 섭정왕으로 추대하였다.  

신라는 전통적으로 왕위 계승자가 없을 경우 화백회의의 추대에 의해 왕위에 올랐다. 가까이는 선덕여왕이 그렇하였고, 미추왕역시 대신들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알천공은 고령을 이유로 왕위를 김춘추에게 양보하였다. 
비록 군사력면에서는 김유신 세력에 비해 빈약하지만, 알천공을 지지하는 세력역시 만만치 않은만큼 그가 끝까지 왕좌를 고집하였다면 신라의 국운조차 장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젊었을 때는 백제와 고구려를 상대로 전쟁터를 누볐으며, 나이게 들어서는신라 내정과 화백회의를이끌었던 알천공이 이러한 시국을 내다보지 못했을리 없다. 

 그리하여 알천공은 평화적인 방법으로 김춘추를 추대하였으며,  진골귀족 최초로 김춘추가 왕위에 오르니 태종무열왕이다.

무열왕은 재위 3년에 알천공의 선조이시자  신라개국공신인 소벌공에게 문열왕(文烈王)의 시호를 내려, 알천공의 마음을 달래고자 하였다.

그러나 왕위조차 마다한 알천공에게, 더이상의 명예와 권력은 중요한 것이 도지 못하였던 것 같다.  

알천공은  660년 3월 2일 모든 권력을 버리고 경주에서 진주(晋州) 도사곡으로 이사하여, 남은 여생을 그곳에서 마친것으로 진주 소씨 족보에는 전하고 있다고 한다.
참고로 연예인 소지섭씨가 소알천공의 47세손이 된다고 한다.   


 밑바닥까지 추락하였던 선덕여왕의 왕권을 회복시켜 주었던 알천랑, 그것은  위기에 빠진 신라왕조를 뒤살리는 매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또 화백회의의 수장이자 상대등으로서 혼란에 빠진 신라의 정치를 수습하여 나갔으며, 국론을 하나로 모으고 백성들의 평안을 지키기 위해 왕권조차 양보하신 분이다.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만약 그가 끝까지 왕권을 탐냈다면 선덕여왕의 말년처럼 신라는 또다시 내란에 휩싸였을 것이고, 결국은 백제와 고구려의 집중공격을 견디지 못하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차지하는 역사적 비중에 비하여,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등에 나와있는 그의 기록은 매우 빈약하다. 

다만 진주소씨 족보에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어, 그분이 진면목을 부족하나마 찾아 볼 수 있다.
 국가위기 극복과 백성들의 평안을 위하여 최고의 자리조차 양보한 알천공, 최근 드라마의 인기에 힘입긴 하였지만, 그분의 삶과 업적이 다시 평가되는 일은 매우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한국사 인물열전, 풀어보는 삼국사기, 오마이뉴스, 선덕여왕 열전, 정사와 야사              등에서 발췌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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